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시집 안가면 정신대 끌려간다케서..."

[공모-가족인터뷰] 애절한 첫사랑 품고 사신 우리 할머니

등록 2013.09.03 09:38수정 2013.09.0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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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여행박사와 오마이뉴스가 함께 하는 '가족이야기' 공모전
나의 어린시절에는 엄마보다 늘 할머니가 있었다. 엄마는 약국을 하며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잘 시간이 다 되어서 퇴근했고,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할 때도 초등학교에서 소풍을 갈 때도 보호자가 되어 함께 와준 건 할머니였다.

아침에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할머니는 "어서 안 일어나나! 학교 갈 시간 다 됐다" 하며 채근을 하면서도 이불을 덮어주며 조금 더 자라고 토닥거려주셨다. 밤에는 언제나 팔베게를 하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초저녁 잠이 많은 할머니의 이야기는 언제나 "옛날, 옛날에 소금장수가 있었는데…"로 시작해서 "드르렁, 푸. 드르렁, 푸" 할머니의 코고는 소리로 끝나곤 했다.

다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할머니의 첫 손녀이자 그녀에게 '할머니'란 명칭을 갖게 해준 나는, 심심하면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청한다.

"할머니 옛날이야기 좀 해보세요."

다림질을 하면서, 할머니가 대답한다.

"니는 다 커서, 만날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노?"
"소금장수 얘기 말고, 할머니 옛날 얘기 좀 해 주세요. 할머니 처녀 때 얘기!"

누가 얘기해주지 않아도,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복잡한 가정사. 내가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께 계신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우리 가족과, 결혼하지 않은 삼촌들과 고모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고향인 경북 울진에서 우리가 '죽변 할머니'라고 부르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대구에도 할머니가 한 분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을 치르며 처음으로 얼굴을 보았다.


작은 시골 어촌의 유지집안의 큰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배도 몇 척, 그 당시에는 마을에서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과 아빠 이름을 붙인 여관도 경영했단다. 그런 집안에 시집온 '죽변 할머니'가 딸을 하나 낳고 몇 해가 지나도 자식이 없자, 대가 끊길 것을 우려해서 새로 들인 며느리가 바로 우리 할머니였던 것이다.

시집온 할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아들과 딸을 연이어 출산해 6남매를 낳으며 종갓집 며느리로 인정받고 집안의 대소사에 관여했지만, 할아버지는 죽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대구댁'이 할아버지를 찾아 마을에 나타난다.

내 이름의 첫 글자인 성(姓)을 이어받은 종족과 가문의 입장에서 본다면,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요즘말로 '주말부부'를 하면서 종손(宗孫)을 포함해서 알토란 같은 자식을 여섯이나 낳아 열심히 가르치고, 훌륭하게 길러낸 준 종부(宗婦)는 충효비를 세워줄 만한 여인이다. 하지만 한 '여성의 인생'이란 개인적인 삶으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생활을 함께 나눌 수 없는 '공공하게 인정된' 남편의 외도, 장성해서 품 떠난 자식들, 그리고….

"연호정에 가득 핀 연꽃을 보면서,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다림질을 다 끝낼 때까지 말이 없던 할머니는 다려진 옷을 매만지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소학교 입학할 무렵에 아버지가 배를 타고 일본에 가서 장사를 하시느라고, 제 나이 때 입학을 못했던 기라. 그리고 몇 해가 지나서 내 동생이 입학할 때 나도 벽에 걸린 아버지 쌈지에서 돈을 꺼내서 입학금을 내고, 학교에 다니게 된 기라. 너무 기뻐서, 낮이고 밤이고 뒷간에 갈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교과서 내용을 잘잘 외웠어요. 그래서 시험만 보면 1등을 해서, 월반을 했다 아이가. 1학년에서 4학년으로 바로 올라가서, 3년 만에 졸업을 했다.

나는 옷감 욕심이 많아서, 예쁜 옷감을 보면 엄마를 졸라서 꼭 손에 넣었지. 그 옷으로 치마저고리를 만들어서, 늘 깨끗하게 다려서 단정하게 입고 다녀서, 학교에서 선생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제. 그때는 고학년 학생은 젊은 선생님들과는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어. 우리 담임선생은 일본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우리 동네에 왔다가 나를 찾았던 모양이라. 내가 집에 갔더니, 이웃 아줌마가 한 일본 선생이 근처에 '어여쁜 아가씨'가 살지 않느냐며 내 이름을 대고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

할머니는 요즘도 외출할 때면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고 준비하는데 2~3시간씩 정성을 들이신다.

"예나 지금이나 꽃단장을 하고 다니셨나보네. 그래서 졸업을 하고 나서는요?"

소녀에서 처녀로 변해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며 내가 물었다.

"졸업을 할 때 즈음, 울진 전화국에서 교환원을 뽑는다고 학교에 왔지. 선생님들은 모두 품행이 단정하고, 똑똑한 학생이라며 나를 추천해서 졸업을 맞고는 바로 교환원으로 취직이 되었다는 거 아이가. 그때 우리 언니는 결혼을 해서, 형부를 따라 평안도로 시집을 갔고, 내 여동생은 여중을 졸업하고 소학교에서 선생이 되어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

그러던 어느 날 , 여동생이 '언니, 언니!' 하고 부르면서, 학교에 정 선생이라는 사람이 편지를 전해주라고 했다면 하얀 봉투를 하나 내밀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학교에 새로 전근 온 선생이 하나 있었는데 훤칠한 키에 안경을 쓰고 조용한 성품이라서 서로 말을 나누어본 적은 없었던 기라. '고 선생 귀하'라고 쓴 하얀 봉투를 열어 보니, 이래 써 있더라고."

친애하는 고 선생,

이렇게 무례하게 편지를 쓰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용서(容恕)하길 바라오.

울진 소학교에 전근을 와서 처음 당신을 본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대의 아름답고 정갈한 모습에 반했소.

그러나 내 교사의 신분으로 학생에게 그러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교육자(敎育者)로써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그대에 대한 내 감정을 감추어보려고 했소.

지난해 봄 당신이 졸업해서 학교를 떠나고, 눈에서 멀어지면 감정도 사라지겠거니 믿었다오. 하지만, 학교에서도 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도 당신의 자태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소. 또한 당신의 여동생인 고 선생이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면서, 학교에서 고 선생을 볼 때마다 그대가 떠올랐소.

내 비록 크게 가진 것은 없소만, 조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소. 부디 내가 그대를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주길 진심으로 소망하오.

토요일 저녁 5시에 죽변 연호정(蓮湖亭)에서 만납시다.

一九四0年 五月
鄭○○ 拜上

"하얀 편지지 위에, 한 글자씩 정성스럽게 붓으로 써내려간 글씨가, 어이구 야야, 어찌 그리 늠름하고 멋진지, 그 글씨를 보고 마음을 쏙 빼앗겨버린 기라. 나는 지금도 그렇다만 공부는 잘했는데, 글씨는 아무리 연습을 해도 삐뚤삐뚤 잘 못쓰거든."

할머니는 반쯤 눈을 감고서 여동생을 앞세워서 연호정에서 정 선생을 만났던 얘기를 이어갔다.

"아이고 야야, 부끄러워서 얘기는 무슨 얘기를 했노. 연호정에 가득 핀 분홍색 연꽃을 보면서, 그 사이로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달콤한 연꽃의 향기와 이른 여름의 바람이 내 이마에 와 닿는 듯 했다.

"만날 동생을 앞세우고, 손도 한 번 안 잡고 요즘말로 하면 '데이트'를 했제. 한 석 달쯤 지나니까, 작은 시골바닥에서 둘이 연애를 한다고 소문이 다 나버렸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부르더니 '시집갈 나이의 다 큰 처녀가 연애를 하고 돌아다닌다고,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다그치셨지.

첫 편지에 애틋하게 나를 연모하고 있다고 썼지만, 만나면 만날수록 정 선생은 소소한 일상에서 자신의 느낌이나 생각을 나누는 편지를 써 보냈지. 선비같이 점잖고 늘 정중하게 나를 배려하고, 아끼고 하는 마음이, 말을 안 해도, 와 요즘은 TV에서는 '느낌 아니까~' 카데. 나도 느낌이 그랬다."

예상치 못했던, 할머니의 '첫사랑' 얘기를 넋 놓고 듣다가, "어머님, 식사하세요" 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할머니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식구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면서, 아빠는 최근 추진 중인 가족 납골당 이야기를 꺼낸다.

"어머니, 이제 공사가 다 끝났어요. 가족 납골묘가 완성되어 한 층에 열 분씩, 이층이니까 스무 명의 공간이 있고, 할아버지, 아버지 산소를 정리해서 유골함을 만들어 모셨어요. 큰 어머니 것도 아버지 옆으로 안치했고, 다른 쪽으로 아직 공간이 많이 남아…."

아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할머니가 말을 끊으며 "나는 그 안에는 안 드간다. 평생 치다꺼리 했으면 됐지, 죽어서까지 옆에서 싸울 일 있나! 거 있는 영혼들은 다 예수를 모르는 비신자들이라서, 어울리기 싫다. 나는 그 옆에 자유롭게 뿌려 도고. 나무랑 꽃이랑 심어 놓으면 내가 즐겁게 볼 끼다"라고 잘라 말했다. 아빠는 두말없이 "명심하겠심더" 하고 대답했다.

식사 후엔 두 시간 넘게 이어지는 할머니의 기도시간이다.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그리고 이웃까지 이어지는 할머니의 기도를 듣고 있다가는 내가 먼저 잠에 들 것 같아서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집에 엽서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기라, 낯익은 글씨는..."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를 이어서 들을 기회는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60여 년 전의 일을 어젯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그때의 애달픈 감정이 느껴졌고, 그 결말이 결코 해피엔딩이 아닌 것을 짐작하기에 '출출한데 뭐 간식거리가 없을까?' 하는 가볍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시 할머니의 '첫사랑'을 물을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꾸어 물어봐야겠다' 생각한 나는 화살을 할아버지와 나의 종족에게 돌렸다. 마침 할머니와 나는 중년의 부인이 나와서, 고된 시집살이와 고부갈등을 토로하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한 터였다. "할머니, 젊었을 때 시집살이 힘들지 않았어요?" 내가 물었다.

"와, 안 힘들어? 안 힘든 시집살이가 어딨나?"
"요즘은 이혼도 하고, 방송에 나와서 저렇게 하소연도 하는데, 우리 할머니는 힘들면 어떻게 했어요?"

내 질문이 길어지자, 할머니도 이야기 보따리를 풀 태세를 슬슬 보인다.

"위로 시부모에 시동생들도 모두 한 집에 살아서 식구에 머슴들까지 밥을 내가 다 준비해야지, 여관에 극장에 할 일은 많제, 남편을 뭐하는지 사나흘에 한 번씩 얼굴이나 보나, 무슨 인생이 이렇게 힘든가 싶어서 네 아빠가 돌이 좀 지날 때쯤 점 집을 찾아 갔데이.

그랬더니, 그 점쟁이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서더니, 말도 안 꺼냈는데 '아지메요, 걱정 말고 이 아이를 잘 키우시소. 그라마 큰 인물이 될 꺼라. 아지메는 나중에 아이 잘 키운 덕으로 호강을 하고 살겠구마이' 하고 얘기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힘이 나서 아이들을 키우는 걸 보람이라 생각하고 살았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그런데 할머니 그때 말했던 '첫사랑'은 어떻게 된 거에요? 연애만 하고 헤어진 거예요?"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한다.

"이노무 가시나가, 왜 쓸데 없는 걸 자꾸 묻노."
"에이, 할머니 궁금하잖아요. 다 지난 얘기인데 보따리 좀 풀어보세요."

내가 애교를 떨며 할머니를 안자, 할머니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 우리 손녀가 궁금한 건 못 참지. 우리 어머니가 내 연애 소문을 듣고 노발대발하고 나는 정 선생이 조만간 우리 집을 찾아와 청혼을 하겠지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있으려니까 정 선생이 군대에 갔다는 소식이 들리더라. 그때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동네의 장정들은 특히 총각들은 모두 징집되어 학도병으로 갔지. 그래도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간 사람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며칠 밤낮을 울고불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일본사람들이 시집 안 간 처녀들을 모두 잡아서 정신대에 보낸다고 나를 보고 얼마나 걱정을 하셨는지. 빨리 시집을 보내려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셨는데, 늘 나를 예뻐해주셨던 이웃집 아주머니가 하루는 우리 집에 오셨지.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이웃집에 시집 보내기로 했다고 하시더라.

'종갓집인데 아들이 없어서 어른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라는구나. 초혼은 아니지만 그 집 큰아들 인물도 훤하고 성품도 나쁘지 않다. 네가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큰댁은 따로 살림을 내어주고 네가 시집에서 종부 역할을 하게 되는 기다. 나도 이렇게 너를 보내고 싶지 않다만, 시절이 이렇게 수상하니 빨리 시집을 가지 않으면 정신대로 끌려갈 수도 있다고 하니 하루라도 빨리 식을 올리고 시집을 가거라. 그 집 살림이면 네가 굶거나 남루하고 초라하게 살 일도 없을 터이니' 하는 어머니 말을 듣고 시집을 갔다. 애절했던 사랑이 아무런 소식도 없이 떠나버린 상처에 뭐 다른 상대가 옳게 보이지도 않았고."

"그리고는 끝이었어요? 그 정 선생은 전쟁에 끌려가서 전사라도 했나요?"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반문했다.

"아니. 그 사람이 떠나고 나는 마음을 다 정리했고, 결혼을 하고는 시집살이를 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지. 해방을 맞았고, 또 얼마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올라오니, 집에 엽서가 한 장 떨어져 있는 기라. 낯익은 글씨는 정 선생 것이었지."

고 선생,

그간 잘 지내고 있었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엽서를 띄웁니다. 전장에 나가서도 오직 당신 생각뿐이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당신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할 걸음에 달려왔소. 하지만 당신의 부모님에게 당신이 이미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낙심에 빠져서 한 동안 넋이 나갔었소.

내가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로 끌려가기 전날 밤 몇 번을, 몇십 번을 학교와 당신의 집을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른다오. '전쟁에서 돌아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너무 잔인하고 미안한 말이 될 것 같아서 당신 집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오. 그리고 살아서 돌아온다면, 당신을 꼭 찾아오겠노라 마음을 먹었소. 그때 당신이 날 기다리고 있다면, 나의 신부로 맞아야지 하고 생각했소.

당신은 시집을 갔구려. 당신의 부모님이 한사코 말려서 당신을 찾아가지 못했소. 그런데, 전쟁 중에 피난을 와서 당신의 시집에 며칠 머물고 가게 되었소. 혹, 당신도 내 소식이 궁금할지 모를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쓰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기를 바라겠소.

정○○ 배상

"야속했지만, 그렇게 엽서를 받고 사연을 알게 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제. 그래 그 사람도 얼마나 힘들었겠나 싶은 마음도 들고. 한참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 니 이모할머니랑 그 선생 한번 찾아보자고 경찰서에 연락을 해봤는데, 너무 오래전에 연락이 끊겨서 찾지는 못했다. 인제 찾으면 뭐하겠노, 다 늙은 노인네가 되어서…."
"안타까워라. 좀 일찍 고백을 했더라면, 그 정 선생과 잘 됐을 수도 있을 텐데…."

아쉬움에 얘기를 꺼내자, 할머니는 눈을 꿈뻑거리며 "야야, 내가 정 선생과 잘 됐으면 니가 이 자리에 있겠나? 다 잘 안 돼서, 잘된 기라" 하고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첫사랑'이야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첫사랑' 이야기는 두 세대를 가르는 거대한 시대와 공간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되었다. 그 다리 위에서, 나는 할머니를 애절한 사랑을 품은 여인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가족인터뷰' 기사공모 응모글입니다.
#할머니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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