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메, 에로 선시에 얼굴 붉어지겠네

[서평] 선으로 낳은 시, 시로 버무린 선 <선시>

등록 2013.10.18 17:58수정 2013.10.1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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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에 담긴 몇 구의 선시는 오르가즘을 넘나드는 에로의 극치입니다. ⓒ 임윤수


미인과의 정사 속에 애액(愛液) 넘치나니
누자노선이 누 위에서 신음하네
그대 안고 빨고 핥는 이 흥취여
확탕지옥인들 어떠리, 무간 지옥인들 어떠리.
- <선시> 519쪽, 잇큐 소준의 시 '음방에서'-

읽던 선시(禪詩) 중 한 수 옮겨 봤습니다. 누자노선(樓子老禪, 사창가(靑樓)에서 노는 늙은 선승)이 한 여자와 질펀하게 정사를 치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야하고 노골적이어서 조금은 민망해지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표현이라서 차라리 신선합니다. 헤아리며 읊어도 미처 새기지 못할, 깊고 오묘한 뜻이 담겼겠지만 <선시>에 담긴 몇 구의 선시는 오르가즘을 넘나드는 에로의 극치입니다.


위 글이 사실은 일본 불교사에서 아주 유명한 선승이 남긴 선시입니다. 이런 음란한 말이나 지껄이는 인간이 무슨 선승이고, 음담패설보다도 더한 말들을 갈겨쓴 글이 무슨 선시냐고 반문할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경허 스님 일화와 일본인 선승 잇큐 소준이 읊은 '진짜 스승'

어떤 스님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 여자를 방으로 들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방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날부터는 밥도 방으로 가져다 달래서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님이 여자를 방에까지 들여 함께 살고 있다고 수군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찧는 입방아를 견딜 수 없었던 제자 스님 중 한 분이 큰 스님 방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가린 얼굴을 숙이고 방 한쪽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여자가 제자 스님의 닦달을 피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여자의 얼굴을 본 스님은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여자의 얼굴은 온통 부스럼투성이였고 고름조차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코는 일그러져있고 누더기로 감싼 손가락들도 뭉그러져있었습니다.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큰스님이 방으로 들여서 보살피고 있었던 사람은 입방아를 찧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 갈 곳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님은 단지 병들고 아픈 사람을 자비심으로 보살피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 이불 속에 눕혀놓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운우지정을 나누는 상상까지 덧씌워 찧고 까부르고 있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는 경허 스님을 따라다니는 일화 중 일부입니다. 이때, 경허 스님께서 400 여년쯤 먼저 살다간 일본인 승려 잇큐 소준(1394~1481)이 남긴 아래의 선시, '진짜스승'을 알았다면 읊고 또 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으로는 진리를 지껄여대는 이 속임수여
권력자 앞에서는 연신 굽신거리네
이 막된 세상에서 진짜 스승은
금란가사를 입고 앉아 있는 음방의 미인들이네
- <선시> 529쪽, 잇큐 소준의 시 '진짜스승'-

입으로는 불법(佛法)과 진리를 말하지만 실상은 권력에 굽실거리고 오욕칠정에 쪄들어 살고 있는 사람(스님)들보다는 차라리 옷 곱게 차려입고 몸 팔며 솔직하게 살고 있는 창녀들 삶이 더 진솔하다는 걸 역설하는 시라 생각됩니다. 

파계승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잇큐 소준은 스승이 깨달았음을 인정해 내리는 전법게傳法揭) 조차도 받는 순간 그 자리에서 불 속에 집어던질 정도로 어떤 권위에도 걸림 없이 살아가던 선승입니다.

500여 수의 선시로 엮은 선시집 <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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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지은이 석지현┃펴낸곳 (주)현암사┃2013.09.13┃2만 3000원 ⓒ 임윤수

<선시>(지은이 석지현, 펴낸곳 (주)현암사)는 1990년 이후 다시 비승비속(非僧非俗) 산인(散人)으로 돌아와 현재는 나도산 아래 반산초당(半山草堂)에서 정진하고 있는 지현스님이 38년 전인 1975년 4월에 500여 수의 선시를 엮어 초판으로 냈던 <선시> 중에서 삭제, 수정, 보완을 거쳐서 다시 펴낸 선시 모음집입니다. 

책에서는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하는 선승들은 물론 중국과 일본 선승들이 읊은 선시, 중국 문호 소동파, 이백, 한국의 율곡 이이와 최치원, 추사 김정희 같은 문인들이 읊은 시도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한자로 된 원문 선시에는 한글 음과 주석을 덧대어 놓고, 한글세대들이 새길 수 있도록 뜻까지 해설로 풀어놨습니다.

책에서는 중국 선시와 한국 선시, 일본 선시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간략하게나마 선시를 읊은 작가들의 일대기까지를 소개하고 있어 시구(詩句)에 담긴 큰 뜻을 작가의 입장에서 헤아려 볼 수 있는 토대도 깔려 있습니다.

선시는 선승들이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한 선(禪), 깨달음의 경지를 시(詩)라고 하는 그릇에 담아 낸 깨달음 표현의 결정체입니다. 남성 같은 선이 여성 같은 시를 만나서 탄생되는 깨달음 표현의 옥동자입니다. 

책에서는 500여 수의 시를 시상이 서로 닮은 시들끼리 분류해 1. 靜정적·산집 고요한 밥), 2. 悲비애·저 누가 옥피리를 부는가), 3. 無무상·표표히 날아가는 기러기), 4. 餘여백·산비 그윽한 곳), 5. 愚바보·멍청이의 노래, 6. 默침묵·번뇌의 바다에서 노 젓는 사공, 7. 山산정· 안개여울이 아득히 길을 놓친 해, 8. 淸청빈·눈보라 창을 치는 소리, 9. 月달빛·계수나무 천년의 혼이, 10. 春봄날·꿈속에서, 11. 脫탈속·대숲에 홀로 앉아, 12. 一한 줄 선시·꿈은 마른 들녘에 해매네, 13. 轉전환·두 눈썹 치켜들고, 14. 秘격외·그림자 없는 나무, 15. 歸귀향·소 찾는 노래, 16. 讚향가·바람결 노래, 17. 愛에로틱 선시·눈먼 미인 가마타고,18.覺깨우침·깨달음의 노래로 무리지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일 없는 것이 오히려 일이니
문고리 걸고 낮잠에 드네
깊은 산 새가 나 홀로인 줄 알았는지
그림자에 그림자가 겹치며 창 앞을 지나가네
- <선시> 247쪽, 경허 시 '일 없는 것이'-

500여 수의 선시 중에는 경허 스님이 지은 선시도 12편이나 포함돼 있고, 매월당 김시습이 읊은 선시도 17수나 들어 있습니다. 최치원의 지은 시도 들어있고, 추사 김정희가 읊었던 시도 들어있고, 17장, '愛에로틱 선시·눈먼 미인 가마타고'에 실린 17수의 시는 모두가 잇큐 소준이 읊은 선시입니다.

어떤 선시에서는 절집 처마 끝에서 울리는 풍경소리가 들려오고, 어떤 선시에서는 면벽 수행 중인 선승의 모습이 그려지고, 어떤 선시에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연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젊은 출가자의 한숨소리가 배어 나오고, 어떤 선시에서는 확철대오의 순간에나 느꼈을 법한 돈오의 희열이 담겼습니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어 고함을 지르고 몽둥이를 휘둘러 대는 미치광이 같은 짓으로 표현하던 게 불립문자의 '선'입니다. 이러한 선이 짧지만 길고, 간단하지만 깊은 시구에 담겨 우러나고 또 우러나오니 <선시>에 담긴 한 수 한 수의 선시를 읽는 즐거움이야말로 오르가즘을 넘나드는 오묘한 희열이며 깨달음을 곁눈질해 보는 선수행의 순간이 되리라 기대됩니다.
덧붙이는 글 <선시>┃지은이 석지현┃펴낸곳 (주)현암사┃2013.09.13┃2만 3000원

선시 - 禪詩, 깨달음을 노래한 명상의 시, 개정신판

석지현 엮음,
현암사, 2013


#선시 #석지현 #(주)현암사 #경허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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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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