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에게 밥상 받아먹은 새색시, 접니다

[공모-가족인터뷰] 아름답게 살아온 남자 시아버지 강호병씨

등록 2013.08.25 20:42수정 2013.08.26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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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아버지 어머니 2008년 여름날. 큰애가 열 살 되었을 때야 뒤늦게 둘째를 가진 나한테 아버지는 "사촌도 좋제만, 지 형제간이 제일이다. 잘 했다." 라고 말씀하셨다. ⓒ 배지영


강호병씨. 그는 1933년에 장손으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친엄마를 잃어서 얼굴조차 모른다. 두 명의 새엄마는 각각 세 명·다섯 명의 배다른 동생들을 낳았다. 비공식적인 새엄마(아기를 낳지 않은)도 있었다. 새장가 들 때마다 아버지 강양삼씨는 각시만 알았다. 그래도 계모 밑에서 구박덩이로 자라지 않았다. '우리 장손 호빙이'를 하늘처럼 여기는 할머니가 있었으니까.


그는 열 살 때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는 열여섯에 갔다. 군대 가면 죽는 줄 알던 시대, 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여섯 군데서 중학교 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때는 건달 모자를 쓰고서 술도 많이 먹었고 첫사랑도 있었단다. 그는 요즘 국정원 국정조사를 많이 본 덕인지, 50년 넘게 산 아내 고옥희씨를 의식해서인지, "그 생각은 잘 안 난다"고 했다.     

그가 중학생일 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가 사는 수산리에서 걸어 40분 거리인 미면(군산시 미룡동)에서는 사촌끼리도 서로 빨갱이나 국군으로 몰아서 죽고 죽였다. 그 참상을 겪은 시인 고은은 머리 깎고 스님이 돼 버렸다. 강호병의 집안에도 청방대장(국군 계열)이 있고, 빨갱이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아비규환은 그의 동네를 비켜갔다. 

입덧할 때 액자만 뚫어지게 본 어머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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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젊으셨을 적에 고생 많이 하고 산 시절이었는데 사진 속 어머니 아버지는 참 좋아 보이신다. ⓒ 배지영


그는 군 복무 중이던 스물다섯에, 군산 개정에 사는 처자 고옥희씨를 한 번 만나고 혼인했다. 새각시가 된 고옥희씨는 날마다 열여섯 식구 밥을 하고, 수발을 들었다. 입덧을 할 때는 액자 속에 든 사과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던 때, '과일이 먹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단다. 그들 부부는 딸 셋 아들 둘을 낳았다.

강호병 고옥희 부부는 농·이불·솥단지 하나, 밥그릇 일곱 개만 들고서 분가했다. 그의 아버지 강양삼씨가 희사한 땅에 '국민학교'가 지어지고, 부부는 공사 현장 노동자들에게 밥 지어주는 일을 했다. 문방구와 만물상회를 겸한 '전빵'을 하면서 처음으로 논도 샀다. 젊어서 고생한 이야기는 책 100권을 써도 모자라겠지만, 자식들은 잘 자랐다.


1970년대, 강호병씨는 아내의 의견을 따랐다. 집안에 파란이 일었다. 문중 어른들이 불효라고 대노했지만, 1년에 14번 지내던 제사를 네 번으로 줄였다. 나중에는 두 번으로 줄이고, 제사도 오후 7시로 당겨 지냈다. 그가 아이들을 키울 때, 아버지들은 엄격했다. 그러나 그는 아침마다 딸들이 헤어 드라이를 하다가 버스를 놓칠까봐 허허 웃으며 1~2분씩 버스를 잡고 서 있어줬다.

암 판정받고 와도 어머니 밥상 차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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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리 아버지 어머니 런닝셔츠만 입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고단하고, 평범했을 어느 날. 그래도 참 평온해 보인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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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수산리 집 앞에서 시집 장가 보낸 아이들이 낳은, 강호병 님의 소중한 손자 손녀들과 어느 날 아침. ⓒ 배지영


다섯 명의 자식들이 제 짝을 찾아가고, 그는 칠순이 넘었다. 여전히 활기차다. 자식들 입에 들어갈 농사도 내려놓지 않았다. 노래 부르고, 장구 치고, 춤추는 것도 그대로. 젊은 시절처럼, 술도, 즐겁게 많이 마셨다. 다만, 자꾸 기력이 떨어지는 그의 아내가 걱정이었다. 원래 식구들 밥상을 잘 차려주던 그는 부엌살림까지 도맡다시피 했다.  

3년 전, 그는 서울의 대형 병원에서 대장암과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런 날도 그는 밥을 맛있게 먹었다. 집에 와서는, 여느 때처럼, 아내 밥상을 차렸다. 어쩌면 그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던 여름, 그의 자식들은 관광버스를 불러 아버지(나는 시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기에 호칭을 아버지로 통일한다)의 오랜 벗들과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계곡에 놀러갔다. 노래하고 춤추고 놀던 그는 느닷없이 친구들에게 투망을 던졌다.

우리는 그의 유머에 압도당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한 건 신나게 웃게 하라는 것이었나 보다. 그는 대장 부분 부분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대변 주머니를 차고 살았다. 이제는 그마저 떼어내고 본디 항문을 쓴다. 건강하게 그가 팔순을 맞던 날, 여우비가 내려 동네 전체가 산뜻해졌다.

"짜증 내어서 무엇하리? 노래나 불러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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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수산리 아버지 아버지에게 어쩌면 마지막 여름이 될 지도 모르던 2010년 여름. 자식들은 관광버스를 불러 동네 어르신들과 아버지 오랜 벗들을 모시고 계곡에 갔었다. 신나게 놀던 아버지는 갑자기 벗들에게 투망을 던졌다. 아, 아버지 유머에 모두 웃었다. ⓒ 배지영


- 아버지, 암 진단 받았을 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나는 암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띠어내면 끝나지. 난 태평하게 생각했어. 마음으로, 걍 나 죽는다, 생각하면 죽는 거야. '죽으면 죽고, 말으먼 말지'라고 생각해야지. '아유, 큰일 났네. 나 죽게 생겼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이만큼 살았고, 자식들도 잘 됐고, 죽으면 어쩔 수 없고. 다 소용 없어. 죽는 놈이 뭘 알겄냐?"

- 근데 아버지는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제사는 왜 그렇게 열심히 지냈어요?
"제사는, 이게, 내려온 예를 지키는 거제. 후손들이 모여서 밥 한 끼 먹고. 사실, 냉정히 따지면,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어. 나 죽으먼, 내 제사는 안 지내도 상관이 없어. 제사를 지내는지, 안 지내는지, 죽은 사람이 어떻게 아냐? 모르잖아.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지."

- 아버지는 무슨 일이든 먼저 웃어버리잖아요? 화도 안 내시고요.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리? 노래나 불러버리지. 화를 내고 싸움을 하면, 뭣이 부서지든지, 몸이 부서지든지 할 것인디. 그것을 누가 고치겄냐? 천상 내가 고쳐줘야지. 뭣하러 싸움을 혀?"

- 아버지는 언제부터 요리를 잘 하셨어요?
"원래부터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도 '꼬추'가 떨어질 일이 없지. 허허허. 군대 갔다 와서부터 잘허고, 장사 시작하면서부터 더 잘허고. 나는 재료만 있으먼 무슨 음식이든지 만들 수 있어."

- 강성옥(아버지 막내 아들, 우리 남편)이 집에서 밥이랑 청소하는 것 어때요?
"할 수 있으면 해야제. 형편이 어쩔 수 없다면 그렇제만, 하는 것이 좋지. 일해서는 죽들 안 해. 건강한 게 일을 하는 것이여. 그렁게 죽겄냐? 안 죽지. 처자식 줄라고 그러키 밥하는 것은, 열심히 산다는 뜻이다."

"나는 웃으면서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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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가 한없이 기쁘시던 날 2006년, 데모 하고, 감옥 가던 막내 아들 성옥이가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되던 날 ⓒ 배지영


- 애들 키울 때 누가 제일 속 썩였어요?
"하나도 없었어. 다 착했지. 근디 너도 알다시피, 성옥이가 데모하러 다녀갖고. 감옥까지 가고, 수배생활도 오래 허고. 그래도 다 지 알아서 하겄지 했어. 그때도 태평하게 생각했다. 어쩌겄냐? 그것이 죄라고 하면, 벌을 받아야제."

- 자식들한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요?
"부부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잘 살고, 넘(남)한테 잘 하고 살면 쓴다."

- 아버지는 그렇게 살으셨어요?
"나는 그렇게 살았지. 웃으면서 살았어."

인터뷰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빵을 내오고, 복숭아를 깎아 왔다. 일평생 잔병치레 많은 어머니와 살아온 아버지는, 당신 아내처럼 입이 짧은 나한테 "먹어야 쓴다, 아버지 봐라, 먹어야 병도 이겨내"라며 웃었다. 내가 새색시일 때, 아버지 집에서 한 달 살 때, 차려주는 밥만 먹고 다녔다. 그때도 아버지는 "야는 며느리가 아니라 학생이여" 하면서 지금처럼 웃었다.

내가 밥벌이 하고, 애 둘 키우는 아줌마로 살면서도, '해맑음'이 남아있는 건 시집살이를 안 해서다. 언젠가 어머니·아주버님·나 이렇게 셋이서 고스톱을 쳤다. 그 날, 내 '운빨'은 하늘에 닿았다. 내 앞에만 돈이 쌓였다. 근데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내 아들 아깐(아까운) 돈, 내 아들 아깐 돈"이라고 했다. 그것도 판판이. 나는 화투를 탁 내던지며 말했다.

"나, 안 해요."

지금은 덜 발끈한다. 성질 내봤자 내 얼굴만 쓰레기 '봉다리'가 된다. 나는 C형 간염이 있어서 간섬유화 검사를 한다. 내 간은 말랑말랑하지 않아서 사람 간 빼 먹는 여우도 주저할랑가 몰라. 그래서 친구들한테 지리산 야간 산행 갈 거면, 나를 데려가라고 한다. "곰, 호랑이, 귀신한테서 지켜줄 멋진 간이야. 딱딱하다니까" 하면서 웃고 본다.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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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구 치는 아버지 수산리 아버지가 건강하게 팔순을 맞던 날, 여우비가 내려 동네 전체가 산뜻해졌다. ⓒ 배지영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응모글입니다.
#가족 인터뷰 #수산리 아버지 강호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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