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낳은 위대한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

동북항일연군 허형식 장군을 기리며

등록 2013.09.03 14:42수정 2013.09.0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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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성대경 명예교수님이 허형식 희생기념비 앞에서 제문을 올리고 있다. ⓒ 장세윤


지울 수 없는 메일

어제 오늘 날씨는 창을 닫고 자야할 정도로 선선해졌다. 그새 달력을 보니 8월에서 9월로 넘어갔다. 올 여름은 예년에 볼 수 없는 더위였건만 나는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장편소설 <어떤 약속> 집필로 더위도 모른 채 지냈다. 오늘(3일) 모처럼 그동안 쌓인 메일함을 정리하는데, 한 달여 전에 받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박사 메일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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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희생기념비 뒷면 비명 ⓒ 장세윤

박 선생님! 오래간만에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진작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이제야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지난 7월 9일(화) 저의 지도교수인 성대경 전 성균관대 교수님 등 답사단 14명과 함께 북만주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청봉령) 들머리에 있는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를 찾아가 조촐한 추모행사를 치렀습니다. 우리 모두 헌화와 함께 조촐한 제수를 차려놓고, 엄숙하고 경건한 제사도 지냈습니다. 성대경 교수님께서 미리 준비한 제문도 올려 바쳤습니다.

이번 참배는 박 선생님께서 지난 2000년 8월에 답사, 참배한 뒤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단체로는 첫 번째 답사이자, 첫 번째 대규모 추모행사(제사)가 아닌가 합니다. 

올해 초 성대 사학과 성대경 교수님과 제자들이 중국동북 답사를 추진, 갑론을박 끝에 지난 7월 6일(토)부터 11일(목)까지 5박 6일간 만주 독립운동 유적지와 박물관·기념관 등을 답사케 되었습니다(주로 장춘·하얼빈). 하얼빈에서 서명훈 선생님도 만났습니다. 82세 고령입니다만, 아직도 건강하시고 선생님 안부도 묻고, 당신 안부도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허형식 장군 기념비 사진 몇 장 첨부합니다.  2000년 8월 박 선생님이 찍은 사진과 비교해보니 앞에 작은 제단이 설치되었고, 주변의 작은 목책이 시멘트 장식으로 바뀌었더군요. 언제 서울에 오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3. 7. 15. 장세윤 드림


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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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동북열사기념관 ⓒ 박도


2000년을 앞둔 1999년 여름, 나는 한 독지가의 후원으로 중국대륙에 흩어져 있는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2주 답사 일정 중, 8월 4일은 하얼빈 동포사학자 서명훈 선생의 안내로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린 항일유적지를 답사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러시아 헌병에 체포, 그날 밤 일본총영사관에 인도돼 수감됐다. 안 의사는 그곳 지하 감방에서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 타카오에게 신문을 받았는데, 그 감방도 어렵게 둘러봤다. 다음은 거기서 가까운 동북열사기념관으로 갔다. 이곳은 원래 일제강점기 때 하얼빈 경찰서였던 곳인데, 지금은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항일열사를 모신 곳이었다.

서 선생은 거기에 모셔진 100여 열사 가운데 허형식·양림·리추악·리홍광·박진우·차순덕 등 서른 두 분이 우리 동포라고 말씀해 대단히 뿌듯했다. 그때 동행한 임정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후손 이항증(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은 내게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바로 박 선생 고향 분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네?"

나는 깜짝 놀랐다. 내 고향 구미에 이런 훌륭한 항일열사가 태어나셨다니.

"이분은 구미 임은동 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난 상모동과는 철둑 사이로 바로 이웃 동네지요."
"네?!"

나는 또 한 번 크게 놀라며 그런 항일 파르티잔(partisan·유격전을 수행하는 비정규군 요원의 별칭)을 몰랐던 나 자신이 매우 부끄러웠다.

그 며칠 후 연길 서점에서 산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 <결전> 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생전 모습을 대할 수 있었고, 같은 책 263쪽에서 김우종 선생이 쓴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편에서는 혀형식 장군의 최후도 읽을 수 있었다.


한 순결한 파르티잔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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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 박도

1940~41년 무렵 일제는 관동군을 76만 명으로 증가시켜 소련 진공을 준비하는 한편, 항일연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대부대를 동원해 동북 일대를 빗질하듯 싹싹 토벌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견딜 수 없어 1940년 말부터 대부대를 소련(러시아)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김일성·김책·최용건과 같은 지휘관들은 모두 소련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만은 단 한 번도 소련으로 피신치 않고, 오로지 동북을 지키며 소부대 활동으로 끝까지 일제와 맞섰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경위원(경호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목란·등흥 등지에 소부대사업 검열을 나갔다.

장서린 소부대가 동흥현 두도하자, 이도하자, 삼도하자의 숯구이 노동자들 속에서 반일회원을 100여 명이나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듣고,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비밀공작을 더 잘하라고 지시하고는, 장서린이 파견한 왕조경과 함께 8월 2일 귀로에 올랐다.

바로 이때 일제 토벌대(위만군)가 이 지역에 출동하여 산간지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허형식 일행은 청송령 기슭에서 밤을 보내고 8월 3일 아침, 경위원이 일제의 낌새를 모른 채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폈다. 계곡이 깊어 밥 짓는 연기가 미처 흩어지지 않아 그만 토벌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허형식은 두 전사와 함께 토벌대와 맞서 싸웠다.

하지만 세 사람으로 몇 배나 많은 토벌대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없었다. 허형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엄호할 테니 빨리 철퇴하라고 두 경위원에게 명령했으나 누구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진운상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허형식은 왕조경에게 문건 배낭을 넘겨주면서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퇴각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왕조경은 할 수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허형식은 피를 흘리면서도 왕조경을 엄호하기 위해 큰 나무둥치에 기대어 적들을 계속 쏴 눕혔다. 그러나 적들의 기관총 사격에 허형식은 끝내 장렬히 쓰러졌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 김우종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중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 감동받아 한동안 눈을 감았다.

내 인생의 길을 바꾼 파르티잔

나는 중국에서 귀국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7집 '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논문(독립기념관 연구사 장세윤 박사 씀)을 찾아 단숨에 읽었다. 허형식 장군에 대한 흠모가 더욱 불같이 일어났다. 그 무렵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 교수를 알게 됐다. 어느 하루 장 교수가 나와 허형식 장군을 국내 신문에 처음으로 보도한 정운현 당시 대한매일 특집부 차장을 초대해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 교수연구실에서 함께 만났다. 내가 허형식 장군과 동향이라고, 두 분은 초면인데도 마치 십년지기 동지처럼 따뜻하게 맞아줬다.

2000년 8월 17일, 나는 허형식 장군에 대한 흠모의 마음과 그 행적을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홀로 하얼빈을 찾아갔다. 하얼빈에서 김우종·서명훈 두 분 선생을 만나, 그분들의 안내로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 허형식 희생기념비에 찾아가서 들꽃을 바치고 돌아왔다. 그 이야기를 '영웅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월간 <독립기념관> 2003년 7월호에 게재하자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정운현씨가 이를 <오마이뉴스>에 '박정희 일본군 장교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라는 제목으로 전재했다. 그런 연유로 그때부터 나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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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의 자존심 야은 길재 선생의 초상 ⓒ 박도

아무튼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시민기자로 그리고 역사학도로 <항일유적답사기> <영웅 안중근>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개화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 암살자와 추적자> 등의 근현대사 관련 책과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등의 사진집, 장편소설 <제비꽃>도 펴냈다.

33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벌판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허형식 장군 때문에 한 평범한 고교 국어교사가 역사학도로 인생길을 바꿔, 나는 정년이 보장된 교사직도 팽개치고 강원도 산골까지 들어오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늘 나에게 집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을 가리키시면서 선산 구미는 충절의 고장이요, 선비의 고장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 나는 충절의 고장이 '왜 현대사에는 그런 인물이 없을까' 하여 젊은 날 많이 방황하기도 했다. 허 장군을 만난 이후 나는 글방 책장에 장군의 사진을 액자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그동안 몇 번이나 그분 이야기를 소설로 시작했으나 매번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이 그분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자격지심과 만주독립운동사에 대한 역사공부 부족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는 꼭 탈고하리라고 다짐하지만 이 말조차 혹 실천하지 못할까봐 매우 조심스럽다.

허형식 파르티잔. 그분은 내 인생길을 바꿔놓은 위대한 영웅이요, 혁명가다. 삼가 북만주 산골에 외로이 눈을 감은 그분의 명복을 빈다. 1942년 8월 3일 그분은 토벌대의 총탄에 쓰러진 뒤, 머리조차 효수당하고, 남은 시신조차 짐승들의 먹이가 됐다고 전해진다.

지난 8월 24일, 경기도 강화에서 1박 2일 작가회의 모임이 있었다. 나는 그때 통영에서 오신 최정규 시인과 같은 방을 썼는데, 그분은 당신 고향 출신 청마 유치환의 '수'(首)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하셨다. 아마도 청마가 노래한 '수'(首)의 비적은 바로 그 시절 허형식 장군과 같은 독립전사일 것이다. 그런데도 통영에서는 청마의 친일 행각은 덮은 채 기념사업만 한창이라고 격분했다.

그런 일이 어찌 통영뿐이겠는가. 온 나라에 겨레의 꽃인 무궁화보다 사쿠라꽃이 더 만발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 진짜들은 목이 잘려 짐승의 밥이 된 세상에 가짜들은 비굴하게 살아남아 애국자인 양, 사회 전 분야에 자손대대로 설쳐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위대한 인물의 진가도 까마득히 모른 채, 그저 돼지처럼 콩과 보리도, 똥과 된장도 구별치 못하며, 아니 구별치도 않고, 마구 먹어대며 '꿀 꿀'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역사가 매몰된 세상은 한낱 짐승의 세계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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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흑룡강성 경안현 산골에 외로이 서있는 허형식 기념비. ⓒ 장세윤


#허형식 #파르티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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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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