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아빠 대단해요!" 소리에 으쓱했는데...

[기사 공모-있다 없으니까] 어느덧 사라진 열정 때문에 섭섭하다

등록 2013.07.20 17:05수정 2013.07.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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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과정의 사이버 대학인 전태일 노동대학에 입학한 건 내 나이가 지천명을 맞던 5년 전 2008년이다. 만날 PC를 통한 온라인으로 공부를 하다가 처음으로 오프라인 수업을 한다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와 똑같이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는 동기생들의 면면은 과연 어떠할까?' 이윽고 도착한 오프라인 수업장은 대전시 대덕구 대화동 소재 대전광역시 근로자 종합복지회관 내의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에서 내준 회의실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십여 명의 학생들은 30~40대가 주를 이뤘는데 강의를 맡은 교수님 역시도 나보다 연하로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부를 한다는 건 역시나 즐거운 일이었다. 50분의 첫 강의가 끝난 뒤 쉬는 시간에 수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명함을 주고받는 게 아니다 보니 "000입니다~"는 정도로 그 사람의 이름을 금세 기억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하여 강의가 끝날 무렵 '수작'을 부렸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고 또한 앞으로 한 달에 두 번은 이처럼 오프라인 강의를 한다고 하니 우리 강의가 있는 날은 1만 원씩을 추렴하여 정례적으로 소주라도 한잔씩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모두들 대환영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임시로 총무를 선임하고 1만 원씩을 거둬 근방의 고깃집으로 갔다. 거기서 술잔이 분주히 돌자 비로소 화기애애하면서 '사람 사는 맛'도 났다. 우린 그렇게 만나 공부를 했고 1학년 때는 충북 영동에 있는 마음수련원에서 '전태일 노동대학 합동교육'을 2박 3일간 받았다.


그처럼 1~3학년은 물론이요 졸업생들도 다수 참여하여 같이 공부하는 날의 마지막 날 밤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교수부장님이 손수 담그신 과일주와 기타의 술들이 소주, 맥주와 함께 식탁에 올라 우리 주당들의 간택을 간절히 원하는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신 술이 어찌나 과했던지 한 번은 아침이 되었음에도 술이 안 깨서 황간역까지 어찌 갔으며, 아울러 대전역에선 어떻게 하차했는지 역시도 기억에 없을 정도다. 하여간 그렇게 공부를 하던 시기에 S문학에서 신인작가공모전이 있어 응모 원고를 보냈다.

한데 그 작품이 덜컥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는 계기와 조우하게 되었다. 사이버 대학 동기들의 축하가 쏟아졌다. "와~ 이젠 작가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3학년이 되어 다시금 '전태일 노동대학 합동교육'을 받던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술을 나누는데 동기생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이제 우리도 올 겨울이면 대망의 졸업이군요. 그래서 말인데 저는 솔직히 홍 선생님이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탈락할 줄 알았습니다. 근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에서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생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일단 뭔가를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보는 스타일이란 것을. 지금은 학급 당 학생 수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 내가 국민(초등)학교에 다닐 적만 하더라도 학급 당 인원은 얼추 60명까지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 지난 삶의 풍파가 전태일 열사만큼이나 불운하고 박복했던 까닭에 중학교라곤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 했다. 그러나 50~60명이나 되는 국민학교에 다녔던 즈음엔 1~4학년 때까지는 반에서 부동의 1등을 질주했다.

이후 4학년 2학기에 한 여학생이 전학을 왔는데 그 친구는 곧바로 1등으로 올라섰고 나는 2등으로 내려앉았다. 사족이겠지만 그 친구는 이후 서울대까지 진학한 반면, 나는 소년가장이 되어 천안역 앞에서 구두를 닦는 것으로부터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내가 입학할 당시엔 '사이버 노동대학'이었으나 이후 '전태일 노동대학'으로 교명이 바뀌었는데 아무튼 따라서 <전태일 평전>을 안 읽을 수 없었다.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나보다 11년이 연상인 '선배님'이다.

또한 그는 초등학교조차 졸업을 못 하고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지난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사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지독한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아니한 인간승리의 기념비적 인물이라 부른다.

하지만 지금 '그가 꿈꿨던 세상은 과연 왔는가?' 라는 의문은 여전히 우뚝하다. 이른바 우월적 지위인 갑의 나약한 처지의 을에 대한 횡포는 여전하고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 또한 불변의 현상이다. 소위 가졌다는 자들은 외국에까지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탈세하고 그 자식들은 군대조차 안 보내려 혈안이 돼 있다.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면 자동으로 미국 국적을 취득한다는 걸 악용하여 제 딸은 물론이요 며느리까지도 미국으로 보내 출산하게 하는 작태는 이제 고전에 속할 정도다. 여하튼 그렇게 내게 있어 새로운 지식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더불어 참 좋은 동기생과 선후배님들까지를 선물한 전태일 노동대학의 3년 공부를 잘 마치고 졸업한 게 지난 2010년 12월이다.

그때 나는 졸업장 외에도 별도의 성적우수상을 수상하여 기쁨이 두 배로 컸는데 더욱 고무되었던 건 아이들의 칭찬이었다.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딸과, 직장인인 아들 역시도 이구동성으로 "울 아빠는 대단하세요!"라며 치켜세워줄 때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내포신도시로 이사를 하여 빈 구 충남도청 청사에 최근 대전시가 주최하여 시민대학을 만들었다. 각종의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으로 잘 짜여졌다는 이 대학에 반드시 입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예 내 발목을 잡은 건 바로 현재의 경비원이란 내 직업이었다.

오늘이 토요일임에도 출근(주간근무)하였듯 일요일인 내일은 또 야근이다. 따라서 시민대학에 입학하면 강의를 밥 먹듯 빼먹을 게 뻔한 이치였기에 그야말로 눈물을 머금고 포기한 것이었다. 사람이 돈은 없으되 신용만큼은 잃어선 안 되지 않겠는가?

혹자는 묻는다. "고작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 하였다면서 어떻게 사이버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느냐?"고.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면서도 그러나 명료하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그야말로 방대한 양의 책을 읽어 내 두뇌에 입력시킨 내공을 자랑할 수 있노라고.

그렇지만 요즘의 나는 그동안 있었던 것이 사라져, 예컨대 '있다 없으니까' 서운하다! 그 정체는 바로 열정이다. 사는 게 뭔지 시민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게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입학했더라면 필시 전태일 노동대학 공부 당시처럼 내 본연의 열정을 활활 불사를 수 있었으련만.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 공모 '있다 없으니까' 기사 응모작입니다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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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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