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4가 지하상가로 청년들이 몰려든 이유

[청년의 대안⑥] 영혼이 깃든 물건을 만드는 청년들의 생산기지

등록 2013.12.11 10:06수정 2013.12.11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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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4가 지하상가 공실에 새로 입점할 청년 장인들이 점포를 열기 위해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지난 달부터 이달까지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의 지원을 받아 수공예 분야 등의 총 14개 업체가 점포를 낸다. ⓒ 장정규


종로4가 지하상가의 최대 단점은 전철역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다. 전철역을 오가는 유동인구가 부재하다는 것인데, 상가가 지속될 수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여전히 서울 대표 상권이라고는 하지만 예전보다 많이 쇠퇴했다는 말을 듣는 종로다. '혼수용품 전문'을 내세워 명맥을 유지해오던 종로4가 지하상가에도 문을 닫는 점포가 하나 둘 늘어왔다.

그런데 최근 공실로 남아 있던 점포들이 새롭게 단장되고 있다. 금은방, 양복점 같은 혼수용품 전문점의 복귀는 아니다. 공예, 의류, 교구 제작, 출판 등 분야가 다양하다. 하지만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가게를 여는 사람들이 모두 청년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서울시 '청년일자리허브'에 신청해 종로4가 지하상가를 '생산혁신'의 터전으로 꾸미기 위해 모였다.

본인의 기술로, 직접 손을 쓰는 친환경적 생산

'생산혁신'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단어에는 현대식 생산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추구가 담겨 있다. 생산도, 소비도 거대한 익명성의 구덩이에 빠진 듯하다.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사들이고 버리고 있지만 물건들은 낯설고 행위들은 공허하다. 욕망을 자극하고 낭비를 조장하는 소비주의 문화에 일차적 책임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려는 청년들의 등장은 필연적이다. 종로4가 지하상가에 입점한 청년들이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도 새로운 문화다. 직접 생산에 참여하며 관계를 맺고 특별한 의미와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소비하자는 것. 장인으로서, 또는 상인으로서 자립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화에 흥미를 느끼고 종로4가 지하상가를 찾아야만 가능하다.

일단 청년들은 낙관적이다.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자는 '용감한' 선택에 따르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지만 내 점포를 열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종로4가라는 위치도 나쁘지 않다. 인접한 광장시장은 재활용할 수 있는 자투리 원단과 각종 소재의 원천이며 선배 장인들로부터 기술의 노하우와 참신한 발상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청년들은 오래 전부터 영혼이 깃든 물건을 만들어왔던 장인들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 제품들을 전시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가 담긴 공예품을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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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스공방'의 가죽공예 작업 모습.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특별한 수공예 제품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 외에도, 수강생을 받아 함께 작업을 하는 등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 장정규


지난 11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입점을 마치는 업체는 총 14개로, 주된 분야는 수공예다. 가죽공예와 손바느질, 인형, 한복, 시계 등을 제작하는 업체들이다. 텃밭에서 키운 작물로 빵을 만들고, 아이들의 표현력을 높이는 교구를 제작하고, 3D프린터로 미니어처를 만드는 곳도 모두 공예 분야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밖에 사라져가는 장인들의 제품들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업체 등이 있다.

다른 곳보다 일찍 작업 시설을 갖춘 '영스공방'의 김영백씨는 가죽공예를 한다. 30년째 가죽 도매업을 하는 집안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가죽공예와 친숙해졌다. 각광받는 산업은 아니지만 수공예 공방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또래 청년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신앙적인 이유도 있었다. 교회에 안주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자급자족하며 노동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전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가죽공예품이라고 하면 비싸다는 인식이 퍼져있는데, 예를 들어 수천만 원 대의 가방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제품을 공방에서는 30~60만 원을 들여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김영백씨의 설명이다.

"사람들은 질이 좋고 특별한 아이템을 갖고 싶어 하죠. 그런데 소위 명품 가방과 여기 공방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에는 질적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또 수공예로 만들었다는 매력도 있고요. 제 개인적인 다짐은 단가를 절감한 보급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가죽제품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부작사부작 연구실'의 이서완씨는 취미생활로 해오던 수작업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종로4가에 둥지를 틀었다. '사부작사부작'이란 별로 힘들이지 않고 계속 가볍게 행동하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어이다. 꾸준하게 수작업이 이루어지는, 아마추어 공예작가들이 모여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공방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카메라케이스를 사려고 했는데 시장에서 파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만족스럽지 못한 거예요. 그래서 직접 만들었죠. 정말 성취감이 컸어요. 그 다음부터 수작업으로 물건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돈 안 되는 궁상맞은 짓이라며 엄마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수작업의 가치는 무척 크다고 생각해요. 내가 만드는 물건에 애정도 깊어지고 작업하는 내내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도 있고요."

생산의 방식을 바꾸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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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느질 업체 '꼬랑내 프로젝트'는 양말로 인형을 만드는 일을 한다. 외짝 양말을 가져오면 인형으로 만들어 돌려주는 사업을 준비 중에 있다. 사진은 실제 양말로 만든 인형의 모습. ⓒ 장정규


지난 10월부터 청년허브가 운영해온 '생산혁신학교' 학생들도 자신들의 생산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 학생들은 디자인 업체, 제조업 분야의 마케팅과 영업 쪽 출신들까지 포함해 무척 다양하다. 이들이 이전의 일터를 나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 것은 '왜 생산을 하는가'라는 질문 때문이다. 생산과 삶이 분리되고 하나가 하나를 갉아먹는 방식이 아니라, 생산과 삶이 합일을 이루며 함께 충만해지는 방식을 없을까 오랫동안 자문해왔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미의식과 철학을 손끝에 담았다. 나를 온전히 표현하는 생산, 느리지만 더욱 가치 있게 낡은 것들을 재생시키는 업사이클링(Up-cycling) 생산에 나선 것이다. 생산의 방식을 달리한 이들의 삶이 또한 어떻게 바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분명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관계의 변화다. 이제 생산자와 소비자는 냉랭하게 물건과 돈만을 교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상의 인간적인 무엇인가를 공유하게 되었다는 이웃의 감성을 나누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청년의 대안 #종로4가 #생산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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