백범서거 64주기...'읽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인터뷰] <미씽 링크>의 작가 배상국

등록 2013.06.25 17:24수정 2013.06.2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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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씽링크> 1권 표지 ⓒ 도모북스

백범 서거 64주기(6월 26일)를 앞두고, 지난해 8월 백범 암살에 관한 팩션(fact+fiction) 소설을 출간한 배상국 작가를 만났다. 팩션 소설 <미씽 링크(MISSING LINK)>(도모북스)는 백범 암살 사건을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배상국 작가는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후, 파리 8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친다. 프랑스에서 7년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일찍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화를 경험했다. 2006년 여름,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손에 들려 있던 원고가 바로 <미씽 링크>이다.


현재 배상국은 근·현대의 시간 속을 거닐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기 위해 발품을 팔고 다닌다. 그러다보면 숨겨져 있던 드라마틱한 이야기들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라기보다는 대단한 발견이다. 18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배상국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백범 암살 사건, 여러 조직이 치밀한 계획 세운 것으로 보인다"

- 백범 암살 사건을 소설로 쓰게 된 계기는?
"원래는 영화를 생각했고, 시나리오 형태의 글이었다. 영화는 큰돈이 들어가야 한다. 투자자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우선 소설 형태로 써보았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 F. K>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영화는 의문투성이인 케네디 암살 사건을, 객관적 증거를 통해서, '그 순간, 그 자리'로 재구성하려 한다. 영화적 가설을 통한 접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 현대사의 거목들도 암살에 의해 숨을 거둔 경우가 많다. 특히 백범 암살은 우리 현대사에 중요한 사건이지만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 백범 암살은 '88구락부'라 일컬어지는 집단에서 계획하고, 당시 육군 소위였던 안두희가 행동에 옮긴 것 아닌가?
"안두희는 단순한 행동 대원이라고 보기 어렵다. 안두희는 미군방첩대(CIC)의 요원이며, 백색테러단체인 백의사의 단원이기도 했다. 1955년 미국정보기관의 정치사찰 기록에 첩보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자가 안두희다. 안두희는 첩보원으로서 발군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작의 전문가였다. 정보의 흐름을 잘 읽었을 것이고 정보의 흐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1984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 정보원으로 서북청년단원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 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라는 묘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고령이었던 이승만을 믿고 백범 암살이라는 엄청난 일을 벌일 만큼 안두희가 순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암살 사건을 앞두고 군에 입대한 것은 군인 신분이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00여 년 총기 역사상 단독범에 의한 암살 사건은 없다는 게 일반적 이론이다. 거목이었던 백범을 안두희 혼자서, 그것도 경교장에서 암살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1949년 6월 26일 당시, 경교장 1층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단 한 사람이라도 '권총은 풀어 놓고 올라가시오' 했다면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전이다.

안두희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조직이 움직였을 것이다. 안두희 이전에도 암살대의 암살 기도가 있었고, 사건 당일 헌병대와 특무대 요원들이 경교장 근처에 있었다. 총격 직후 특무대와 헌병대가 들이닥쳐 안두희를 모시듯 빼내갔다. 여러 조직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 <미씽 링크>는 '잃어버린 고리'란 뜻이다. 백범 암살 사건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고리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당시 경교장 2층 서재에는 백범과 안두희 단 둘뿐이었다. 백범은 죽고 안두희만 그 방을 걸어 나왔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총을 쏜 안두희만이 말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안두희의 진술을 토대로 한다. 안두희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암살 사실을 보고 받고 달려온 서대문경찰서장과 서울지검장도 사건 현장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조사는 특무대가 맡았고, 사건 직후 특무대장은 함께 사건을 모의한 김창룡으로 교체되었다. 재판장 역시 88구락부 멤버인 원용덕이었다.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오죽하면 안두희가 스스로 재판 방청권을 나누어주기까지 하고, 재판정에 '애국지사 안두희를 석방하라'라는 구호가 난무했겠는가?

사건 현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이 사라져버렸다. 보고서에 따라, 총을 맞은 부위도 '인중, 가슴, 하복부'인 경우도 있고, '인중, 가슴, 다리'인 경우도 있다. 사건 현장을 보긴 본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건 현장에서 몇 개의 탄피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조차 없다.

불행히도 관련된 이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고, 살아 있더라도 시간이 많이 흘러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성되었을 것이다. 백범 암살의 충격만 있고,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 사실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모두 다 사라져버렸다. '그 때, 그 자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잃어버린 고리'이다."

"여순사건에서 한국전쟁까지... 일련의 사건 속에서 백범 암살 생각해야"


- 암살 직후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한 것이 뼈아프게 느껴진다. 게다가 한국전쟁을 거치고 사건 현장인 경교장이, 병원으로 사용되는 등,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것도 아쉽게 느껴진다.
"암살 직후 백범이 북한과 내통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주장이 터져 나오면서 백범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한국독립당이 와해되었다. 까딱 잘못하면 공산당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진상규명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안두희는 재판 과정에서 백범이 북한과 내통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여, 백범을 쏘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 증거로 '비(秘)'자 도장이 찍힌 당원증을 제시하며 자신은 한국독립당의 비밀당원이고, 김학규 등이 심심치 않게 이승만 정부를 비난하고 경무대에 대포를 쏘려면 어찌 해야 하는냐 등을 물었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여러 나라 밀정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비밀당원이 있다손 치더라도 당원증에 대놓고 비밀당원이라는 도장을 찍어주었을까?

나는 사건 현장을 찍은 <라이프 LIFE>지의 사진에 주목한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교장에 도착한 특종전문 기자 칼 마이던스(며칠 전까지 도쿄에 있었던 칼 마이던스가 사건 현장에 그렇게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의심스럽다)의 사진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유리창에 난 두 개의 총탄 자국 너머로 오열하는 시민들을 담은 것이다.

백범 암살 사건을 다룬 보고서나 신문 기사는 대부분 4발의 총격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총을 맞은 부위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중 한 발은 인중에 맞고 꺾여 뺨을 뚫고 나갔고, 나머지 세 발은 가슴과 복부에 맞았다. 서거 직후 사진을 보면 인중과 뺨에 붕대를 댄 것이 보일 것이다. 또 당시 입고 있던 저고리에 총알 자국이 있다. 하지만 가슴과 복부의 총알은 관통상이 아니다. 혈의(血衣)의 뒷부분에 뚫고 나간 자국이 없기 때문이다.

관통상은 하나뿐인데 유리창에 총알 자국은 둘이다. 네 발의 총알이 쏘아졌고, 세 발은 백범의 몸에 남았고, 한 발은 인중에 맞고 꺾여 유리창을 꿰뚫었다. 그럼 유리창에 남은 또 하나의 총알 자국은 무엇인가? 총알 흔적 하나는 완전한 원형에 가깝고 또 다른 하나는 길쭉한 타원형에 가깝다. 같은 총기로 같은 자리에서 쏜 총알의 흔적이 왜 이렇게 다른가? 여기가 내 소설적 상상의 출발점이다."

- 총격이 빗나가거나 4발 이상의 총격이 이루어진 건 아닐까? 그리고 백범 암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분히 소설적이고 영화적인 접근이다. 하지만 안두희는 자기 스스로 사격 실력을 뽐내고 다닐 만큼 명사수였다. 급소만을 맞춘 것을 보아도 총격이 빗나갔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조직들이 함께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외부에서도 사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

이 소설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적 증거가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정황증거와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시도가 '잃어버린 고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통해 용기를 얻어 다양한 각도에서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섰으면 좋겠다.

우리는 여태까지 단독정부를 선언한 이승만과 남북연석회의를 강행한 김구의 갈등과 정쟁 속에서 백범 암살 사건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야를 더욱 넓힐 필요가 있다. 여순 사건, 이승만의 단독정부 발언, 국회 프락치 사건, 미군 철수, 반민특위 해체, 한국전쟁… 일련의 사건 속에서 백범 암살을 생각해야 한다.

이승만과의 갈등 관계뿐만 아니라, 한미관계, 남북관계, 미소관계… 그에 따른 여러 정치 세력의 갈등, 그리고 각국 정보기관들의 움직임, 정보원들의 공작… 여러 카테고리가 중첩되는 지점에서 백범 암살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상놈의 자식으로 태어나 동학운동, 교육운동을 거쳐 기나긴 임시정부 투쟁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의 광복에 바쳤고, 완전한 자주와 통일 정부를 꿈꾸었다.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政道)냐 사도(邪道)냐'를 따졌다.

먹고살기에 급급한 시대에 높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다. 의열(義烈) 투쟁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투박하고 거친 면모도 있었지만, 이 역시 겨레를 위한 순정(純正)에 기인한 것이다. 삶의 마지막 날 그가 썼다는 '사무사(思無邪)' 석 자는 그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의 죽음은 자주 독립의 꿈이 친일세력에 의해 꺾이고 통일의 꿈이 짓밟힌 사건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애통하고 통절하다.

배상국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노 이전에, 애통 이전에, 통절 이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더 많은 거짓이 난무하기 전에, 사건에 대한 실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진술들 사이에서 거짓을 가려내는 것, 사건 현장을 담은 사진 속의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는 것, 감추어진 비밀을 찾아내는 것.

미씽링크 1 - 잃어버린 고리

배상국 지음,
도모북스, 2012


#백범 암살 #경교장 #미씽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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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사, 한국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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