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질 뻔한 너와가 '미인도'로 되살아나다니...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윤석남전, 학고재 본관에서 11월 24일까지

등록 2013.11.01 15:00수정 2013.11.01 15:54
1
원고료로 응원
a

'윤석남전'이 열리는 학고재갤러리 입구 왼쪽 벽에 걸린 대형전시포스터. ⓒ 김형순


'윤석남(1939-)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학고재 본관에서 오는 11월 24일까지 열린다. 윤석남은 한국페미니즘 미술 1세대로 그 분야에서 '대모'다. 하지만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그런 꼬리표를 떼고 그냥 작가로 불리길 원한다. 전시 제목이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인데 그 뒤에 '나는 윤석남입니다'라는 말이 생략된 거다.

그는 페미니즘이 한물갔는지 안 갔는지 관심이 없다. 100년 후엔 그런 게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그냥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보니 페미니즘이 된 것이지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고 그런 면에서 대모라는 말이 그에겐 부당하고 어울리지 않는 옷이란다.


잠시 영문학도였던 그는 늦깎이 마흔에 미술계에 입문했다. 그래서인지 특정한 미술사조에 위치하기 어렵다. 살풀이 같은 그의 전시는 관객도 참여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런 요소가 전시장에 현장감과 생동감을 준다.

하찮은 일상에서 시작하는 그의 예술

a

'너와' 시리즈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윤석남 작가. ⓒ 김형순


윤석남 작가가 예술을 접하는 첫 통로는 '서예'였다. 1975년부터 박두진 시인에게 4년간 하루 4시간씩 사사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유려한 그의 선묘가 여기서 연유한 것인가. 그는 10살 때부터 미술가가 되려 했으나 6·25가 터지는 바람에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났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또 한 번 그 꿈이 날아갔다.

예술은 학문이 아니기에 생활에서 온다고 작가는 믿는다. 일상에서 흔히 보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 눈독을 들인다. 이런 경향은 주변에 존재감 없는 전구나 색종이, 나무토막이나 빨래건조대 등으로 작품을 하는 양혜규 작가를 연상시킨다.

윤석남 예술은 삶을 분열시키는 장벽을 넘는 데 있다. 1997년에 창간된 페미니즘잡지 <IF(이프)>에 발행인으로도 참가했는데 그 표어가 "개인과 사회, 남성과 여성, 정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는다"다. 이게 바로 그의 철학이리라. 그런 분리와 분열이 결국 차별과 소외를 낳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과포장된 허상을 깨며 제대로 된 여성과 모성을 탐구하려 한다. 여성의 신체를 부수고 자르는 해체작업을 통해 고단한 한국여성사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려 했다. 옛 여인들이 멸시와 천대, 규제와 억압 속에서도 어떻게 가정과 나라를 지켜왔는지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경험한 바를 예술화한다.

너와 널판에 그린 '한국미인도'

a

윤석남 I '너와 31_봄, 봄, 봄'(왼쪽)', '너와 25_우연이 아닙니다. 필연입니다' 복합매체 2013. 나무의 표정에 사람의 얼굴을 담아 독창적 초상화를 연출하다 ⓒ 김형순


윤석남 작가는 그동안 나무와 빨래판을 재료로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에 운 좋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작가의 지인 중 한 분이 80년대 초 강원도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너와'를 걷어내는 걸 보고 그걸 서울로 가져와 30년 창고에 보관해왔다. 그런데 물건엔 주인이 있다고 작년 봄에 윤 작가와 인연이 닿아 그걸 기증하게 된다.

그는 폐기될 뻔한 너와 널판이라는 나뭇결에 '미인도'를 그렸다. 소나무로 만든 너와 자체도 나이테가 있고 거기다 지붕으로 20년, 창고에서 묵힌 것 30년 합치면 50년이 지났으니 그 자체가 세월이 낳은 작품인데 거기에 예술의 옷을 입힌 셈이다.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우아하고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다.

a

윤석남 I '너와 12_시선을 따라서'(맨 왼쪽), '너와 20_연두색은 슬프다', '너와 36_욕망은 아름답다' 2013 ⓒ 김형순


독특한 나무질감에 그려진 한국여성은 가녀린 몸매에 목을 쭉 내민 모습,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한 모습, 수줍게 웃는 모습 등 다양하다. 무엇보다 절제된 품위가 있다. 얼굴에 드리운 실루엣 또한 신령하다. 그 중엔 '허난설헌'도, '매창'도 숨어있는 것 같다. 아크릴물감으로 그렸으나 동양 붓을 사용한 탓인지 자연스럽고 정겹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 '그린 룸'

a

윤석남 I '그린 룸' 복합매체 가변설치 2013. 취재기자들에게 최신작 '그린 룸'에 대해서 설명하는 윤석남 작가 ⓒ 김형순


영국의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은 자신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가. 윤석남은 그동안 '핑크', '블루', '화이트' 등 색조를 주제로 '룸' 시리즈를 발표해왔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그린 룸'이다 이 작품은 작가는 스케치로, 딸은 오려 붙이기로 협업한 것이라 더욱 빛난다.

이 방은 격자형으로 안쪽 전시장 삼면 벽에 가로세로 30cm의 녹색한지를 900여점 오려 퍼즐처럼 오려 붙였다. 문양은 꽃, 나무, 곤충, 부엉이 등 다양하다. 전시장 바닥에는 초록빛 영롱한 유리구슬이 깔려 있고 거울과 함께 세팅이 돼 있다. 우리 마음을 치유해 주는 가상 숲 같기도 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궁 같기도 하다.

그런데 '룸' 시리즈에 구슬이 있는 건 여성적 관점이 담겨 있다. 구슬은 누구나 밟으면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한국여성이 스스로 서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데 두려움이 많음을 뜻한다. 그래서 '세계경제포럼'에서 10월 24일 발표한 올 한국여성 세계 성평등지수가 아랍권 수준(136국가 중 111위)인가.

윤석남의 유명 작 '핑크 룸'을 보면 한 구석 의자 위에 뾰족한 가시바늘이 튀어나와 섬뜩하다. 한국여성이 걸어온 가시밭길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린 룸'은 그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작가도 나이 탓인지 "섣불리 재단하거나 인위적인 강제보단 포용하는 게 더 큰 힘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단다.

어머니를 위로하는 '화이트 룸'

a

윤석남 I '화이트 룸_어머니의 뜰' 복합매체 가변크기 2013 ⓒ 김형순


그리고 전시장 입구에선 '화이트 룸_어머니의 뜰'도 볼 수 있다. 그 주제가 어머니를 위로하는 공간이다. 하얀색은 죽은 자의 영혼을 애도하는 뜻이 있다. 여기선 또한 인간의 본능마저 억제하며 살았던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을 추모하는 색이다.

그의 어머니가 어땠기에 작가는 어머니를 신주 단지처럼 모실까. 먼저 작가의 가족사를 보면 쉽게 이해된다. 그의 페미니즘은 여기서 왔다. 그의 아버지 '윤백남(1888-1954)'은 한국 최초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였고, 서라벌예대(현 중앙대) 학장에다 한국 최초의 예술원회원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존경했단다.

그의 아버지는 첫 아내와 별거 중에 하숙하던 집 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19살과 45살로 무려 26살의 나이 차가 난다. 효제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어머니는 문학을 좋아해 당시 유명인사인 아버지를 영웅처럼 떠받들었고, 결국 두 사람은 마음이 통해 멀리 만주 봉천으로 이주한다. 윤석남 작가도 바로 거기서 태어났다.

a

윤석남 I '어머니 II_딸과 아들' 나무에 아크릴물감 파스텔 170×180cm 199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오른쪽 딸이 바로 윤석남 작가이다. 사진 윤석남 홈페이지 ⓒ 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1954년 윤 작가 어머니가 39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3년간 병치레를 하다 6자매(원래 7자매 둘째 딸 일찍 죽다)를 남기고 돌아가신다. 그동안 병고로 재산을 다 날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는 자식교육을 위해 '행상' 등 안 한 일이 없었고, 살기 위해 정부에서 무상으로 불하받은 30평 땅에 조카와 함께 흙집도 짓기도 했다.

첫째 언니는 이대 영문과, 윤 작가는 성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남동생 공부시킨다고 학업을 중단하고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하는 게 부끄럽지 가난한 게 부끄럽지 않은 시절, 작가는 학교에 도시락을 못 싸가도 비관한 적은 전혀 없었단다.

그건 바로 어머니의 낙관적 인생관에서 온 것이다. 윤 작가가 고등학교를 포기하려 할 때도 끝까지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고, 이런 어머니를 딸이 존경하는 것과 또한 이런 어머니가 윤 작가 작품 속 주인공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윤석남은 어떻게 미술가가 되었나

a

윤석남 I '창문에서' 나무창문 안에 오브제 95×89×40cm 1993. 윤 작가는 1992년까진 어머니만 그렸지만 1993년부턴 자신을 그리기 시작한다. 사진 윤석남 홈페이지 ⓒ 윤석남


윤석남은 어떻게 미술가가 되었나. 28살에 결혼해 엄마, 아내가 되어 가사에 충실하다가 36살부터 미술을 못해 우울증이 심해져 남편을 설득한다. 생활비를 몽땅 들여 화구를 사 마흔부터 그림을 그렸고 남편은 처음엔 취미로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윤 작가는 3년간 죽으라고 작업만 해 '문예진흥원(현 아르코)'에서 운 좋게 첫 전시를 연다.

그리고 1983~1984년에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와 '아트 스튜던트리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거기서 '루이스 부르주아' 등 서양페미니즘 대가의 작품도 접하고 큰 감명을 받는다. 귀국 후 10년간 어머니만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시를 하다가 드디어 1993년부터는 자신의 독립된 삶 이야기를 작업에 주제로 삼는다.

서구미술도 이렇게 접했지만, 그는 작가로서 중심에 두는 여성의 원형은 바로 최초의 무당인 '바리데기(바리공주)'다. 바리데기는 어려서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으나 후에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준 인류구원의 상징이다. 죽은 영혼도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죽어가는 것도 다시 살려내는 여성적 삶이 바로 윤석남 예술의 핵심이다.

약해 보이나 강한 '붓의 힘'을 믿다

a

윤석남 I '너와 25_우연이 아니라 필연입니다'(맨 왼쪽), '너와 3_미소', '너와 43_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너와 41_7월 오후 4시' 복합매체 2013. 유연한 선묘에서 붓의 힘이 느껴진다 ⓒ 김형순


작가는 2008년 모 일간지에서 '이애신'이라는 할머니가 길에 버려진 1025명의 개를 돌본다는 뉴스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에 화답하듯 나무로 1025개 '유기견'을 5년간에 걸려 작업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을 고발한 작품으로 바리데기 설화에서 보여준 '보살핌'과 '자애'라는 여성적 가치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번 '미인도'도 그런 철학을 바탕에 두고 있다. 어찌 보면 작가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몇 번의 붓질로도 이목구비에 입체감이 나고 인물의 표정이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그게 바로 '붓의 힘'이란다. 약해 보이나 칼보다 강한 붓의 힘, 이게 바로 여성의 힘, 약자의 힘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배척당하고 소외당한 사람이 더 넓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강하고 더 행동적일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몸으로 때운다"는 말도 있지만, 작가는 창작에서 재주보단 건강을 더 중시한다. 머리보다는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작업을 하다 보면 눈물겨운 감동과 전율의 순간이 온단다.

최근 서울을 다녀간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A. Badiou)'도 결국에는 약한 게 강한 걸 이긴다는 철학을 설파했고, 미국의 사회학자 그라노베터(M. Granovetter)는 '약한 연결망의 강함(The Strength of Weak Ties)'이라는 소통이론으로 유명해졌는데 윤석남의 생각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덧붙이는 글 학고재 홈페이지 (http://hakgojae.com/2009/index.html)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전화 02)739-4937 입장무료. 윤석남 홈페이지 http://yunsuknam.com/
#윤석남 #페미니즘 #너와널판그림 #'그린 룸' #양혜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