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겨레의 혼을 지켜주십시오

재일본 동포 시지 <종소리> 제56호를 읽고

등록 2013.11.06 10:36수정 2013.11.0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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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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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제56호 ⓒ <종소리> 시인회

벌써 10년째 도쿄에 사는 <종소리> 시인회에서 철마다 주옥같은 시를 엮어 대한해협을 건너 고국에 사는 나에게 시집를 보내주고 있다. 먼저 반가운 마음에 시집을 펼치자 올해 아흔 둘이신 정화흠 선생님의 옥음이 들려온다.

장관님에게

            정화흠

장관님!
경상도 시골에 사는
동생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당신이 관할하는
영사관으로 달려갔댔습니다

궁박한 사정은 들은 둥 만 둥
외국인등록증을 본
이마가 반쯤 벗어진 중년사내가
피시시 웃으면서
국적이 조선이기 때문에
사증을 낼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요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일본 국적이면 어떤가고
그랬더니 대답이 걸작이 아닙니까
일본 국적 같으면 환대한다고

여보소 장관님!
도대체 이런 일이 어데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의 피땀으로 비대해진
일본인은 환대하고
피를 나눈 한민족에게는 담을 쌓은
이거, 주객전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도 억울해서
그날 나는요
돌아오는 전차 간에서
나이도 부끄럼도 잊어먹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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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흠 선생(1923년 경북 영일 출생) ⓒ 박도

들어보소 장관님!
내가 가진 국적 <조선>은요
이북의 국적도 아니고
이남의 국적도 아니라오

나의 국적 조선은
<단군민족>의 표증이고
또 하나는요
칠천만 민족이 바라는
통일조국의 국적이랍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이런 지당한 국적이
왜 통하지 않는지요
대답을 주세요. 현명하신 장관님!

말은 곧 혼이다

내 양심으로는 뭐라고 답을 할 수 없는 노시인의 울부짖음이시다. 최근 나는 이런저런 일로 해외나들이를 하는 동안, 뜻밖에도 먼 이국땅에서 우리 문화의 원형을 발견하고 감동한 적이 많았다. 중국 헤이룽장성 한 마을에서 우리말과 민속놀이의 원형을 보고, 일본 도쿄의 거리에서 한복의 행렬을 보고, 엘에이 거리에서 사물놀이 행렬을 보았다. 지구촌 곳곳에 그래도 우리 민족혼이 잠복함을 확인하고 매우 흐뭇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 땅에서는 사대 광풍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그동안 일부 사대주의자에 국한된 이 열풍이 이제는 도시농촌, 계층 간의 구분도 없이 몰아쳐 초등학교에서조차 원어민 교사들이 활개를 치고, 아니 유아원까지 영어 몰입교육으로, 방학이면 미국과 캐나다, 유럽은 물론 가까운 필리핀이라도 다녀올 정도다.

말은 곧 혼이다. 이러다가 우리의 정체성을 잃을까 염려스럽다. 나라의 지도자라도 중심을 잡아주면 좋으련만 해외순방 때마다 외국어를 남발하고 있다. 이런 잘못된 점을 따끔하게 지적해야 할 언론조차도 한 술 더 떠 발음이 좋다는 둥 오히려 더 부추기는 꼴불견을 보이는 이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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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일본의 조선학교 중급부 여학생들(2011. 5.). ⓒ 눈빛출판사/ 김지연


"나의 국적은 '조선'입니다. 고향은 경상도입니다. 그런데 왜 조선이냐구요? 우리 할아버지는 분단되기 이전에 일본에 왔습니다. 우린 다시 조선을 기다립니다. 남조선, 북조선이 아닌 하나된 조선을 기다리며 민족정신을 배우고 있습니다." ……

그 어느 때보다 과학문명의 혜택을 신나게 누리며 살고 있는 21세기에 고운 치마저고리를 입고, 예쁘게 입을 모아 통일된 조국의 그리움을 노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어찌 놀랍지 않은가? 그것도 고난과 원한의 얼룩진 일본 땅에서 말이다.

"남도 북도 어디가 좋고 나쁘다고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요. 다만 분단된 현실이 안타깝고 빨리 하나된 조국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2012년 도후쿠 조선초중급학교 졸업식장에 홀로 선 김령화 학생의 말이었다.
- 김지연 지음 눈빛출판사 발간 <일본의 조선학교> 5쪽

당당한 자존심

재일본 조선인은 종전 후 70년이 되도록 우리말과 한복을 지키며 일본인들의 온갖 핍박과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그리고 민족의 주체성을 고수하는 그 당당한 자존심에 조국에 사는 우리들이 심히 부끄러울 뿐이다.

2013년 10월 가을 호인 <종소리> 제56호에는 스물네 시인의 서른 세 편 작품이 실렸다. 모두 다 통일을 염원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동포생활, 민족교육을 노래한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번 호도 유감스럽게 다 소개치 못하고 앞에서 두 편만 뽑았다.

해외동포 여러분! 부디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말과 겨레의 혼을 지켜주십시오.
고국에서 박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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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거리의 사물놀이패 행렬(2004. 1. 31.). ⓒ 박도


한가위 날에

               허옥녀

휘영청 밝은 달이
하늘 중천에 뜬 한가위 날

보름달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 순간을 찍고 싶어
찰칵 셔터를 눌렀더니

그리운 큰오빠 얼굴이 떠올라
쟁반 같은 보름달이 일그러졌네

추석엔 반드시 다시 찾겠다고
약속한 날은 그 언제고
못난 동생은 올해도 이역에서
그 약속 어기며 하늘만 쳐다보네

서귀포 앞바다가 바라보이는 묘지
부모님 산소 찾아 함께 향 피운 날
남매가 모이니 너무 좋다고
싱글벙글 웃기만 하던 우리 큰오빠

벌초는 끝났을까
과일이랑 송편도 장만했을까
올해도 혼자 술 한 잔 하면서
한 하늘 아래 보름달 보고 있을까

두 시간이면 가닿을 고향땅
아직은 달나라만큼 멀기도 하지만
휘영청 달 밝은 한가위 날은
달빛 속에 우리 오빠 만나는 날이라네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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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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