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만나는 다산 정약용, 참 쉽네요

[서평] 개정증보판 <다산시선>

등록 2013.09.30 14:33수정 2013.09.3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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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시선>┃지은이 정약용┃옮긴이 송재소┃펴낸곳 (주)창비┃2013.09.16┃3만 원 ⓒ (주)창비

많고 많은 저 백성들
모두 같은 나라 사람

마땅히 세금을 거둬야 한다면
부자들에게나 거둘 일이지


어찌하여 힘없는 백성들께만
가혹한 정사가 베풀어지나

군보(軍保)란 이름이 무엇이길래
이다지 모질게도 법률을 만들었나

일년 내내 힘들여 일을 해봐도
제 몸 하나도 가릴 수 없고

어린아이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어서 먼지 되고 티끌 되어도

아직도 그 몸에 요역(徭役)이 따라
가을 하늘 곳곳마다 울부짖는 소리


원통하고 혹독해 절양(絶陽)에까지 이르니
참으로 슬프고 쓰라린 일이로다 -<다산시선> 373쪽, '여름날 술을 마시며' 중에서-

증보판으로 다시 펴낸 <다산시선>

<다산시선>(정약용 지음, 송재소 옮김, ㈜창비 펴냄) 중 '여름날 술을 마시며' 일부입니다. 다산이 생존하던 조선시대나 2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세금정책에 대한 우려는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부자감세 정책을 편 직전의 MB 정권, 그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현 정권의 납세정책을 200년쯤이나 앞서서 힐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몇 마디의 말에 분노와 우려가 다 들어 있습니다.

시는 '촌철살인'이고 '해학'이고 '풍자'입니다. 의미는 달이고 뜻은 우려낸 표현의 진액입니다. 시어는 비만 오면 넘쳐나는 건수처럼 흥청망청 넘실대지 않습니다. 넘치지도 않는 샘물처럼 절제되고 마르지도 않는 옹달샘처럼 끊임이 없습니다. 신세타령을 하듯이 주저리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촌철살인 같은 뜻은 다 머금고, 풍자하는 뜻은 다 드러내는 게 '시어'입니다.

1981년에 초판으로 출간된 <다산시선>이 다산 탄신 250주년(2012년) 사업의 일환으로 증보 개편되어 ㈜창비에서 이번에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책에서는 2500여 수에 달하는 다산의 시 중에서 <다산시선> 초판에 실렸던 129수 외에 50여 편의 시를 새로 번역해 실어 다산의 시를 보다 풍요롭게 감상 할 수 있도록 엮었습니다.

한자 원문과 한글 번역, 세세한 주석과 해제까지 덧대어 있어 시를 읽고 새기다 보면 시나브로 다산의 일생을 읽게 되고, 다산이 시에 담고자 했던 의미까지를 새기게 됩니다.  

<다산시선>은 다산의 생애에 따라 크게 수학시절(1762~89), 벼슬살이 시절(1789~1800), 유배시절(1801~18), 유배 이후 시절(1818~36)로 분류해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산이 평생을 살면서 보고, 느끼고, 부닥뜨린 상황이나 경험은 물론 시대적 회한까지를 축약하고 농축해서 담고 있는 시들입니다.

남산골 한 늙은이 고양이를 길렀더니
해묵고 꾀 들어 요망하기 여유로세

밤마다 초당에서 고기 뒤져 훔쳐 먹고
항아리며 단지며 술병까지 뒤져 엎네

어둠타고 교활한 짓 제멋대로 다 하다가
문 열고 소리치면 그림자도 안 보이나

등불 켜고 비춰 보면 더러운 자국 널려 있고
이빨자국 나 있는 찌꺼기만 낭자하네. -<다산시선> 449쪽 '고양이' 중에서-

조선시대를 읽고 다산을 배워가는 징검다리

다산의 시는 매우 사실적이고 쉽습니다. 애매하게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정물화를 그리듯이 표현하였고, 민심으로 공감하거나 느껴야 할 것들은 산수화를 감상하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읊은 시에서는 자연의 풍요로움이 물씬 느껴지고, 한가한 풍경을 읊은 시에서는 더없는 한가로움이 넘실댑니다.

사회적 병폐를 지적하는 시어는 날카롭고, 관리들의 횡포를 고발하는 시어는 처절하리만큼 투쟁적입니다. 무능한 선비들은 '오징어'에 빗대어 조롱하고, 부패한 관리들은 쥐와 고양이로 고발합니다.

다산의 시를 읽다보면 조선시대를 살던 사람들 모습이 저절로 그려집니다. 한숨소리도 들리고 자책하는 선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권세가들의 모습도 보이고, 도도히 흐르던 시대적 변화도 문살에 비친 그림자처럼 어른댑니다. 참으로 격정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서사적이면서도 정물화처럼 분명한 시들입니다. 어떤 시를 볼 때는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고, 어떤 시를 볼 때는 몽유도라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또한 책 말미에 '다산시의 이해'와 '연보'가 추가돼 있어 시를 읽으면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시감까지도 놓치지 않고 새길 수 있습니다. 

퇴계학연구원 원장이자 다산학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송재소 원장이 옮겨 ㈜창비에서 펴낸 <다산시선>은 다산이 살던 조선시대를 뒤돌아보는 타임머신이 될 것입니다. 다산이 살던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민심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되는 것은 물론, 다산을 알고 다산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건너야 할 징검다리로 놓일 좋은 초석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덧붙이는 글 <다산시선>┃지은이 정약용┃옮긴이 송재소┃펴낸곳 (주)창비┃2013.09.16┃3만 원

다산시선

정약용 지음, 송재소 옮김,
창비, 2013


#다산시선 #정약용 #(주)창비 #송재소 #목민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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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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