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파병 사과에 발끈했던 박근혜
아버지 시대 민간인 학살, 과연 사과할까

박 대통령, 호찌민 묘소 헌화 이어 한-베트남 정상회담... 과거사 접근법 주목

등록 2013.09.09 09:00수정 2013.09.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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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국빈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일 오후(현지시각) 하노이 그랜드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한-베트남 경제협력 만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한민국이 월남전에 참전해서 월남인들에게 고통을 줬다는 대통령의 역사 인식은 과연 무엇인가?"

2001년 8월 24일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날이 선 개인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루 전에 있었던 '사건'이 발단이었다. 재임 중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이 이슈로 떠오른 시점에서 나온 김 전 대통령의 사과에 보수층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의 발언에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명시적 표현은 없었지만 메시지의 의미는 분명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공세에는 '박근혜 부총재'가 앞장 섰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뤄졌던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사과한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은) 6·25 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16개국 정상들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서 북한 국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한 것과 같은 엄청난 일"이라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참전용사들의 가슴과 대한민국의 명예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 인식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이토록 손상시켜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이틀 뒤인 8월 26일 다시 기자간담회를 열어 "김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6·25전쟁 때 우리를 도운 16개국도 북한에 사과해야 하느냐"고 재차 공세를 폈다.


DJ 베트남전 파병 사과하자 발끈했던 12년 전 박근혜

역대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시 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과거사 문제는 민감한 이슈였다. 1992년 수교 이후, 1996년 재임 중 베트남을 방문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또 베트남 독립운동을 이끌고 공산당을 창건한 '국부'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도 찾지 않았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사과한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베트남 방문 당시에도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호찌민 묘소도 처음으로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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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해방 50주년 기념일'에 호치민 묘소에 헌화하는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10월 10일 '하노이 해방 50주년 기념일'에 호치민 묘소를 방문해 헌화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당


2004년 베트남을 찾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의 간절히 바란다"며 에둘러 사과했다. 또 호찌민 묘소를 참배하고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호찌민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서 묵념했다.

보수층의 반발을 우려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중간자적 입장을 취했다. 2009년 베트남을 방문한 이 전 대통령은 호찌민 묘소를 찾았지만 과거에 대한 사과는 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한·베트남 정상회담에서 "베트남이 역경을 딛고,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가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만 언급했다. 일부 참모들은 호찌민 묘소 참배마저도 안된다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 직전에는 우리 정부의 국가유공자예우법 개정안에 "세계 평화 유지에 공헌한 월남전 유공자와"라는 문구가 들어가 베트남 정부의 반발을 사는 일도 벌어졌다.

'아버지' 박정희 파병으로 전쟁 치른 나라 방문한 '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우리의 참전용사들이 이역만리 월남땅에서 목숨을 바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반문했던 '박근혜 부총재'는 12년이 흐른 2013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돼 베트남을 찾았다.

7일(현지시각)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49년 전 아버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파병 결정으로 전쟁을 치렀던 땅에서 취임 후 첫 세일즈 외교에 나선다. 양국의 경제협력, 특히 수주액 100억 달러 규모의 베트남 원전 건설 참여를 이끌어 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계획이다.

사실 베트남과 수교 20년이 넘어서면서 양국간 과거사 문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됐다는 인식도 없지 않다. 역대 대통령들의 사과가 있었고 베트남 정부는 1992년 수교 당시 "승전국으로서 사과를 받을 필요는 없다"며 과거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과거 전쟁으로 인한 배상문제도 제외했다.

하지만 베트남전 당시 격전지였던 중부지역 곳곳에는 한국군 증오 위령비들이 남아 있는 등 과거사를 둘러싼 앙금이 깨끗이 치유되지는 않은 상태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파병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주목 받을 수밖에 없다. 아픈 과거사에 대한 박 대통령의 접근법이 중요한 건 그 때문이다.

국빈 방문 일정 이틀째 박 대통령은 베트남을 '사돈의 나라'라고 부르는 등 친근감을 부각시키는 데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8일 양국 주요 정·재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한·베트남 경제협력 만찬간담회에서 "한국은 오래전부터 베트남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주목했고 투자와 협력을 통해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왔다"며 "양국 사이에 태어난 5만 명의 부부는 한국과 베트남을 '사돈의 나라', 가깝고 소중한 가족 같은 관계로 이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 호찌민 묘소 방문... 어떤 메시지 나올까

박 대통령은 9일 첫 일정으로 호찌민 묘소를 찾는다. 베트남전에 파병됐던 31만여 명의 대한민국 군인들이 맞서 싸워야 했던 적군 최고 수장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는 셈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메시지를 내놓을지, 만약 언급한다면 어떤 수위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다만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호찌민 묘소 방문을 첫 베트남 국빈방문의 공식 일정으로 잡은 것 자체가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입장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호찌민 묘소 헌화에 이어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공동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과연 박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의 부정적 유산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까.
#박근혜 #베트남전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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