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조선왕조의 슬픔 간직한 명온공주의 무덤

[망우리 공원 답사 2] 한용운, 방정환의 묘소가 있는 망우리공원묘지

등록 2013.07.28 19:15수정 2013.07.28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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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에서 조봉암 선생의 묘역을 둘러 본 우리들은 바로 옆에 있는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묘역으로 갔다. 성북동의 심우장을 자주 찾는 나는 한용운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그의 시 '님의 침묵(沈默)'은 정말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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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한용운 묘소의 안내석 ⓒ 김수종


스님·독립운동가·시인이었던 만해는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5년 백담사에 가서 연곡스님을 스승으로 승려가 된다.


이후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8년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평생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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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만해 한용운 부부의 묘소 ⓒ 김수종


만해의 무덤에서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부인의 무덤과 나란히 있는 이곳에서 나는 현실의 불교와 만해가 그린 불교에 대한 생각을 잠시 했다. 오늘 다시 만해가 이 땅에 돌아오면 요즘의 불교를 보며 그는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다.

이어 그의 산소 조금 아래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3·1운동 때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박희도(朴熙道)의 무덤으로 갔다.

그는 만해와는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인물이지만, 산소는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운동을 했지만, 나중에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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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박희도의 묘소 ⓒ 김수종


1889년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28년에는 중앙보육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어사전편찬회'에 참여하였다. 1934년 천도교 신파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결성한 시중회에 가담하면서 친일파로 변절했다.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하여 일제의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시국강연 강사로 활동했다.

친일성향의 잡지인 <동양지광>을 창간하여 주간을 맡았으며 일본의 내선일체 정책을 홍보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8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2년 사망했다.

만해와 너무 무덤이 가까워 밤마다 싸우고 지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어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이었던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산소다. 개화에 앞장선 근대 최고의 서화가인 그는 신문기자를 거쳐 우정국 통신원국장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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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오세창의 묘소 ⓒ 김수종


이후 만세보사, 대한민보사 사장을 지냈고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 매일신보사 명예사장, 민주당 국회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 문화재 수호의 선구자를 만난 기쁨은 무척 좋았다.

이어 '조선의 마음'을 일깨운 역사가·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文一平) 선생의 산소다. 선생은 식민지 시대에 사라져가는 조선의 역사와 마음을 일구었던 선구자였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집필하였다.

평안도 의주 출신으로 1907년 일본 메이지학원에서 홍명희·이광수와 함께 공부했다. 1911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2년만 다니고 공부를 중단하고 생각을 바꾸어, 1912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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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문일평의 묘소 ⓒ 김수종


상해에서 <대공화보>에서 일어번역과 논설을 맡아 썼다. 이후 귀국하여 문필가로서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며, 시, 역사논설, 역사이야기, 수필 등을 집필하여 여러 신문이나 문학지에 게재하였다. 주로 역사 소재를 갖는 역사소설, 역사 이야기, 역사 수필 등이 주류를 이루며, 신문에 중장기 회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1933년부터 사망 시까지, 조선일보의 편집 고문직을 맡으면서 언론을 통한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기울였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찾아 널리 보급하려고 평생 노력했다. 그의 역사 연구는 역사학자적 연구인 역사 사실의 기초적 연구보다는 우리 역사 가운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사실을 발굴하고, 그 의미를 강조하고 이해시키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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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벽초 홍명희 선생이 쓴 문일평 묘소의 묘비석 ⓒ 김수종


조선일보 출신이지만 공정한 글쓰기로 좌우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칼럼과 글은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고 이규태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묘비는 어린 시절 일본 유학을 같이 했던 친구인 벽초 홍명희(洪命熹)이 쓴 것이다. 조선 3대 천재 중에 한 사람인 벽초는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쓴 작가이다.

이어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方定煥)선생의 묘소다. 소파는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 등의 창간을 주도했다. 창작뿐 아니라 번역·번안 동화와 수필과 평론을 통해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을 했다.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다가 곧 사직하였다. 이후 천도교청년회, 개벽사, 천도교 소년회 등과 관련을 맺었다. 1917년 손병희의 3녀 용희와 결혼하여 손병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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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어린이들의 싼타 방정환의 묘소. 돌무덤이다 ⓒ 김수종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에 입학했다. 1920년 일본 동양대학에서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또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으며, 어린이 동화집도 냈다.

한국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최초의 아동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그 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다. 또한 <신청년> <신여성> <학생> 등의 잡지를 편집·발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는 대부분의 집회를 불허했지만, 정치색이 없는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는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우리 조선인들은 어린이날을 통하여 하나로 뭉쳐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소파 방정환 그는 동화 속으로 떠나간 아이들의 산타였다. 아울러 그의 묘소 바로 아래에는 그의 후배 최신복(영주,崔泳柱)가족 3대가 함께 묻혀있다. 평생 소파를 존경하고 흠모한 최신복 가족은 무덤까지 소파의 곁에 쓴다.

아동문학가인 최신복은 고향 화성에서 소년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학생> 등의 잡지 편집에 종사하면서 세계명작을 번안하여 연재했다. <중앙> 등에서 뛰어난 편집자로 이름을 떨쳤다. 1936년 망우리의 소파묘비 건립에 앞장섰다. 윤석중과 함께 색동회 동인이었다.

소파도 대단하지만, 그를 존경하여 3대가 나란히 소파 곁에 무덤을 쓴 최신복 선생의 삼대로 참 놀라운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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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명온공주의 묘비석 , 방치된 흔적이 역력하다 ⓒ 김수종


이어 순조임금의 장녀인 명온공주(明溫公主) 부부의 산소다. 너무 초라하다. 외가의 일족인 안동 김씨 김한순의 아들인 김현근(金賢根)가 14살에 결혼한 명온공주는 1830년 5월 친오빠인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1832년 5월 동생인 복온공주가 15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한 달 후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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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온공주의 무덤 망우리공원 ⓒ 김수종


한편 명온공주의 남편인 김현근은 고종 때인 1868년(고종 5년) 음력 8월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원래 산소는 돈암동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이장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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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명온공주의 묘비석. 무덤은 초라하다 ⓒ 김수종


수풀에 덮힌 무덤을 보면서 몰락한 조선 왕조의 상징을 보는 듯했다. 좁은 터에 자리 잡은 합장묘에 상석 위 낙서는 참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 마음 아픈 몰락한 조선왕조여.

이어 1934년 조선인 최초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한 오긍선(吳兢善) 선생의 가족 묘지다. 오긍선은 1901년 배재학당을 마치자 미국으로 가서 켄터키주 센트럴 대학에서 물리 ·화학을 전공, 1909년 루이스빌 의과대학 졸업과 동시에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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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의사였던 오긍선의 묘지 안내석 ⓒ 김수종


19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1921년 부교장, 1934년 교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8 ·15광복 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 1952년 한국사회사업연합회 회장으로서 사회사업 분야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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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오긍선의 무덤, 지붕이 있는 듯이 특이하다 ⓒ 김수종


서양식 교육을 받은 의사집안이라 그런지 무덤들은 모두 비석과 함께 돌로 지붕을 만든 형상으로 만들어 후손들을 편하게 해준 발상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오긍선의 묘 아래쪽에는 그를 존경한 그의 후계자 이영준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덧붙이는 글 2013년 7월 27일 한국내셔널트러스트와 함께 망우리공원에 가다
#망우리공원 #한용운 #방정환 #명온공주 #오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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