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하고 헤어진 딸, 가난한 게 싫어 그랬다네요

[공모-가족인터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모녀이야기

등록 2013.08.30 19:05수정 2013.09.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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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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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야! 너 왜 그때 엄마 따라와서 산다고 안 했어?"
"엄마가 돈 벌 줄 모르니깐…. 가난해지는 게 싫었어!"
"하하 지금은 엄마가 돈 벌 줄 아는데….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엄마가 나 따라갈래? 하면따라 올거니?"
"아니야! 똑같이 질문해도 그때 그 시절의 엄마는 돈 벌 줄 모르는 건 같았을터니 내 답은 똑같을 거야!"


하긴 그렇다. 39세에 이혼을 한 내가 그 나이되도록 할 줄 아는 것은 매일 윤동주나 노천명의 시를 읊고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나 이장희의 '그건 너' 등을 흥얼거리고 날마다 명상음악을 틀어놓고 먹을 갈던 일이었다.

능력없는 청각장애 엄마, 따라가지 않겠다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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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회복되면서 내 눈빛도 자신감이 생겼다. ⓒ 이영미


그리고 붓을 잡고 난초를 친다고 매일마다 화선지를 수십 장을 버리고, 단계연이라는 벼루 한 가운데가 패이도록 이런 저런 먹의 향내에 정신을 뺏겨 있었다. 종일 먹을 갈거나, 나무를 양각 또는 음각하며 칼을 잡고 서각하거나 돌을 사포에 잘 갈았다가 전각하던가 했다.

붓 잡고 칼 잡고 하는 일에 지치면 훌쩍 인사동으로 올라가서 종일 전시장과 고궁들을 순례했다. 옛날의 대과를 준비하는 선비처럼 살았던 셈이었다. 작품 만드는 창작예술인이라고 그거 하나라도 신들린 것처럼 파고들었더니 이런 저런 큰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별 화제가 될 일도 아닌데 단지 일반인 대회에서 상을 수상한 사람이 청각장애인이라 지역방송국 뿐만 아니라 중앙의 KBS-TV에서 45분짜리 다큐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수입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방송에 나간 뒤부터 호사다마라고 주변에서 오해와 더불어 안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가족들이 그 뒤로부터 방송이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서예원을 운영하면서 더러더러 묵향을 배우러 가족 단위로 또는 교사동아리와 동네꼬맹이들이 연구실을 들락거렸지만 고정수입은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일반 주부처럼 돈을 가족들의 의식주에 쓰는 것도 할 줄 모르고 그냥 공부에 재투자만 계속 했기에 어린 딸들은 서예원에서 돈이 나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반면에 이혼 전 경이의 아빠는 경제와 관련된 좋은 직장의 높은 자리에서 근무했다. 아이들은 말도 잘 못하는 중증청각장애인데다가 운전도, 컴퓨터도 못하고 집도 없는 엄마를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떠나 집도 없이 연구실 한 켠에서 자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것이 내 홀로서기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에게 이롭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큰 아이인 경이를 인터뷰하니 그냥 중증청각장애엄마가 능력이 없느니깐, 그리고 그냥 살고 있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이혼이란 자체에 충격을 받았을 터이고 깊이 생각해볼 수 없는 초등생이었으니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떨어져 살던 딸, 아파서 고등학교도 휴학... "엄마가 미안해"

나는 이미 어릴적부터 중증청각장애로 왕따와 가난과 객지생활로 생의 밑바닥까지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혼하고 홀로서기를 해보니 생의 밑바닥의 길은 끝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중에는 내가 겪은 밑바닥은 바닥이라고 할 수 없는 원만한 바닥일 수도 있었다.

그 밑바닥 길도 줄기차게 가면 지구의 반대쪽처럼 어떤 빛이 나오는 길이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이혼하고 말을 다시 배우고 컴퓨터와 운전도 익히고, 서예원 운영은 포기했지만 비영리민간단체를 만들어 나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친구들의 손을 잡느라 한동안 온 마음을 다해 살았다.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 살던 나와 달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춘기에 들어간 경이는 재혼한 아빠의 가정에서 새엄마와의 갈등과 이혼의 충격에서 온 후유증으로 조금씩 마음의 빛을 잃어갔다. 급기야 외국어고등학교도 휴학하고 병에 걸렸다.

나는 한창 전국규모의 비영리민간단체 창립을 한 달 앞두고 동분서주 하고 있었는데 초췌하기 그지 없는 경이가 내게 보내졌다. 아이가 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절한 눈빛으로 엄마에게 가고 싶다고 자기 아빠에게 부탁해서 잠시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가난한 엄마를 따라나오지 않은 대신, 예쁜 새엄마와 재혼한 아빠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영어를 좋아하는 취미를 살려 외국어고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 경이가 곧 죽을 사람 모양새로 극도의 황폐한 모습으로 내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나는 비영리민간단체 창립관계자들과 서울 본부대표들에게 창립회장사퇴의사를 표명하고 창립과 관련해서 이 일은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내게는 아픈 딸 경이의 심신을 회복시키는 게 제일 큰 일이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백혈병과 비슷한 말기암 선고를 받고 3개월 시한부 삶을 살던 친정엄마 역시 "우리 막내 영미에게 이렇게 이혼과 더불어 어려운 일이 닥쳤는데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손놓고 죽을 수 없다"고 힘을 내셔서 날마다 온 정성으로 기도하셨다. 엄마는 밝은 안색으로 날마다 경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경이는 태어난 직후 어설픈 내 손보다 따스하고 깊은 삶의 지혜와 경륜이 있는 전주이씨 종가집 며느리인 외할머니의 손에서 더 오래 지냈다. 외할머니의 남다른 음식 맛에 어릴 적부터 길들여졌다. 그래서 그런지 경이는 외할머니가 사랑으로 만든 온갖 음식을 잘 먹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의 기도덕분인지는 몰라도 경이는 6개월 만에 쾌유되었다.

경이가 회복되니 재혼한 제 아빠가 다시 데리러 왔는데 그때 경이는 완강히 말했다.

"나 이제 가난해도 좋으니 아빠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엄마랑 살 거예요!"

결혼해서도 내 주변에 있으려는 딸의 마음은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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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웃으며 동행한다. ⓒ 이영미


경이가 회복되면서 나는 다시 비영리민간단체 창립과 성폭력상담소 설립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경이와 친정엄마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일이 내게 신명과 탄력을 주었다. 세상으로 향한 활동의 원천은 가족에게서 나오는 것이란 것을 새삼 절감했다.

경이가 외국어고등학교에 복학하려면 다시 일 년에 가까운 학기를 재수업받아야 해서 아이는 검정고시를 택했다. 조그만 동네 야학교에 가서 검정고시공부를 한 경이는 무난히 몇 달 만에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내가 사는 동네 가까운 곳의 사범대학에도 붙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두 개의 대학원도 다니고 가르치던 영어학원에서 우연히 온 손님이었던 온유한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동안 경이가 맏딸로 나와 함께 살며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엄마이기 때문에 평안했던 느낌도 있었겠지만, 중증장애엄마의 소통을 돕는 장애보조역할이 주는 어떤 심리적인 부담도 적지 않았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경이가 온유한 신랑을 만나 결혼하여 두 다리 뻗고 아무에게도 신경쓰지 않고 영혼 깊이 잠들게 된 것이 너무 너무 고마웠고 지금도 고맙다. 경이가 두 다리 뻗으므로 해서 나의 두 다리 또한 저절로 뻗게 되는 것이니깐.

경이는 결혼을 하면서도 시집의 권유를 물리치고 나와 5분 거리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나는 청각장애이지만 청신경계의 장애라 균형감각이 떨어져 혼자서 집 안에서도 잘 넘어진다. 그래서 발과 손목이 차례대로 골절한 적이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잘 상처 받아 혼자 잘 울고 밥도 잘 먹지 않는 나를 생각해서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택한 것이었다.

나는 결혼하면 처가집과 화장실은 멀어야 좋다는 속담을 들먹이면서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고 좀 떨어져 살으라고 했는데 경이말로는 원래는 우리 집 옆집으로 오려고 했는데 빈 집이 나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택한 것이라고 했다. 겉으로는 왜 그랬냐고 했지만 내심 나는 속으로 푸근하고 든든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싱글엄마로 살아가지만 든든하다. 장애를 가진 엄마이지만 장애를 못 느끼고, 세상의 말을 못 듣는 엄마이지만 세상의 소리를 다 듣는 느낌을 갖는 것은 경이가 내 딸로서 인연지어진 것도 크게 영향이 있다.

경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줄곧 만들어주었던 나의 어머니, 경이의 외할머니와 나와 경이 3대가 매주 같이 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목욕가는 것이었는데 어떤 목욕탕에서는 우리 3대가 맹세를 하기도 했다. '학천탕의 맹세'라고 명명한 맹세는 죽을 때까지 서로 사는 장소가 달라도 자주 만나 목욕을 같이 한다는 것이었다.

경이는 제 몸을 씻는 요령이 어릴 적부터 없었다. 그래서 경이가 어릴 때는 경이의 왼쪽다리는 친정엄마가, 오른쪽 다리는 내가 이렇게 나누어서 씻겼다. 그러다가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은 내 친정엄마가 경이가 회복되고 대학교 입학하는 것도 보고 간다고 말한 것처럼 4년을 더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아플 때는 경이가 할머니의 다리를 씻기고 나는 등을 밀고 이렇게 엄마가 거동하는 순간까지 3대가 목욕하는 약속은 지켜졌다.

나와 얼마 전에 함께 목욕갔던 경이가  말했다. 경이가 결혼한 후 우리 모녀는 목욕탕에서 한 주간의 온갖 생활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경이의 등을 밀고 경이는 내 등을 밀고 가끔은 사람이 없을 때 서로가 폭포 밑으로 밀어넣거나 뿌리는 물장난도 한다. 경이는 새롭게 시작한 일들이 있었던 모양인지 환한 안색으로 내게 말했다.

"엄마! 내가 학교에 복학 안 하고 무척 힘들었을 때 검정고시 준비한 야학교선생님들이 따스하게 해준 게 마음에 오래 남아 있어. 그래서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지금 몇 달 째 다니고 있는 데가 있어!"
"뭔데? 근데 몇 달 동안 말 안 하다가 지금에야 왜 말해?"
"아…. 그건 내가 계속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말 못했고 지금은 앞으로도 계속 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길만큼 마음이 참 보람되고 좋아서 그런 거야!"
"뭔데?"
"시내의 청소년 대안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건데 내가 참 힘들었던 그 나이의 청소년들을 보니 그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아주 열심히 하게 되더라구. 미리 영어로 퀴즈도 만들고 숨바꼭질 게임도 연구해서 만들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분식도 사주고 그래."
'아멘! 이얏호!'

나는 속으로 '아멘!' 하고 소리없는 감사기도와 반가움의 외침이 나왔다. 그리고 심장과 가슴이 저밋거리고 눈이 절로 젖어들었는데 아이가 눈치챌까봐 연거푸 샤워기로 얼굴과 몸에 뿌렸다. 속으로 그때 경이에게 잘해준 야학교사람들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웠다. 경이가 자신의 어려웠던 그때를 뒤돌아 보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고 자신의 땅을 한 뼘 한 뼘 설계하고, 생애 단 한번의 소중한 순간과 인연의 의미를 깨닫고 진심으로 인간관계를 하나씩 하나씩 구축해나가는 것이.

야학교의 그 젊은 선생들이 꼭 경이에게만 친절하고 따스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젊은 선생과 임언니라는 사람도 자신들이 어렸을 때 아프고 힘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경이와 같은 야학교 아이들에 발견하고 잘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경이가 청소년대안학교에서 그렇게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잘해주고 싶은 것처럼.

경이는 낮에는 청소년대안센터에서 청소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대학생과 직장인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소통이 어려운 나를 도와 오늘도 여기 저기 공공기관에 전화를 하거나 나를 따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교정시설에도 스스럼없이 따라간다.

경이가 주말에 만나자고 내게 연락이 오면 난 항상 경이에게 묻는다.

"얘! 시댁에는 언제 갔니? 네 신랑 밥은 챙겼어?"
"에이! 엄만 날 뭘로 보고?"
"뭘로 보긴? 너는 그냥 내게 아직도 가난한 엄마와 같이 안 살려던 하던 그 아이지!"

반면에 경이는 주말에 나를 만나면 항상 묻는다.

"엄마! 몸은 괜찮아? 속상하거나 아픈데 없어?"
"살다보면 아프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지 뭐."
"아냐 아냐! 말해. 속상한 것 마음에 담으면 병난단 말이야!"
"내가 병나면 네가 힘들어질까봐 그런거지? 엄마 걱정하는 게 아니라."
"맞아, 맞아 그런 점도 있어! 하하 그러니깐 말해!"

이렇게 매주 만나면 모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절친이기도 하고 서로의 멘토가 되어 일상을 뒤돌아보며 공유한다. 어제보다 오늘은 좀 더 마음이 단순해지고 환히 밝아지고, 이전에 상처받은 영혼이 지금이라도 가벼워져 하루 하루 잘 살아가기 위해서. 이전처럼 생의 밑바닥까지 가는 그런 아픔의 파도들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도 딸의 엄마가 되고 싶다,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나는 다시 태어나도 경이의 엄마로 살고 싶다. 그러나 소리를 못 들어 경이의 귀를 빌리고 경이가 나로 인해 이웃에게 장애차별의 소리를 듣고 힘들어 하는 그런 장애엄마가 아니라, 경이의 귀와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음악을 잘하는 엄마이고 싶다. 문득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경이는 다시 태어나면 나와 인연짓고 싶을까? 다음 목욕을 가면 질문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왜냐하면 경이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을 터이고 내가 질문을 하면 나를 닮아서 상대를 기분좋게 해주느라 없는 말을 만들지 못할 것이고 그냥 얼버무리거나 엄마 갑자기 왜 이상한 질문을 해? 하고 핀잔을 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내 생일날 경이가 연꽃 두 개를 오려 붙이고 그 옆에 고운 글씨로 쓴 편지의 한 귀절이 생각난다.

"엄마! 활짝 핀 연꽃은 엄마연꽃! 아직 필까 말까 하는 것은 경이연꽃이야! 엄마는 세상의 소리를 못 들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 엄마야! 그러니 경이의 엄마답게 많이 웃어야해요!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살아야 하니깐. 그래야 하늘에서 우리 지켜보는 외할머니도 우리 보고 웃지!"

이제 나는 세상살이에 많이 지쳤다. 경이가 자리잡을 때까지 나는 경이의 손을 꼭 잡고 때론 그 아이가 넘어질까봐 일부러 무거운 돌멩이 역할도 하다가, 그 아이가 급류에 휩쓸리면 온 몸의 옷을 벗어 끈을 만들어 당겨주기도 했다. 이제 세상살이에 많이 지치고 곧잘 아픈 나는 점점 혼자 살아가기가 힘들어 비틀거릴 때가 더러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경이가 비틀거리는 나를 당연히 붙잡아서 내가 마지막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친정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유달리 섬세하고 예민한 나인지라 평생 살면서 그 아이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가는 것이 마음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부터 조금씩 홀홀한 나의 노후를 위해서 10년 계획을 가지고 조금씩 준비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낮은 영혼으로 아름다운 노후를 설계하고 실행해나갈 것이며, 경이의 마음 속에 정말로 세상에 하나 뿐인 우리 엄마를 넘어서, 경이가 자기 아이들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정말로 생각만 해도 마음 따스하고 소중하고 대견한 우리엄마로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혼가정이라고 해서 가정과 가족이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건실한 가정이 되고 더 끈끈한 가족이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인 딸, 세상에 단 하나인 엄마..우리 모녀가 만들어가는 삶과 뒤돌아보는 이야기..별 것 아니지만 정말로 별 맛이 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단 하나인 우리인연과 소중한 시간을 위해 법정스님의 글을 옮겨 봅니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一期一會)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지금을 어떻게 사는가가 다음의 나를 결정한다 / 법정스님의 글 중에서
#가족인터뷰 #이혼가정과 가족의 행복 #세상에 단 하나인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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