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긋한 커피 한 잔에 농민 비극 녹아 있다

[서평]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의 역사 에세이>

등록 2013.07.24 10:02수정 2013.07.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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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우리는 역사가 '증발'해버린 충격 앞에 넋을 잃고 있다. 과연 누가 2007년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증발시켰을까? 철저한 수사를 통해 반드시 찾아내 단죄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와 역사 그리고 후손 앞에 부끄럽지 않는 시민과 선조가 될 것이다.

'기록은 역사입니다'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써 영웅이 됐고, 원균은 일기를 쓰지 않아 역적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기에 노무현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 때문에 수구세력에게 '나라를 김정일에게 갖다 바쳤다'는 모독을 당했다. 노무현이 살아있다면 누군가에 의해 증발해버린 회의록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의 흔적은 그냥 흘러가버리는 거 아냐"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선조는 가장 어리석은 선조가 될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가라고 할지라도, 기록이 없다면 몇 백 년 전 일어난 사건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 역사란 정치가와 권력자들이 기록을 통해 남긴 것만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나 자신이 역사이며, 이웃이 남긴 흔적도 역사가 된다.

<대항해 시대>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히스토리아> 따위를 쓰고, <제국의 몰락>을 옮겨 역사학자로 잘 알려진 주경철 서울대 서양학과 교수가 신문 지면에 실었던 글을 모아 묶어낸 <히스토리아 노바>(산처럼)은  "동서양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문명과 문화, 사람, 전쟁, 사회, 정치 등에서 다양한 주제들을 뽑아내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식을 되짚어볼 수 있는 색다른 관점과 사실들을 제시"하는 86편의 역사에세이다. 특히 120여 컷의 컬러 도판은 인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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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노바> ⓒ 산처럼

주경철은 "시대가 묻고 역사가 답한다"면서 "그 질문과 응답을 매개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일 터이다, 지난 과거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인간의 삶을 직접 살펴보고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마당이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가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문자를 맨 처음 만든 이들은 돌판과 벽화를 통해서다. 종이를 발견한 인류는 위대한 문헌을 후손에게 남겼다.


주경철은 "삶의 흔적은 그냥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고 질문을 던져 다시 불러내면 생명을 얻어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이 문장 속에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루 하루 삶 자체가 역사가 되고, 그 역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서로 소통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은 흔적을 지워버리는 이들이 많다. 그릇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다. 삶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소통을 거부한다. 이는 생명이 아닌 셈이다. 그는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가란 인간의 살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식인귀와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면서 "역사가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일에 말을 걸고 캐묻는다"고 했다.

향긋한 커피 한 잔, 제3세계 농민 비극 녹아 있어

그럼 주경철이 찾아간 곳은 어딜까.

요즘 커피가 유행이다. 얼마나 이름이 다양한지 헷갈린다. 솔직히 말하면 내 입맛에 맞는 커피는 대한민국 특산품인 '믹스커피'다. 그런데 다양한 커피를 마시면서도 언제부터 마시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 <에티오피아의 염소치기 칼디와 춤추는 염소들>이란 책을 보면 염소가 어떤 열매를 따 먹으면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본 칼디가 수도원장에게 알려주었고, 수도원장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불속에 던져버렸는 데 아주 향긋한 냄새가 났다. 수도원장을 이를 물에 타 먹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원장은 밤에 기도하는 수도사들에게 이 열매를 끓여 먹였더니 기도시간에 졸지 않았다고 한다. 수도사들이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셈이다. 물론 이는 이야기 일뿐이다. 주경철이 전달하고 싶은 것은 바로 향긋한 커피향기 뒤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다.

"최근 원두 가격이 많이 회복됐다고 해도 커피 재배 지역의 많은 주민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거쳐 오늘날 세계인의 음료가 된 그 향긋한 커피 한 잔에는 제3세계 가난한 농민들의 비극이 녹아 있다."(18쪽)

'다이아몬드' 가장 값비싼 보석 중 하나다. 커피만 아니라 다이아몬드 역시 인간의 탐욕이 오롯이 숨어 있다. 남아프리카 킴벌리 다이아몬드 광산은 "1871년부터 1914년까지 5만명이 광부들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서 2,722킬로그램 다이아몬드를 캤다." 어마마하다. 삽과 곡갱이로 "지름 463미터와 깊이 200미터가 넘는 빅홀이라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이는 인간의 탐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곡괭이와 삽으로 그 넓이와 깊이를 판 이는 강자와 부자와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다이아몬드는 사람 생명을 빼앗는다. 다이아몬드는 처음 사악한 힘을 막아주는 호신용이었지만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흔히 분쟁 국가에서 많이 생산되어 전쟁 자금으로 쓰이곤 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분쟁 다이아몬드'다. 유엔은 이것을 '합법적이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정부들에 반대하는 세력들이나 파벌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생산되고, 또한 이들 정부들에 맞선 군사 행동에 자금줄 역할을 하는 다이아몬드'라고 정의한다."(21쪽)

대동강문명, 세계5대문명권이라고?

<히스토리아 노바>는 또 "이집트 문명이 모든 텍스트를 정전(正典)으로 만든 다음 이에 대해 한 치의 변화도 허락지 않아 영원히 신비 속에 굳어져 버린 것을 되돌아보고, 국왕의 사체(死體)를 미라로 만들어 국왕의 신성함을 통치 수단으로 삼는 퇴행적 정치 행태"를 보여준다.

우리 눈길을 끄는 대목은 북한이 주장하는 '대동강문명권'이다. 북한 학자들은 대동강변에 발견한 단군릉 세계 5대 고대 문명권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1990년대 초 대동강 일대에서 단군릉을 발견했을 때 약 5천년 전 부부 유골을 발굴한 곳이 단군릉이라고 주장했다.  1994년 단군릉을 재건하면서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면서 대동강 문명권을 이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럼 과연 대동강 문명권은 세계5대문명에 들어갈 수 있을까?

주경철은 "고대 대동강 유역에 선진 문화가 발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게 '세계5대문명'중 하나로 여기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그럼 북한은 대동강문명권을 왜 세계5대문명이라고 주장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고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권력 승계 문제가 불거진 위기 상황에서 나온 이 학설은 정권의 정통성 확보에 역사학이 무리하게 협조한 결과로 보인다."(33쪽)

그런데 북한 역사학자들만 그럴까?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려는 학자들이 대한민국에도 많다. 김일성 왕조 정통성을 위해 단군릉과 대동강문명을 세계5대문명이라고 주장하는 북한 학자들이나, 이승만를 국부로, 박정희를 '영도자'로 추앙하는 이들이나 거기서 거기다.

금지곡은 "국민의 정서를 통제하려던 독재"

<히스토리아 노바>는 "국민의 정서를 통제하려던 독재시대의 노래들"인 송창식의 <왜 불러>, 한대수의 <물 좀 주소>,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따위를 소개하면서 금지곡을 만든 독재권력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독재체제가 음악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음악이 다른 어느 예술보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직접적으로 가 닿기 때문일 것"이라며 "음악은 사회 통합을 강화하는 접착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독재는 "대중을 통제하고 세뇌하는 데에 음악보다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리하여 "체제를 정당화하는 음악은 장려했고 반대로 질서와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음악은 무자비하게 탄압했다"고 지적했다. 경제성장 기적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주경철은 따금한 충고를 잊지 않는다.

"1960-70년대에 대해 우리는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고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도약의 시대로만 기억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에 지극히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측면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간의 마법은 지난 시절을 미화하여 간직하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는 기억들이 수두록하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오늘 여기에 도달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서민의 노래는 다른 어느 문서 자료보다 많은 것을 증언한다."(110쪽)

서민 정서까지 통제했던 정권이 박정희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 추종자들이 '애국'이란 이름을 활개를 치고 있다. 정말 궁금한 것은 과연 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표현했던 '병영국가'였던 박정희 독재정권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나는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거부한다.

보복과 응징...또 다른 전쟁 빌미

또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붙잡혀 사형당한 위대한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와 냉혹한 사업가 에디슨에 가려진 진짜 백열전구를 발명한 조지프 스완"을 돌아보고, "벵골의 대기근 참상을 목도하고 아사자가 발생한 것은 농업 문제라기보다는 부의 배분 및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관련된 정치 문제라는 것을 밝힌 1998년에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는 그라민 은행의 설립자 무함마드 유누스"를 만날 수 있다.

이어 우리가 주목할 점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방안을 살펴보며 "복수와 응징이 평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보복과 응징은 또 다른 보복과 응징을 낳을 뿐이다. 우리를 공격하면 열 배, 백 배 보복 타격을 할 것이라는 주장은 평화와 생명을 모르는 어리석은 일이다.

"대개 가혹한 전후 처리 방안이 다음 전쟁의 빌미가 됐다는 점을 놓고 보면 결과적으로는 온건한 방안이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227쪽)

갑자기 'NLL 포기'논란이 생각난다. 평화통일을 지향해야 할 대한민국 대통령이 "피로 지켜왔다"고 했다. 피가 아닌 평화로 NLL을 지키기 바랐던 대통령을 나라를 판 이적행위자로 매도한다. 하지만 아는가? 보복과 응징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음을. 피와 보복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은 평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의 역사 에세이 > 주경철 지음 | 산처럼 펴냄 18000원

히스토리아 노바 - 주경철의 역사 에세이

주경철 지음,
산처럼, 2013


#역사 이야기 #주경철 #커피와 다이아몬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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