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 사건' 연출 배경인 6.8부정선거, 그리고 박근혜

1967년 6·8부정선거와 2012년 12·19 부정선거 비교분석

등록 2013.07.11 11:06수정 2013.07.1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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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7년 7월 8일,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은 기자회견을 열어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이른바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었다. 이어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에 3년 전인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에 가담했던 서울대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까지 얽어 넣었다. 그러나 훗날 밝혀졌듯이 동백림 사건, 민비연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조작극으로, 전혀 진실이 아니었다. 그럼 왜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들을 조작했던 것일까?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여당인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고자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며 여론공작을 벌인 사실이 탄로난 뒤 대학생을 필두로 각계각층에서 규탄에 나섰다. 그리하여 촛불집회와 함께 연일 시국성명이 줄을 잇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에서 이번 사태를 두고 "제2의 3·15부정선거" 또는 "3·15부정선거에 필적하는 사태"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지난 7월 4일 발표된 역사학자들의 시국선언문 <전국의 역사학자들이 국민께 드리는 글>에서도 이번 사태를 "3·15부정선거에 버금가는 범죄"로 규정했다.

물론 국정원의 18대 대선 개입 사태 역시 국민의 주권을 심각하게 유린하고 훼손했다는 점에서 제2의 3·15부정선거에 필적하는 범죄인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3·15부정선거'만이 마치 부정선거의 대명사처럼 지칭되고 있는 것은, 우리사회의 현대사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왜냐면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대통령 역시 3·15부정선거에 못지 않게 부정선거를 자행했고, 이에 대한 시위와 규탄이 잇따르자 동백림 사건과 같은 조작극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정희와 박근혜는 부정선거와 그에 대한 대처 방법 역시 '부전여전(父傳女傳)'인 셈이다.

1967년은 6대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을 물리치고 무난하게 당선된 박정희로선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다. 영구집권을 위한 3선개헌을 하기 위해선 이해 6월 8일에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에서 개헌선을 무조건적으로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6·8총선에 사활을 걸었고, 이 과정에서 3·15부정선거의 차원을 뛰어넘는 부정선거의 신기원을 보여주었다.

6·8선거의 특징은 크게 관권선거, 금권선거, 폭력선거로 요약된다. 먼저 196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 기사부터 살펴보자.

'(전략) 일부지방에선 야당참관인과 운동원들이 폭행 피납되는 폭력사태와 여야에 의해서 감행되는 대리투표 등 불법사태 그리고 목포에서는 사전투표, 보성에서는 공개투표가 진행중이라고 야당이 주장하는 등 불상사가 빚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가 진행되기도 했다. (중략) 전례없이 판을 친 금권, 향응, 선심의 성행, 여당후보에 대한 행정지원, 여당후보의 지역사업 공약 남발, 폭력, 흑색선전 등으로 타락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6·8총선거는 투표 당일 오전 서울 시내에서만도 영등포 갑구, 성동 갑구 등지에서 야당참관인과 운동원들이 폭행, 납치당하는 사태를 빚어내 험악한 분위기를 감돌게 했다.'

이 기사에서 당시 선거 분위기를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사실상 이 부정선거는 대통령인 박정희가 총괄 지휘했다. 선거를 한 달 앞둔 1967년 5월 9일, 국무회의에선 선거법 시행령을 뜯어고쳐 대통령, 국무위원 등의 고위 공직자들이 선거운동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중앙선관위는 처음엔 이 조처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것이라 했지만, 곧 정권의 방침에 순응했다.


이제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그는 장관들을 대동하고 전국을 돌며 당시 여당이던 공화당 후보 지원 유세를 폈다. 그러면서 다리 건설, 도로 건설 따위 각종 선심공약을 내놓았고, 한편으로는 야당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을 유도했다. 대통령이 나서니 덩달아 말단공무원까지 나서 여당 후보 선거지원에 나섰다. 전형적인 관권선거, 행정선거였고, 선심공약은 유권자들의 신성한 주권인 투표권의 도덕성을 훼손하는 행위였다. 특히 박정희의 주된 타깃은 김대중이 출마한 목포였다. 그래서 위의 <동아일보> 기사에서 볼 수 있듯 목포에선 사전투표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이미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1년 전인 1966년 삼성과 유착해 이른바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을 저지른 바 있지만, 이 시기는 한일협정과 베트남 파병을 통해 많은 자금이 국내로 유입되었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선거 자금으로 활용했다. 뒷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는 당시 국가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던 6700억 원을 선거 자금으로 사용한 바 있지만, 사실상 우리나라 금권선거는 6·8선거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 역시 "전례없이 판을 친 금권, 향응, 선심의 성행"이라 적시하고 있는데서 이를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당근이 있으면 채찍도 있어야 하는 법. 박정희 정권은 이 점을 너무나 잘 알았다. 각종 선심공약, 금권선거만으로는 모자라다고 판단했던지 폭력까지 동원했다. 특히 위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 선거 당일 야당참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사태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아무튼 3·15부정선거와는 차원이 다른 부정선거를 저지른 결과, 당시 여당이던 공화당은 130석을 확보해 개헌선인 117석을 무난히 넘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선거를 두고 '6·8망국선거'라 불렀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자 전국 131개 선거구에서 총 266건의 선거 소송이 제기되었고, 선거 다음날부터 당장 공분에 찬 야당과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먼저 야당인 신민당은 장외투쟁을 벌이며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갔다. 이후 6개월 간 국회는 공전상태에 빠졌다. 이어 조금 뒤부터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6월 12일 서울대 법대생 500명은 긴급학생총회를 열고 "(6·8선거)는 전반적, 조직적, 계획적, 지능적 부정선거"라 규정한 뒤 선언문에서 "공무원을 사병화하고 국민을 매수, 사기, 협박, 기만함으로써 이루어진 6·8선거는 금력, 사기, 폭력, 부정, 관권선거로서 빛나는 4·19정신의 모독"이라 적시했다.

사실 이 말을 2012년 12·19부정선거에 대입해보면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사실상 국정원의 18대 대통령 선거 개입과 여론 공작 역시 "전반적, 조직적, 계획적, 지능적 부정선거"였고, "공무원을 사병화하고 국민을 매수, 기만"한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를 필두로 부정선거 항의시위는 서울대 각 단과대와 서울시내 대학가, 그리고 지방 대학 심지어 고등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서울대에선 서울대 민주수호투쟁위원회가 결성된 한편, 고려대에선 3천 명의 학생들이 운집해 부정선거규탄대회를 열었다. 이어 연세대, 건국대, 경희대, 동국대, 한양대, 중앙대, 부산대, 광운공대, 외국어대 등 수많은 학교의 학생들이 1천 명 단위 혹은 수 백명 단위로 가두 시위에 나서는 한편, 농성 및 성토대회를 벌였다.

이어 6월 21일에는 서울시내 5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모여 부정부패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장기 투쟁을 모색했다. 7월 초에는 시위가 지방대로 확산되어 부산대, 원광대, 경북대, 공주사대생들이 성토대회, 단식농성, 시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한편 6월 15일에는 서울시대 고등학교 20여개교 학생 1만여 명 역시 가두시위에 나섰다.(이상 6·8부정선거 규탄투쟁과 관련해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편, <한국민주화운동사>1, 2008 참조) 흡사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고등학생까지 시국선언을 발표하는 오늘의 상황을 방불케 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이해 9월 초까지 이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휴교령과 조기방학으로 대응하는 한편, 마침내 7월 8일 전가의 보도처럼 간첩단 사건, 곧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조작,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당시 서독, 프랑스 정부와 외교분쟁까지 빚어가며 화가 이응로, 음악가 윤이상 및 서독 유학생들을 특수작전으로 국내에 압송해왔고, 민비연까지 얽어넣으며 3차에 걸쳐 사건을 조작해냈다. 그리고 이런 조작극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여론을 잠재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당장 언론들은 부정선거 항의 시위와 함께 동백림 사건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학생들 역시 간첩으로 몰릴까봐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6·8부정선거 규탄투쟁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이러한 태도는 지금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2012년 12·19부정선거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태도와 그 본질에 있어선 동일하다. 박정희가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6.8부정선거를 무마하려 했다면, 박근혜와 새누리당, 국정원은 2차 남북정상회담 회담록의 NLL 관련 내용을 조작해 무마하려 하고 있다. 또 박정희가 서독, 프랑스와의 외교분쟁까지 야기하며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냈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과 국정원은 한국의 외교력과 외교적 위상까지 실추시켜가며 국가기밀인 2차 남북정상회담 회담록을 공개해버렸다. 이것은 정말이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자체 개혁을 주문하였고, 국정원은 또 한 번 노무현 전대통령이 NLL을 포기하려 했다는 둥의 조작극을 일삼으며 자체 개혁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국정원이 한통속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12.19부정선거에 대해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 역사는 박정희-박근혜 두 부녀(父女)에 의해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이 우롱당하고 농락당했다는 오명과 불명예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두 부녀지간이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민주주의라면, 그 민주주의는 사실상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2012년 12.19부정선거 #1967년 6.8부정선거 #박정희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 #동백림 사건과 N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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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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