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오묘한 빛깔에... 클레오파트라도 옷을 벗었다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18] 새하얀 목화의 성, 파묵칼레

등록 2013.09.25 11:03수정 2013.09.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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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며칠을 보내다 보니 이후로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이대로 유럽으로 계속 나아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아시아로 돌아갈 것인지. 그러다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슨 비명소리처럼 들리던 무슬림들의 기도문 소리가 숙소의 냉장고 소음처럼 익숙해질 무렵, 다시 배낭을 챙겨서 남쪽으로 향했다.

터키를 가보지 않아도 제법 귀에 익숙한 터키의 명소 파묵칼레 인근의 마을 데니즐리(Denizli)까지는 버스로 13시간. 버스에서 밤을 지새는 건 언제나 고된 일이지만 터키의 시외버스는 제법 시설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밤새 지켜보고 있을 수 없는 짐 분실에 대한 고민을 덜 해도 된다는 것은 터키여행의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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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버스에서 맞는 아침 해 ⓒ 김동주


아직 여름이나 다를 바 없는 9월의 터키에선 제법 일찍 아침이 왔다. 오전 7시가 막 되었을 무렵 유난히 눈부신 태양빛에 눈을 떴고 부산히 짐을 돌보는 사람들을 따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터미널에 길게 늘어서 있는 파묵칼레로 가는 돌무시(Dolmus, 미니버스)에 곧바로 몸을 실었다.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여명을 뚫고 달리는 돌무시속에서 내내 생각에 빠졌다. 분명히 하얀색 석회암 지대라고 들었는데, 대체 이 황무지들 틈 어디에 그런 거대한 석회암 지대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불과 몇 십분이 지나지 않아 언덕을 넘고 나니 거짓말처럼 눈앞에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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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목화의 성, 파묵칼레 ⓒ 김동주


언덕 아래에 잘 꾸며진 공원과 수영장 때문에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파묵칼레는 정말 거짓말처럼 하얬다. 표면에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눈조차 뜰 수 없었던 나는 재빨리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하얀 성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고 그들은 마치 오래 전 순례길을 걷는 수도승처럼 길고 하얀 길을 따라 나란히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Pamukkale)는 누가 지었는지 참 멋진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면 눈 덮인 언덕에 고드름이 잔뜩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를 그저 '스노 캐슬' 정도의 이름으로 불렀다면 세계 곳곳에 흔한 멋진 설경 정도의 느낌이 났을 테니 말이다.

언덕을 오르는 입구에 접어들었다. 목화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달리 이 거대한 성은 석회질이 굳어 단단해진 암석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층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틈을 뚫고 계단을 형성해 그 사이로 옥빛의 온천수가 흐르는데 층이 넓은 곳에는 제법 많은 물이 고여 어쩐지 그 모습이 하늘을 그대로 담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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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묵칼레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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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위에 고드름이 매달린 것 같은 풍경 ⓒ 김동주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내려왔는지 알 수 없지만 흐르는 물이 굳어 성을 이룰 정도니 아마 우리가 셀 수 없는 까마득한 시간일 것이다. 그 긴 세월을 흐르고도 여전히 마르지 않고 샘 솟는 온천수라니 역시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하얀 석회암만으로도 독특한 풍경이었지만 마치 우리네 계단식 논처럼 끝없이 형성된, 석회층 곳곳에 고여 있는 푸른 온천수도 신기했다. 햇빛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던 그 물을 몇 번이나 손으로 떠봤지만 역시 티없이 맑았다. 맑은 물은 이 석회층에 고여 빛을 받으면 청아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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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석회층에 가득 담긴 에메랄드 빛 온천수 ⓒ 김동주


처음에는 이 아름다운 자연유산에 함부로 몸을 담그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오묘한 빛깔을 계속 보고 있자니 무엇에 홀린 듯이 옷을 벗고 빠져들게 되었다. 마치 이 곳에 몸을 담그고 나면 아킬레스처럼 죽지 않는 불사신이 될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몸을 담그고 이 천혜의 자연을 즐긴다.

'목욕'에 대해 둘째라면 서러워 했을 로마인들이 이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언덕을 따라 석회층을 계속 오르다 보면 꼭대기에는 진짜 수영장이 있다. 석회층에서는 잠시 발을 담그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꼭대기 유적에 오르니 사람들은 로마인들이 남기고 간 유적에서 진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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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유적지에서 즐기는 특별한 수영 ⓒ 김동주


사람들이 수영복을 챙겨오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던 거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어 적당히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는데 수영장 바닥 곳곳에는 이제는 익숙하기까지한 로마의 유적들이 아무렇게나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로마인들은 이곳에 건물을 짓고 아름다운 파묵칼레에서 망중한을 즐기고자 했을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볼수록 아름다우니까.

세월이 흘러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건물은 파괴되고 그 잔해만이 남았지만 여전히 온천수는 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이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가 이곳을 찾았다는 설이 있다고 하니 로마인들이 사랑한 곳은 어디든 멋진 곳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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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파묵칼레 ⓒ 김동주


부서진 신전 기둥 사이에서의 수영을 끝내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파묵칼레의 물은 더욱더 푸르렀다. 아름다운 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는 클레오파트라라면 분명 여기서 이 광경을 지켜봤을 것이다. 아무리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고 하지만 세계 어떤 곳에 이토록 푸르고 하얀 온천지대가 또 있을까.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

수영장 아래에 잠들어 있는 이름 모를 신전의 기둥들은 이곳을 스쳐간 긴 역사 속에선 고작 한 줄 정도에 불과했다. 수영장을 빠져나와 언덕 위를 걸으면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를 만날 수 있다. 새하얀 목화의 성 위에 세워진 도시. 아름다운 곳이라면 무조건 발자취를 남기고자 했던 로마인들은 기원전 130년에 이곳을 정복하고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를 지었다.

이곳 파묵칼레의 온천수가 병을 치유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수많은 로마 귀족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설령 그런 소문이 없었다고 한들 이곳을 본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아름다움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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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도시 라는 뜻의 히에라폴리스 ⓒ 김동주


높은 곳에 위치했던 탓에 지진에 버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된 히에라폴리스지만 당시에는 인구 8만 명의 대도시였다고 한다. 덕분에 이 오래된 유적을 걸어서 둘러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유적들 가운데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로마식 대형 야외극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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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라폴리스의 로마식 대극장 ⓒ 김동주


오늘날의 공연장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야외극장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했을까. 로마 시대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기에 휩싸인 싸움터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저무는 노을 빛을 보며 그저 만담을 나누는 곳이었을까. 어쩌면 그 당시의 귀족들을 위해 매일매일 축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뜨겁게 달궈진 대리석 위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아무리 그래도 피와 살이 튀는 경기장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고개만 돌리면 들어오는 새하얗고 푸른 빛깔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나와는 상관도 없는 역사의 흔적이지만 여기저기에 아름다운 사연들이 얽혀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히에라폴리스는 어쩐지 그랬으면 하는 느낌이 드는 도시다.

야외극장 외에도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공동묘지 등의 잔해가 남아있었는데 도시 안에 묘지를 만드는 것이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나 보다. 얼핏 보면 경주에 있는 크기가 작은 석릉과 비슷해 보이는 히에라폴리스의 공동묘지에는 무려 1000여 개의 석관묘가 늘어서 있다. 게다가 공동묘지 바로 옆에는 목욕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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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히에라폴리스에 남아있는 흔적들 ⓒ 김동주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긴 길을 걷다 보니 화려하고 찬란했을 옛 도시의 쇠락한 모습에 괜히 쓸쓸해졌다. 엄청났을 지진이 오기 전까지 이곳은 분명히 낙원과도 같은 도시였을 것이다. 자연이 만든 위대한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가 자연의 오묘함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니, 그들은 이것이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폼페이가 그러했듯이.

히에라폴리스를 모두 돌아보고 나니 서서히 태양이 내려앉으면서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하나 둘, 다시 하얀 구릉을 따라 긴 행렬을 만들고 몇몇 아이들은 짐짓 아쉬운 듯 자꾸만 해가 지는 방향을 바라보곤 한다. 몇몇은 그 자리에 남아 석양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 문이 닫히고 태양 빛이 붉어지자 이에 질세라 새하얗던 목화의 성은 붉은 빛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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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물들어 가는 파묵칼레 ⓒ 김동주


순백의 목화성 너머로 해가 진다. 히에라폴리스의 쓸쓸함을 견디며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새하얀 줄만 알았던 파묵칼레는 태양을 따라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언제 푸르렀냐는 듯이.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씩 자리를 잡고 저무는 해를 감상한다. 은은한 온천수에 등을 기대고 멍하니 바라보는 석양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 자연스레 여러가지 욕심들이 생겨난다. 이 풍경을 나만 보고 싶은 욕심, 언제까지나 이 자리에서 머물고 싶은 욕심.

돌아갈 버스 시간 때문에 내려가야 했지만 완전히 해가 지고 난 후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어떻게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기도 했지만 나와 같은 욕심을 가진 누군가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기로 했다. 세상에 둘도 없을 그 아름다운 석양을 뒤로하고 서둘러 붉게 물든 목화의 성을 내려와 막 시동을 거는 버스에 올랐다. 다시 간다면 그때는 꼭 별빛을 담은 파묵칼레의 모습을 보리라 다짐하면서.

간략여행정보
이스탄불에서 파묵칼레를 보기 위해서는 데니즐리로 가야 한다. 버스로 13시간, 항공으로 80분 정도 소요되고 미리 조사하면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의 항공권을 찾을 수도 있지만 터키의 버스는 제법 시설이 좋기 때문에 야간에 버스를 타고 아침 일찍 데니즐리에 도착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데니즐리의 버스터미널과 공항에서는 파묵칼레행 미니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기 때문에 아침부터 바로 투어에 나설 수 있으며 호스텔과 호텔 등은 파묵칼레 마을에 모여 있다.

유난히 하얀 파묵칼레는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뜨기도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선글라스를 착용해야 하며 꼭대기 수영장을 즐기고자 한다면 수영복을 별도로 챙기는 것이 좋다. 석회암 위는 항상 물기가 있어 미끄럽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맨발로 다닌다. 파묵칼레에 들어서고 나면 석회층을 지나 히에라폴리스를 먼저 관람한 후 꼭대기 수영장에서 피로를 풀자.

파묵칼레와 히에라폴리스의 통합입장료는 20리라(한화 1만원 정도, 2012년 9월기준)

#파묵칼레 #목화의성 #히에라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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