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올라! 남미 페루 배낭여행7] 페루 쿠스코 여행기

등록 2013.09.11 15:49수정 2013.09.1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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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도심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남아메리카에서 광대한 영역에 걸쳐 세력을 떨쳤던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해발 3399m 지점의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원주민 인디오의 토착 언어인 케추아어로 세계의 중심 즉, 배꼽이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쿠스코는 잉카제국을 대표하는 상징도시다.

쿠스코로 가는 길은 여행자의 시간과 비용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일정이 빠듯하고 비용이 넉넉하면 리마에서 비행기로는 한 시간 정도 걸려서 갈 수 있다. 리마에서 버스를 이용하면 22시간 정도 걸리는데 비용은 비행기보다 저렴하지만, 오랜 승차시간 때문에 몸이 무척 힘들다.


쿠스코는 고산 지대이기 때문에 리마에서 출발하여 버스로 오거나 비행기로 오거나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도착하면 고산병 증세를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은 가벼운 두통과 속이 불편한 증세를 격지만, 체질에 따라서 심한 경우에는 이틀정도 누워있어야 하는 여행자도 있다. 시내의 약국에 가면 고산병을 완화시켜주는 약도 팔고 있으며 심하지 않으면 현지인들이 즐겨 마시는 코카차를 마셔도 증세가 나아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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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시내 솔거리에 있는 잉카황제 파차쿠티 동상.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11세기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쿠스코의 역사는 13세기부터 300여 년간 스페인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잉카 제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잉카제국 시절 쿠스코는 우린과 하난 두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다시 두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렇게 나누어진 4곳의 지명과 위치는 북서, 북동, 남서, 남동 등 방위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도로는 각 지역에서 해당 영역으로 연결되고 있었고 각 지역 지도자들은 영역 내에 집을 짓고 매년 일정 기간 쿠스코에서 살아야 했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는데 쿠스코의 거리와 도시의 형태는 잉카의 신앙에서 성스러운 땅의 동물인 퓨마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한다. 퓨마의 머리 부분은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유사시에는 요새로 사용하였던 사크사우아만 이며 퓨마의 꼬리는 인공수로가 끝나고 두 강이 만나는 지점인 푸마추판이다. 태양 신전 코리칸차는 퓨마의 허리부분이며 제사를 지내던 무언카파타 광장은 퓨마의 심장 위치에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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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시내 중심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퓨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쿠스코 외곽에 있는 사크사우아만 유적지에 가면 거대한 돌로 만든 성벽과 건축물의 흔적을 볼 수 있는데 이들 벽에서는 예외 없이 면도날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는 잉카의 정교한 석벽축조 기술을 만날 수 있다.

쿠스코는 잉카의 왕이었던 파차쿠티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는 쿠스코 제국을 작은 규모의 왕국에서 잉카제국의 원래이름인 거대한 타완팅스유 제국으로 만들었다. 파차쿠티에 의해 잉카제국 번영의 계기가 된 것은 잉카족과 창카 족의 전쟁이었다. 지역적으로 창카 족은 쿠스코 남서쪽의 안다와이러스 지방에 본거지를 두고 페루 중부고원의 아야쿠초 지방까지 광대한 면적을 지배하였던 대부족이었다. 당시 창카족은 소규모 왕국이었던 쿠스코의 잉카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대군을 동원하여 쿠스코로 쳐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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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 축제가 열리고 있는 아르마스 광장.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창카 족의 침입에 당시 잉카의 왕자였던 파차쿠티가 대항하여 창카 족의 침입을 무찌르며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이 싸움의 승리를 바탕으로 쿠스코가 중부 페루고원까지의 넓은 지역 대부분을 그 지배하에 넣을 수 있었다.

이후 잉카제국의 9대 황제가 된 파차쿠티는 제국의 영토 확대와 더불어 신앙의 중심이었던 태양신전을 개축하고 잉카의 종교제도와 각종 의례를 정립하였으며 정치적 통합과 함께 잉카의 정신적 중심이 되기 위하여 쿠스코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동시에 정복지에 관리를 보내서 그 정치조직을 쿠스코의 산하에 놓는 일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대개혁이 단행된 것이 1430년대 말에서 1440년대였다. 그 후로도 파차쿠티의 정복사업은 계속되었는데 남쪽 티티카카 지방의 아이마라 족이 정복되었고 또 페루 고원의 북부까지 잉카의 군대가 쳐들어갔으며 볼리비아의 코차밤바 지방까지 넓혀나갔다

번영하던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건설된 두 개의 강이 마을을 둘러싸듯이 개조되었고 이와 같은 도시 계획은 제국의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며 새로운 도시를 계속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융성하던 제국은 1527년 와이나 카파크 황제의 사후에 잉카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에게 이어졌으나 1533년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에 침략 당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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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외곽의 사크사우아만 유적지.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스페인 정복자들은 1533년 11월 15일 처음 쿠스코에 도착했으며 피사로는 1534년 3월 23일 공식적으로 쿠스코에 입성을 하며 매우 고상하고 위대한 도시 쿠스코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쿠스코에는 스페인의 식민 지배 흔적이 도시의 건축물에 여전히 남아있는데 침략 이후 스페인 침략자들은 수많은 잉카의 건축물, 사원, 궁전을 파괴했다.

그들은 파괴하고 남은 잉카의 돌들을 신도시 건설의 기초로 사용했고 이렇게 스페인 양식의 건축물은 잉카에 의해 만들어진 거대한 돌담 위에 교회, 수도원, 대학, 주교구를 스페인 식으로 건설했다. 스페인은 잉카의 토착 사원을 가톨릭교회와 궁전 그리고 그들의 주택으로 개조했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에 의해 세워진 거대한 바위 위에 건축물을 세워 쿠스코의 건축물은 양 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건축물이 되었다.

스페인의 식민지배 이 후 쿠스코는 안데스 지역에서 스페인 식민지와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식민지의 수도를 리마로 옮기기 전까지 농업, 목축, 광업의 발달과 함께 스페인과 무역을 하면서 번창할 수 있었다.

현재 쿠스코는 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많은 유적들과 인근의 잉카유적들을 여행하는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쿠스코 북쪽의 우루밤바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 그리고 피사크, 유카이, 올란타이탐보 등 많은 잉카시대 유적을 관광하는 거점 도시가 되어 더욱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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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샘이라 불리는 탐보마차이 유적지.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쿠스코의 외곽에는 사크사우아만 요새를 비롯한 많은 석조건축물과 태양신전, 주거지 등을 비롯해서 광대한 잉카 이전시대와 잉카 문명의 유적들이 흩어져있다. 비록 태양 신전은 흔적만 남았지만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영광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해마다 6월이면 사크사우아만을 무대로 열리는 태양제 인티 라이미는 브라질의 리우 카니발, 볼리비아의 오르로 축제와 함께 남미의 3대 축제로 꼽힌다. 쿠스코는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쿠스코에서는 마추픽추 유적지와 티티카카 호수의 도시 푸노 사이에 페루 남부 철도가 달리고 있으며 수도 리마에서 비행기로도 연결되어 있다. 버스도 전국의 대도시 각지에서 운행되고 있지만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특히 우기에는 항공, 철도에 비해 운행 여건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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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시대 농경지와 함께 멀리 유적지가 보인다. (2011년 6월 사진) ⓒ 정광주


덧붙이는 글 여행은 2011년 6월에 다녀왔습니다.
#쿠스코 #잉카 #사크사우아만 #탐보마차이 #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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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또는 슈타인처럼, 여행과 사진 그리고 건축,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의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 수타니파타의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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