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 창문은 없고 거울이 많은 이유

[아줌마 구직자의 취업실패기⑤] 백화점 일터, 이게 최선입니까?

등록 2013.07.20 21:36수정 2013.08.06 17:01
0
원고료로 응원
한때 노동전문잡지에서 일했던 나. 지난해 가을 한 백화점 명품매장에서, 그리고 올해 봄 한 대기업의 대리점에서 판매직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다. 이 글은 잠입취재기가 아니다. 한 아줌마 구직자의 취업기일 뿐이다. 또한 두 곳 모두 스스로 그만뒀기에 취업 실패기이기도 하다. 글에 나오는 인명은 모두 가명임을 밝힌다. - 기자 말

a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한 장면. 왼쪽이 재벌3세 백화점 사장 김주원 역의 현빈. ⓒ SBS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백화점 사장은 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분) 같은 줄 알았다. 1주일에 2번 출근해서 직원들이 내놓은 기획안에 "최선입니까?"라고 소리만 치면 할 일 끝나는….

현실은 달랐다. 우리 백화점 점장은 매일 출근했다. 오전 11시경이면 어김없이 백화점을 순회했다. 뒤에 줄줄이 간부들을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다. 직원들이 다같이 앞에 나가 머리 숙여 인사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날은 혼자서 쑥 우리 매장에 들어 와서는 신상품이 어떤 게 들어왔는지, 제품의 원산지가 어디인지를 묻기도 했다. 고객처럼 물어서 나는 가고 나서야 그가 우리 점 사장인줄 알았다. 혜수 언니는 점장이 창고에도 들어와 정리가 잘 돼 있는지 확인할 때도 있다고 알려줬다.

점장은 밥도 직원식당에서 먹었다. 처음 우리와 같은 3천 원짜리 식판밥을 먹고 있는 점장을 보고선 신기해 한참을 쳐다보기도 했다. 이게 다 대중매체 탓이다. 드라마에선 사장, 본부장이 죄다 젊은 재벌 2세에 좋은 차 타고 경양식집에서 칼질만 하는데 실제는 현빈보다 훨씬 나이 많은 중년이 지하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있었으니까…. 얼른 판타지에서 벗어나야 했다.

백화점 교육 때 강사가 정직원들은 한 달에 몇 번 직원식당을 이용하는지를 보고한다고 툴툴댔는데 점장의 경영방침 중 하나인가 보다. 만날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는 점장에 대해 누군가는 "좀생원 같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난 소탈해 보여 좋았다. 물론 만날 같이 먹어야 하는 비서실 직원들은 죽을 맛이겠지만….

백화점의 모든 결론은 '매출액'


좀 일해보니 매장부터 지하 식당까지 백화점 사장이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의 종착지는 '매출 증대'라는 결론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매달 전국 몇 개 점 중에서 몇 등인지, 같은 지역의 다른 백화점들과 비교해서 매출액이 어떻게 되는지가 수치로 나오니 그럴 수밖에.

행사 때가 되면 사무실에서는 근처 백화점이 전단에 명품 가방 세일을 집어넣어 특수를 올렸다고 우리 매장에서도 그렇게 싸게 내놓을 제품이 없는지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본사에서 정하는 정기 세일 외에는 특가로 내놓을 재고가 없다는 답으로 사무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백화점 점장이 창고를 둘러보는 것도 정리가 잘 돼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도 있지만 재고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 그래서 할인행사를 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거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백화점 행사장 매대에 놓인 상품들은 이렇게 각 매장 창고에서 우연히, 혹은 억지로 찾아낸 귀한 분들이다.

세일 기간이면 '매출' 관련 직원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지난 주말 신사복 행사장에서 1억 원어치가 팔렸네, 여성복 쪽은 목표액보다 매출이 적게 나와서 비상이 걸렸네 하는 식의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직원들도 백화점 사장 못지않게 매출을 걱정했다. 휴게실에 있으면 "왜 이렇게 손님이 없지. 애가 탄다, 애가 타"라며 한숨을 쉬는 이들이 많았다. 꼭 매출에 대한 위에서의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동의 결실이 '0000000원'처럼 동그라미 숫자로 평가되는 직업의 숙명이자 직업의식처럼 보였다.

a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한 장면. 좋은 차 타고 경양식집에서 칼질만 하는 김주원 같은 백화점 사장은 그곳에 없었다. ⓒ SBS


그런데 초보 판매원인 내겐 아직 직업의식이 부족해서인지 "이번에 야외 행사장에서 매출이 좀 많이 나왔대"라는 말보다 그 뒷말이 더 귀에 와서 박혔다.

"그런데 세일 첫날부터 사무실에 야외 행사장에 천막을 쳐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안 해준대."

낮에는 아직 볕이 뜨겁고, 해가 지면 찬바람이 불어오는 가을날이었다. 직원들은 낮에는 자외선과 사투를 벌이고 저녁이면 냉기에 점점 움츠러드는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일을 해야 했다. 백화점 세일은 보통 보름 이상씩 이어진다. 직원들의 민원 역시 보름 이상 계속 됐겠지만 처리되지는 않았다. 내가 백화점을 나온 후 올봄에 그곳을 지나갈 때에도 직원들은 바깥에서 꽃샘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정직원들이 아니어서일까. 천막 하나 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몇 개월씩 깜깜무소식인지. 고객들에게만 친절하고, 직원들에겐 한없이 불친절한 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볼멘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백화점 사장이라면 김주원보다 더 인기 많은 사장이 될 텐데, 라는 공상도 해봤다.

백화점에 창문이 없는 이유

백화점에는 고객들에게 보내는 친절 뒤에도 감춰진 것들이 많았다. 백화점이란 곳이 얼마나 '매출'을 위해 꾸며진 곳인지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백화점 건물에는 창문이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하루 종일 밝은 불빛 밑에서 일하다가 퇴근할 때 어둠에 잠긴 거리를 마주칠 때마다 멈춘 시간 속에서 버둥대다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거리가 젖어 있을 때면 '똑 똑 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내 자신이 초라하게까지 느껴졌다. 시계의 초침도, 소나기의 빗줄기도 사라지는 곳이 바로 백화점이었다.

얼마 전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를 읽다가 백화점에 왜 시계와 창문이 없는지를 알아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을 하라는 백화점 측의 따뜻한(?) 배려"란다. 백화점에 유리나 거울이 많고 기둥이나 벽도 잘 비치는 대리석으로 돼 있는 이유도 따로 있었다. 사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어서 걷는 속도가 늦어져 그냥 지나칠 수도 있던 진열대에 무의식적으로 좀 더 관심을 보이게 된다는 거다.

이른바 '쇼핑의 과학'이다. 사람들이 쇼핑을 더 잘할 수 있도록 과학까지 동원하는 판이니 백화점은 얼마나 빈틈없는 곳인가. 정재승은 '자본주의의 심리학 : 상술로 설계된 복잡한 미로 - 백화점' 부분을 이렇게 끝맺는다.

닭들이 배가 터지도록 모이를 쪼개 만드는 양계장의 형광등처럼 창문 없는 백화점의 샹들리에는 영업시간 내내 낮처럼 밝기만 하다.(<정재승의 과학콘서트> 137쪽, 동아시아)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모이를 쪼는 닭들처럼 백화점 샹들리에 아래에서 우리들은 주기적으로 "고객님"을 외쳤다. 그 옆에서 '고객님'은 열심히 쇼핑백에 물건들을 담아갔다. '매출'로 모든 게 판가름 나는 곳이긴 하지만 사랑에 빠진 후 백화점 경영에 진지해진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처럼 좀 더 직원들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백화점 사장을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인지…. 괜히 유선방송에서 재방송하는 <시크릿 가든>을 보다 나는 욱하고 말았다.

(* 다음에 계속.)
#쇼핑의 과학 #백화점 #정재승의 과학콘서트 #판매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