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찾은 광주에서 일인시위를 하다

등록 2013.11.13 11:05수정 2013.11.13 11:0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5일 실로 오랜만에 빛고을 광주에 갔다. 조선대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2010년 5월 2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故) 서정민 박사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기 위한 먼 길 나들이였다. 말하자면 광주시민들과 조선대 학생들에게 서정민 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억울한 사연을 알리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그 일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시위자이기도 하고 취재기자이기도 한 셈이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도시, 광주

a

기자회견 5일 오전 조선대학교 정문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고 서정민 박사의 부인 박경자씨도 마이크를 잡고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 ⓒ 지요하


내가 광주를 처음 찾은 때는 1979년 봄이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이었다. 나는 당시 '삼기개발'이라는 작은 회사의 직원이었다. 마산화력발전소 굴뚝의 석탄재를 수거하여 매립하거나 보관하기도 하고, 재활용업자들에게 팔기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광주의 재활용업자를 찾아가 물품 대금을 받아내는 일 때문에 광주에 가게 되었다. 무등산 자락의 음식점에서 저녁 대접을 받고 하룻밤을 묵고 돌아왔다. 다음해 봄에도 광주를 갈 일이 있었는데, 출장 직전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남양만 간척공사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게 되어 1980년 봄에는 광주를 가지 않았다.

만일 내가 1980년 봄에도 광주를 갔더라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종종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일 1980년 5월 중순 무렵 다시 광주를 갔더라면? 평생 동안 나는 그 괴이한 물음표를 벗어버릴 수가 없다.

그 후 나는 5·18광주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광주에 대해 일종의 정신적 채무 같은 것을 갖게 됐다. 광주라는 지명만 들어도 가슴이 찌르르 하는 묘한 정서도 가지게 됐다. 광주에 대한 각별한 친근감과 애정 때문에 나는 광주를 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게 됐고, 그 말을 주변에 공공연히 하기도 했다.


a

기자회견 5일 오전 조선대학교 정문 앞 기자회견에서는 고 서정민 박사의 외아들 재성씨도 마이크를 잡고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 ⓒ 지요하


그러나 나는 광주를 오랫동안 가지 못했다. 가족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지를 가기로 오래 전에 아내와 약속을 했는데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2005년 여름 태안성당 복사단 어린이들이 제주도 여행을 할 때 광주공항을 가기 위해 내 12인승 승합차로 운전 봉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망월동은 가지 못했다. 그래서 사실은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것 같은 심정이다.  

광주 조선대 앞 길바닥에서 밥을 먹다

빛고을 광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채무와 아직 가족과 함께 망월동을 가지 못하고 있는 죄스러움 때문에 나는 지난 5일의 광주행을 선뜻 결심할 수 있었다. 건강문제 때문에 걱정도 되고, 먼 길 나들이를 한 번 하려면 챙겨야 할 약도 많아서 번거롭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광주를 가게 된 기회를 나는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일로 광주를 가는 게 아니어서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물론 뜻있는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이지만, 고 서정민 박사의 억울한 죽음을 광주시민들과 조선대 학생들에게 알리고 손해배상청구에 의한 첫 공판 상황을 보기 위한 것이라 마음이 무거웠다. 심지어는 왜 대학 강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광주에서 일어났는지 야속한 마음이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근처 국민은행 본점 앞에서 7년 동안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 대표인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를 용산역에서 만나 함께 오전 7시 50분발 고속열차를 탔다.

a

일인시위 5일 오전 조선대학교 정문 앞. 고 서정민 박사의 외아들 재성씨도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했다. ⓒ 지요하


오전 11시쯤 광주역에 도착하니 고 서정민 박사의 부인인 박경자씨와 외아들 서재성씨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은 두 대의 택시로 조선대 정문 앞으로 이동했다. 길가에 펼침막을 설치하고, 우선 기자회견을 했다.

조선대생인 <오마이뉴스> 최문석 시민기자, 인터넷 언론매체인 <뉴시스> 기자, 광주 지역신문인 <시민의 소리> 기자, 광주MBC 기자 등이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의 성명서 낭독을 듣고 나서 질문을 했다. 기자회견 다음에는 두 부부 교수가 번갈아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면서 준비해온 유인물을 길을 오가는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했다.

일인시위와 유인물 배포에는 고 서정민 박사의 부인 박경자씨와 외아들 재성씨도 참여했고, 나는 사진촬영을 하면서 유인물 배포를 거들었다. 길가에 설치한 펼침막에는 '논문대필·교수임용비리 근절! 서정민 열사 유족 지지를 위한 기자회견'이라는 글귀와 함께 '조00과 조선대는 서정민 열사를 살려내라!'는 외침이 적혀 있었다. 또 일인시위용 피켓에는 '조00지도교수와 조선대는 서정민 열사를 살려내라!'라는 호소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피켓에는 고 서정민 박사의 유서 내용 일부가 활자로 적혀 있었다.

a

일인시위 5일 오전 조선대학교 정문 앞. 나도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에 참여했다. 나는 시위참여자이기도 했고, 취재기자이기도 했다. ⓒ 지요하


조선대 앞을 지나는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 중에는 스스로 발을 멈추고 피켓을 유심히 읽어보거나 손을 내밀어 유인물을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발을 멈추지 않은 채로 유인물을 마지못해 받아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 유인물을 외면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발을 멈추고 피켓의 내용을 유심히 보는 사람, 받아든 유인물을 읽으면서 걸음을 떼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유인물 배포를 계속하면서 피켓을 들고 일인시위를 하는 박경자씨와 재성씨의 모습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곤 했다.

박경자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길을 가던 한 중년 부인이 피켓에 적힌 서정민 박사의 유서를 읽으면서 눈물을 훔치더니 박경자씨의 손을 잡고 위로를 했다. 조선대학교에서 미화원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했다. 매일같이 서정민 교수가 맨 먼저 출근을 했고, 가장 늦게 퇴근을 했다는 말을 했다. 길가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줍는 모습도 많이 보았고, 미화원들에게도 먼저 친절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a

점심식사 일인시위를 하던 중 우리 일행은 조선대학교 정문 앞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 지요하


우리는 오후 1시쯤 중국음식점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과 짬뽕을 주문했고, 길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에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최문석씨도 함께 했다. 나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대학교 앞 길바닥에 앉아서 밥을 먹기는 난생 처음"이라는 말을 해 일행을 웃기기도 했다.

아버지 죽음 후 병을 앓고 전역한 아들

오후 3시쯤 우리 일행은 걸어서 15분 거리인 법원으로 이동했다. 김동애 교수와 박경자씨는 택시를 이용했고, 남자들은 피켓들을 들고 걸어서 이동했다. 광주지법과 고법, 광주지검과 고검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광주지법 건물의 6층으로 올라갔다.

고 서정민 박사의 유족이 조00지도교수와 조선대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퇴직금 청구 소송에 의한 재판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정식 공판이 아니어서 우리 일행은 방청을 할 수 없었다. 담당 판사실에 원고와 피고, 양측 변호인들만이 들어가서 판사와 함께 보충 자료에 관한 협의, 또 앞으로의 재판 일정에 관한 논의만을 했다.

우리 일행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창조'의 이덕우 담당대표변호사가 유족과 함께 판사실을 나온 후 기자회견 형식으로 대략적인 애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러 명의 기자들이 함께 했는데, 기자들 중에는 혹 상대 쪽에서 보낸 사람이 아닐까 의심되는 사람도 있는 것 겉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덕우 변호사는 재판 전략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쟁에 임하면서 자신의 주요 무기나 작전을 미리 공개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말도 했다. 웃으면서 한 말이지만 결코 우스갯말은 아닌 듯싶었다.

a

변호인 기자회견 판사실에서 피고측 변호인과 함께 재판 일정에 관한 논의를 하고 나온 이덕우 변호사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 지요하


이덕우 변호사는 내가 잘 아는 분이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1년 동안 매주 월요일 저녁에 거행되었던 4대강 파괴공사 중지를 위한 생명평화미사의 마지막 미사를 마친 2011년 11월 어느 날 사제들과 참석 신자들 모두 저녁을 함께 한 음식점에서 나는 이덕우 변호사와 한 자리에 앉아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고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대표적 인권변호사였던 고 유현석 변호사의 자제인 '작은 형제회' 유이규 신부와 보성고 동기시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이덕우 변호사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모두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고 서정민 박사의 아들 재성씨의 몸에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한쪽 손에 마비가 왔는지 움직이지를 못하고 괴로워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조금 전 조선대 정문 앞에 머물고 있을 때 그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재성씨는 2011년 4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직후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장례를 치른 후 부대로 복귀하여 그 해 9월부터 12월까지 해외함정교육을 받던 중 뇌염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금년 3월 31일 군병원에서 퇴원하면서 중위로 전역을 하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충격과 상심이 컸다고 했다. 큰 충격과 슬픔을 안고 함상 생활을 하자니 장기적인 배의 롤링이 그의 몸에 무리가 되었을 터였다.

a

몸과 마음의 고통 해군 장교 복무 중 병을 얻어 지난 3월 전역한 고 서정민 박사의 외아들 재성씨는 잠시 뇌염 후유증이 나타나기도 했다. 어머니 박경자씨와 이덕우 변호사가 재성씨의 손과 팔을 주물러주고 있다. ⓒ 지요하


어머니 박경자씨와 이덕우 변호사가 재성씨의 양옆에 앉아 팔과 몸을 주물러주는데, 이덕우 변호사는 이미 경험을 한 것 같았고, 재성씨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재성씨는 손의 마비가 풀어지자, 우리 일행과 함께 광주역으로 가서 일인시위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를 설득해서 이덕우 변호사가 자신의 승용차에 모자를 태우고 먼저 모자의 집으로 출발했다.

우리 일행은 택시를 타고 광주역으로 이동했다. 예정대로 광주역 역사 앞에서 일인시위를 했고, 유인물 배포 작업을 했다. 유인물이 다 떨어져서 김영곤 교수가 근처 복사 집에 가서 100여 장을 더 복사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최문석씨가 와서 거들어 주었다.

광주역 역사 앞에서의 일인시위까지 예정했던 일을 모두 마치고 우리 일행은 오후 6시 15분발 고속열차에 올랐다. 최문석 시민기자에게 저녁 대접을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우리 일행은 열차 안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 때문에 김영곤 교수가 반주를 참는 눈치여서 나는 캔 맥주를 하나 사서 김 교수에게 주고 종이컵으로 반 컵 정도 받아 나도 목을 축였다. 

고 서정민 박사의 억울한 죽음을 조금이라도 위무해주기 위해, 그리고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를 위해 큰 노고를 감내하는 김영곤 교수와 김동애 교수를 나는 새삼스럽게 존경의 눈으로 보면서 그들을 힘껏 도와야 함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그것 역시 사회공동선에 이바지하는 일임을 스스로 깨닫고 확인하면서….

(다음번 글에서는 고 서정민 교수의 안타까운 죽음과 유서 내용, 유서 발견 이후의 일들을 소상히 소개하고자 한다.)
#고 서정민 박사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 #대학교육정상화 #대학강사 노동조합 #광주 조선대학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