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만주에서 만난 얼음안개 서려 있는 731부대의 기억

등록 2013.11.13 21:05수정 2013.11.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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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공간. 마치 안개가 낀 듯 무언가 공기 중을 떠돌아 다녔지만 안개가 아니었다. 공기 중 수증기가 얼어붙는 다이아몬드 더스트(diamond dust) 현상이었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지극히 추운 날씨에서만 볼 수 있는 몽환적인 풍경. 2013년 1월, 시민단체인 국제민주연대의 만주 공정여행 탐방지 중 하나로 찾았던 중국 하얼빈시 평방구에 있는 '731부대 유적'의 슬픈 허공에는 지구별 추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우리를 더 슬프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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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 더스트로 인해 연출된 731부대의 몽환적 분위기가 당시의 잔학한 만행으로 희생된 이들을 어루만지는듯하다 ⓒ 국제민주연대


2차대전 당시, 세균무기 개발을 위해서 수많은 생체실험이 벌어졌던 일본 731부대의 본부였던 그곳에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전쟁범죄의 실상이 전시되어 있다. 인체를 해부할 때 사용한 도구들을 비롯해 다양하고 잔학한 생체실험 방법들에 대해 유적건물 두 개 층에 걸쳐 관람하고 나면, 건물 뒤쪽으로 나오기 직전에 복도 양쪽으로 검은 돌에 빼곡하게 새겨진 이름표들이 발을 멈추게 한다. 확인된 당시 희생자 명단이다.


대다수인 한자로 된 중국인 희생자들의 명판을 천천히 보며 지나가다 보면 눈에 익은 한글 명판도 나타난다. 이기수, 심득룡, 김성서, 고창률, 이청천 등 조선인 희생자들의 명판. 그리고, 러시아인들의 명판, 몽골인들의 명판… 일본 제국주의의 광기가 아시아 여러 나라에 피눈물을 흩뿌리게 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1935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10여 년간 운영된 이 곳 731부대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진 생체실험으로 살인당한 희생자의 수만 3천여 명. 실제는 훨씬 더 많은 희생이 있었으리라. 전쟁이 끝난 후의 조사에서는 이곳에서 만들어진 인체표본만도 수백 개가 있었다고 한다. 잔학한 만행을 총지휘했던 731부대장 이시이시로가 패전 후, 미국에게 생체실험 연구자료를 넘기며 신변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은 슬픔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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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얼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만든 거대한 동굴진지가 있다 ⓒ 국제민주연대


만주공정여행의 또 다른 하얼빈 탐방지인 조선민족예술관 안에 있는 '안중근의사 기념실'에서 31년밖에 되지 않는 그의 짧은 생애와 독립운동에 대한 전시를 보며, 도마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그의 목숨을 건 결단에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731부대의 만행에 대한 상상과, 안 의사가 의거 후 법정에서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평화를 파괴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는 상상이 겹쳐져 추운 하얼빈의 날씨가 더욱 드라마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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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 주요 건물 앞에 세워진 희생자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보는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국제민주연대


여행의 후반부에 탐방한 또 하나의 거대한 2차대전 당시 일제의 흔적. 소련과 몽골인민공화국, 그리고 중국의 내몽골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국경지역 하이라얼. 아마도 남아 있는 전 세계 2차대전 유적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리라. 내몽골 하이라얼 지역 전체를 지하 요새로 만들었던 일본의 땅굴 중 패전하며 미쳐 파괴하지 못하고 떠난 하나의 굴이 '세계반파시즘전쟁하이라얼기념관'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소련 극동지역으로 진군하고자 했던 일본이 소련 기갑부대에 밀려 참담한 첫 패전을 기록하여 불가침조약을 맺게 됨으로써 이후 2차대전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 할힌골전투(노몬한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바로 이곳 하이라얼 인근이며 하이라얼에는 당시 일본군 기지 사령부가 있었다. 하얼빈에 본부를 둔 731부대는 여러 곳에 있었는데 이곳 하이라얼에도 수많은 생체실험이 벌어졌다고 한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최고의 겨울축제인 하얼빈 빙등제, 100여 년 역사의 유럽식 건물이 즐비한 하얼빈 중앙대가와 성소피아성당의 아름다움, 그리고 하얼빈에서 러시아국경 만주리까지 가는 침대기차에서 맞이하는 끝없이 펼쳐진 설원 등 만주공정여행에서 볼 수 있는 환상의 겨울 풍경과 2차 대전 당시 일제가 만들어낸 끔찍한 역사의 현장이 대비되는 시간들이었다. 올 겨울에도 아름다운 설원과 역사의 현장을 함께 탐방하는 공정여행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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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빙등제는 동화속 나라 그자체이다 ⓒ 국제민주연대


국제민주연대 공정여행
공정여행은 여행 현지의 주민들에게 여행으로 발생한 이윤이 미미하게 돌아가는 대형 여행사의 패키지 위주 여행산업에 대한 대안적 여행으로, 성매매 관광이나 보신 관광 등 불합리한 형태의 관광을 거부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여행 이윤이 돌아가는 형태를 고민하는 여행이다.

여행지 주민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물론, 현지 소상공인의 물건으로 쇼핑하기 등을 권장한다. 공정여행을 주관하는 NGO 단체인 국제민주연대에서는 2009년부터 공정여행을 진행해왔으며 올해에도겨울 공정여행 프로그램을 모집하고 있다.

이번 겨울 여행프로그램으로는 '겨울만주-하얼빈 빙등제에서 시베리아 국경을 가다(2013년 12월28일~2014년 1월 1일, 2014년 1월 18일~ 2014년 1월 22일)과 '차마고도 윈난-구름이 머무는 소수민족의 나라'(2013년 1월4일~12일)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자세한 사항은 국제민주연대 공정여행 홈페이지(www.fairtour.co.kr)와 공식 페이스북(www.facebook.com/fairtravel.khis) 등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여행작가, 한신대 중국어문화학부 외래교수입니다.
#국제민주연대 #공정여행 #겨울만주 #731부대 #하이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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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는 2000년 창립이래로 인권과 평화에 기반을 둔 국제연대 사업을 통해 해외한국기업감시 및 민주주의와 인권연대활동,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 감시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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