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대한민국 헌법에만 '민주공화국'이 들어 있을까

[서평] 헌법 제1조 성립의 역사를 추적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등록 2013.08.10 14:39수정 2013.08.10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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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은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조 조문이다.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처럼 헌법 조문에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 우리 제헌헌법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 제1조도 "독일은 공화국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되어 있다. 전 세계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 헌법 제1조에 자국의 정치적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명기해 놓은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 책은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가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성립하게 되었는지를 분석, 정리한 것이다. 헌법 제1조의 탄생 과정과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보면 되겠다. 우리나라의 헌법 제1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10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저자가 헌법 제1조의 탄생을 살피기 위해 거슬러 올라간 최초 시점은 1840년대다. 1842년, 중국과 영국 사이의 아편 전쟁을 충격 속에서 목도한 중국 학자 위원(魏源)은 전쟁이 끝난 뒤 서양을 좀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해국도지>라는 책을 집필한다. <해국도지>는 세계 각국의 현황을 지세(地勢), 산업, 인구, 정치, 종교 등 다방면에 걸쳐 서술하고 있는데, 이 책의 '대서양구라파주(大西洋歐羅巴洲)'에는 서유럽 각국의 정치체제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국도지>는 발간 직후에 조선으로 들어와 당대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최한기(1803~1877)를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소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최한기는 영국 의회의 상하원의 조직과 기능, 국왕과 의회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이해도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책 <지구전요(地球典要)>(1857)에서 미국의 최고 권력자인 '프레지던트(대통령)'를 '대총령(大總領)'으로 부르면서 미국 대통령제를 자세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1880년대 이후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서양의 정치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고민한다. 저자는 이 시기 지식인들이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고 관료의 권한을 확대하는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제한군주제'와, 민(民)이 정치에 참여하는 입헌군주제 등을 도입하려고 했음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 증명한다.

이 책에서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공화제'에 대한 관심이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저자는 이 시기에 군주제 · 귀족제 · 민주제의 3정체(政體)를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 공화정 · 민주정 · 전제정의 3정체설을 주장한 몽테스키외의 견해가 두루 소개되면서 한국 지식인들 가운데 민주공화제를 선호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민주공화제'가 법조문에 최초로 명문화한 것은 1919년 4월이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이 선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임시헌장)을 통해서였다. 그 임시헌장의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 저자는, 당시 중국 헌법이나 독일 바이마르 헌법에 '공화제'라는 표현은 있었지만 '민주공화제'라는 표현은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국가' 표방이 상당히 과감하고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사람들은 어떤 배경 속에서 '민주공화제'라는 '과감하고 진보적인' 말을 그렇게 쉽게 쓸 수 있었을까.


대한제국기(1897~1910)에 이미 공화제에는 '귀족공화제'와 '민주공화제'가 있다는 몽테스키외의 학설이 소개되고 있었고, 미국의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공화제'에 해당한다고 소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민주공화제'라는 표현에 비교적 익숙해 있었고, 또 장차 독립된 나라를 세울 때에는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민주공화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363쪽)

이쯤에서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살펴보자.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민주공화국'은 또 다른 정치 체제로서의 '군주국'이나 '귀족공화국', '인민공화국' 등과 구별하기 위해 쓰인 개념이었다. 가령 저자는 1919년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있는 '민주공화국'이 '귀족공화국'과 구별하기 위해 쓰인 용어라면, 1948년 제헌헌법의 '민주공화국'은 '인민공화국'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었다. 저자는 헌법 기초에 참여한 유진오(1906~1987)의 회고를 빌려, '민주공화국'을 국체(國體)로서의 공화국과 정체(政體)로서의 민주국이라는 개념이 합쳐진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유진오 식의 구별법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정체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맞다. 그런데 이 둘은 어떻게 다를까.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등의 다양한 세부 형태를 갖는다. 저자는 이중에서 우리 헌법의 기본 정신으로 거론되는 자유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는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부족, 지주나 자본가 등 부유층에 의한 금권정치(金權政治, plutocracy)의 가능성, 다수결 제도로 인한 소수자의 발언권 약화 등의 한계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제헌의원들은 자유민주주의가 갖는 이런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무한정 용인하지 않았다. 제헌헌법의 경제 관련 조항들은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며, 국가나 공공단체의 경제 개입을 강조하고 있었다. 또 제헌헌법은 힘 있는 자, 부유한 자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여러 조항을 두고 있으며, 공공부문에서의 사회적 소유(공유)를 적시했다. (중략) 따라서 제헌헌법은 고전적인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채택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헌헌법에 나타난 기본정신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유민주주의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55쪽)

그래서 저자는 제헌헌법이 정치적 측면에서는 자유민주주의적 요소를,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민주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결론을 맺는다. 나아가 제헌헌법은 이들 양자의 대립적인 측면을 공화주의로써 조화시키고자 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제헌헌법의 기본 정신을 '공화주의'로 정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난 2011년은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고풍스러운(?) 정치 용어가 정국의 최대 화두가 되었던 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초·중·고교 한국사 교과서에 기존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쓰도록 교과서 집필 기준을 수정해 발표했다.

곧 뜨거운 논쟁과 논란이 뒤따랐다. 교과서 집필 기준을 만들기 위해 꾸려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 위원회의 민간 위원 8명은 교과부의 일방적인 수정에 항의하여 집단 사퇴를 했다. 교육기관에 대한 국회교육과학기술위원회의 국정감사도 파행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간 '자유민주주의'를 힘주어 외쳐왔던 보수적인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과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수구 언론은 하나로 똘똘 뭉쳐 이명박 정부를 응원했다. 그 단단한 대오로 반대 의견은 철저하게 막아냈다. 결국 '민주주의'가 빠지고 '자유민주주의'가 교과서 집필 기준 용어로 결정되었다. '아들'인 '자유민주주의'가 '아버지'인 '민주주의'를 집안에서 몰아낸 언어적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정작 극악한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들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다. 그들의 속 보이는 의도가 정부 개입이 거의 없는 자유로운 시장 경제 실현에 있긴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이들이 앞으로 교과서 집필기준을 뛰어넘어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에까지 검은 손길을 뻗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세계에 유례 없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마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로 바꾼 후 '완벽하고 이상적인' 시장 경제 체제를 만들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한민국을 질주하면 어떻게 될까.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 활동은 애써 무시하고 대화록 실종만을 '국기 실종'으로 규정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을 어떻게 이해할까. 동네 양아치만도 못한 온갖 파렴치한 책동으로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를 방해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헌법 제1조 조문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을까.

'광장 정치'를 하고 있는 민주당에게 진심으로 권한다. 이 책을 단체로 구입해 박근혜 대통령과 국무위원,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한 권씩 전해 주면 어떨까. 그들 중 몇몇은 분명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우게 되지 않을까. 어린 학생들마저 "민주주의를 살려내라"며 거리에 나서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지금 정말 많이 아프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3. 7. 12 | 408쪽 | 1만 8천 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헌법 제1조 성립의 역사

박찬승 지음,
돌베개, 2013


#민주공화국 #헌법 제1조 #공화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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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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