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골에 100년이 넘은 초등학교라니...

[경전선 남도 800리, 삶의 풍경 42] 예사롭지 않은 남평읍③

등록 2013.07.19 12:07수정 2013.07.1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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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비석이 담장 아래 일렬로 쭉 늘어선 남평향교의 들머리가 인상적이다. ⓒ 김종길


하늘 가운데서 중심을 잡은 해는 더 이상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날씨가 원체 더워 터미널로 바로 가서 광주로 나갈까 하다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이나 남아 있어 조금 더 남평을 둘러보기로 했다. 읍내 아무 곳이나 내려주면 된다고 했더니 기사는 신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이 더운 날씨에 남평향교까지 걸어가는 건 무리라고 단호히 말했다. 읍내를 지나 향교를 가면서 기사가 왜 그렇게 강단지게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향교는 읍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아주 외딴 곳에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오늘 같은 날 걸어왔으면 고생 깨나 했겠다 싶다.

일렬로 쭉 늘어선 비석군, 남평향교


향교에 도착해서 이번에는 향교를 둘러보고 걸어가겠다고 하니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따, 오늘 같은 날 걸어가면 쪄 죽는다요. 내가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러다 큰일 나요. 택시비는 여기까지만 받고 읍내 터미널까지는 공짜로 태워 줄 테니 휑하니 퍼뜩 둘러보고 오소."

사실 택시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전선 여행 1년 동안 대부분 도보로 이동했고 택시는 어쩔 수 없을 때만 두세 번 탔을 뿐이었다. 물론 이날 택시비도 1만7천 원으로 여행 중 가장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다리에 의존하자는 나의 여행방식 때문에 저어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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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향교는 1472년에 처음 세워졌고, 1534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 김종길


각종 비석이 담장 아래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남평향교(전남유형문화재 제126호)는 예부터 이 고을이 유서 깊은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외삼문이 굳게 닫혀 있어 이리저리 살펴 겨우 한쪽 구석에 난 쪽문으로 향교마당에 들어섰다. 1472년(세종 9)에 향교가 처음 창건되었다 하니 그 역사가 매우 깊다.

처음에는 지금의 동사리인 남평현 동문 밖에 있었다가 1534년(중종 29)에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경사지에 지어져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명륜당, 동서재, 대성전 등 소략한 규모였다. 다만 내삼문 옆 400년 된 은행나무가 오랜 연륜을 말해주듯 거대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남평초등학교

"저 학교가 100년이 넘은 학교요. 남평에서 태어나서 이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태어난 해하고 졸업한 해의 숫자가 딱 맞아떨어지지요."

향교로 가면서 기사가 한 말이 언뜻 생각이 나 기사에게 읍내 입구 사거리에서 택시를 세워달라고 했다. 도로 너머로 보이는 오래된 고목도 그러하거니와 교정 한쪽의 각종 비석들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택시기사는 '참, 이 사람 고집 어지간히 세구만. 터미널까지 공짜로 태워 준데도…' 하고 여겼겠지만 이곳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기사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한 후 초등학교를 향해 아스팔트길을 타박타박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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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초등학교는 1906년에 설립되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 김종길


2층으로 된 남평초등학교는 초록색으로 잔디를 깐 운동장과 그 주위를 둘러싼 붉은 트랙 주위로 잘 꾸며진 화단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학교의 역사와 함께했을 오래된 나무와 교문 옆에 무리지어 있는 비석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중 느티나무 두 그루와 팽나무 두 그루는 수령이 300년이 넘어 나주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나무에는 친절하게도 각자의 이름이 적힌 돌 명패가 놓여 있었다. 어느 곳 하나 허투루 소홀히 여기지 않을 정도로 교정은 잘 가꾸어지고 관리되고 있었다. 예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교실로 가다 현관 옆에서 우연히 석등과 마주치게 되었다. 학교 안에 무슨 석등이 있나 싶어 살폈더니 '동사리 석등'이었다. 아까 남평역에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면서 나주시 지도를 보았을 때 남평읍내에 동사리 석등이 있어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곳 초등학교 안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다. 이 기막힌 우연에 석등을 보는 기쁨은 두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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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에는 300년이 넘은 보호수가 네 그루나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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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초등학교 안에 있는 동사리석등(전남문화재자료 제95호) ⓒ 김종길


동사리석등(전남문화재자료 제95호)은 우리가 흔히 봐온 석등과는 그 생김새부터 달랐다. 정교하지는 않은 편인데, 소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으로 보인다. 8각의 석등으로, 등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4개의 작은 기둥을 모서리에 세웠다. 화사석 아래로는 아래받침돌, 8각 기둥, 위받침돌 등 3단의 받침을 두었으나 일부가 땅에 묻혀 있고 위로는 여덟 모서리의 지붕돌과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운동장 중앙 연단 옆으로 길쭉한 화강암에 새긴 '개교백주년기념비(1906~)'가 우뚝 솟아 있었다. 비를 세운 해가 2006년이니 지금은 100년 하고도 7년이나 지났다. 이런 한적한 시골의 초등학교가 100년을 넘겼다니…. 새삼 그 역사가 웅혼하고 대견스럽게 여겨졌다.

공군참모총장, 대한민국대법관, 국회의원 등이 모교를 빛낸 사람으로 적혀 있지만 눈길은 자꾸 아래로 간다. '스승과 제자' 동상도 생경하여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나의 꿈 제100회 졸업생 45명 만남의 날 2033. 2. 15'이라고 적힌 작은 비석이 눈에 띈다. 졸업한 날로부터 20년 뒤에 동기들과 다시 만나자는 내용으로 졸업생 횟수대로 각자 약속의 비석들을 세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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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세운 남평초등학교 개교백주년기념비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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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초등학교 안에 있는 남평공공도서관과 각종 비석들, 이곳은 예전 남평현 동헌 터였다. ⓒ 김종길


담을 없앤 학교 안에는 남평공공도서관 건물이 있는데 그 앞으로 각종 비석과 석조물들이 있었다. 그중 남평현 동헌유적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옛 동헌 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 1928년 광주고보 재학시절에 동맹휴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투쟁을 한 이산 윤승현 선생의 비도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평초등학교는 1906년 6월 15일 사립영흥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11년 6월 15일 남평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아직도 37명의 교사에 280여 명의 학생이 있으니 시골학교치고는 제법 옹골찬 학교다. 2013년까지 졸업생 1만 2000여 명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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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읍내의 법수골은 풍년제를 지내고 고싸움을 벌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 김종길


남평오일장, 광주 가는 버스로 갈아타다

읍내는 제법 번잡했다. 강한 햇빛을 피하여 서쪽 건물 아래 인도를 걸었다. 이제 터미널로 가서 나주 가는 버스를 타고 광주송정으로 가야 한다. 이따금 오랜 풍경이 보이는 읍내 거리의 중간쯤, 도로를 가로지르는 잘 정비된 작은 개울 하나가 보였다.

마을에서 한다리목이라 불리는 법수골이었다. 옛날 이곳에는 남녀 목장승이 양쪽에 있었고 큰 석상과 돌로 만든 제단이 있어 해마다 풍년제를 지내기도 했단다. 큰다리목(한다리목)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으로 나눠 고싸움을 벌이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인데, 지금은 오백년 넘은 당산나무 두 그루조차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에 여간 허망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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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과 6일에 열리는 남평오일장은 이미 파장이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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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앞 버스정류장에는 마늘을 산처럼 쌓아 두고 상인과 손님이 흥정을 하고 있었다. ⓒ 김종길


남평시장에 들렀을 때는 이미 파장이었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남평오일장은 예전엔 1년에 5000두 이상의 소가 거래되었을 정도로 큰 우시장이 섰었고, 하루에 3000가마니 정도가 거래될 정도로 싸전이 유명했다고 하나 지금은 겨우 명맥만 이어져 옛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터미널 가는 길을 물었다. 농협 앞 버스정류장에는 갓 뽑아낸 마늘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번에도 버스는 노란색이었다. 나주터미널에서 광주송정역 가는 160번 버스로 갈아탔다. 요금은 1650원이었다. 1년간의 기나긴 경전선 여행도 이제 마지막 역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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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터미널에서 160번 버스를 타고 경전선 마지막 여행지 광주송정역으로 갔다. ⓒ 김종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과 코레일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남평향교 #남평초등학교 #남평오일장 #동사리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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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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