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전쟁에선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어요"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76] <여자>

등록 2013.12.29 10:05수정 2013.12.2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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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집중된 동물이다
그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준다
전란도 서러웠지만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
고난이 나를 집중시켰고
이런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

내가 지금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에서 만난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에게 느낀 여자의 감각
그 이마의 힘줄
그 힘줄의 집중도(集中度)
이것은 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여자의 본성은 에고이스트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
그러니까 뱀은 선천적인 포로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속죄에 축복을 드렸다
(1963. 6. 2)


5·16 쿠데타 직후였다. 수영은 친구인 소설가 김이석의 집으로 급히 피신했다. 아마 그는 4·19 이후에 쓴 일련의 '불온한' 시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수영에게는 인민 의용군이었다가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혀 있던 '전력'도 있었다. 이 역시 그의 불안을 부추겼을 것이다. 수영의 '가출'은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반공을 국시로 들어선 쿠데타 권력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석의 집으로 숨어 들어간 수영은 집안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쿠데타 직후의 시내 정황은 이석 부부가 조심스레 알아왔다. 시내에 나간 그들이 집에 일찍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수영은 초조함 속에서 이석의 어린 아들에게 대문간을 살피고 오게 했다. 그런 날 수영은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어느 날이었다. 수영은 이석과 마주앉았다. 이석이 사들고 온 소주를 몇 잔 들이켰다. 잔뜩 긴장한 몸에 술 기운이 금방 차올랐다. 취한 수영은 이석에게 프랑스에 가겠다고 했다. 파리로 가서 현대문학과 현대예술을 공부하겠다고 했다. 수영은 '현대'가 없고 무의식도 없으며 앙가주망(engagement; 참여)도 없는 한국의 문학판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수영은 느닷없이 전쟁 이야기를 꺼냈다.

"김형! 내가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돼 왔을 적에, 우리 어머니가 무어라 한지 알아요? 너도 사람을 죽였냐고 물었어요. 사람을 죽였냐고."

이석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김형! 내가 무어라 한지 알아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니, 전쟁에서는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어요 내가······."

이석과 술을 나누던 수영이 갑작스레 전쟁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 한국전쟁 중의 의용군 체험은 수영에게 지울 수 없는 레드 콤플렉스의 화인을 남겼다.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비인간적인 체험의 밑바닥을 보았다. 수영은 추악한 인간의 본질과 원죄 등을 고통스럽게 떠올렸다.


그런 중에 군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반공을 국시로 했다. 수영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레드 콤플렉스의 화인이 수영을 날카롭게 쑤셔댔다. 수영의 신경세포는 온통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그는 '전쟁'과도 같은 세상이 무서웠다.

하지만 전쟁은 '축복'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서러운 '전란'(1연 3행)이었다. "포로수용소 안은 더 서러웠고 / 그 안의 여자들은 더 서러웠다".(1연 4~5행) 그러나 그 서러움의 '고난'은 화자를 '집중시켰"(1연 6행)다. 그 "집중이 여자의 선천적인 집중도와 / 기적적으로 마주치게 한 것이 전쟁이"(7~9행)었다. 그래서 화자는 "전쟁에 축복을 드렸다".(1연 10행)

전쟁은 '설움'과 '고난'에서 이어지는 '집중'을 이야기한 것은 '여자'를 말하기 위해서였다. '여자'는 "집중된 동물"(1연 1행)이었다. "이마의 힘줄같이 나에게 설움을 가르쳐"(1연 2행)주는 '여자'는 "뱀과 같은 에고이스트"(2연 7행)였다.

화자에게 '여자'가 '에고이스트'가 되는 까닭은 그 탁월한 '집중' 덕분이다. 여자는, 힘을 잔뜩 주었을 때 생기는 '이마의 힘줄' 같은 '집중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실제의 이미지를 갖는다. "6학년 아이들의 과외공부집에서 만난 / 학부형회의 어떤 어머니"(2연 1~2행)가 주인공이다. 그 '어머니'는 아마도 입에서 알침을 튀겨가며 어떤 열변을 토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마에 힘줄을 새기는 고도의 집중도를 보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이마의 힘줄"(2연 3행)과 "그 힘줄의 집중도"(2연 4행)는 "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2연 5행)었다. 무슨 '죄'인가. 자신만을 아는 '에고이스트'라는 것. 그것은 마치 '뱀'과 같았다. '뱀'은 원죄의 상징이다. 죄를 타고나는, 말하자면 '죄'의 "선천적인 포로"다.(2연 8행)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죄를 씻는 행위는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화자가 "속죄에 축복을 드"(2연 9행)리는 이유다.

'전쟁'의 '고난'과 '설움'에서 출발한 '집중'은, '집중된 동물'인 '여자'를 만나면서 '속죄'로 이어졌다. 시어로서는 생경한 한자어 '집중(集中)'은 무엇일까. 사전은 '집중'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렇다면 그 '한곳'이 핵심이다. '한곳'은 무엇인가. 전쟁에서 '살아남겠다는 것'이다. 세파와의 싸움에서 '이겨내겠다는 것'이다.

수영의 내면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은 깊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전쟁'은 '고난'과 '설움'을 이겨내는 '집중도'를 길러주었다. '이마의 힘줄' 같은 그 '집중도'로 세상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는 열정과 의지를 가져다주었다. '에고이스트'를 '본성'으로 갖는 '여자'를 긍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육체가 곧 욕(辱)이고 죄(罪)라는, 아득하게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한다. ··· 그런데 며칠 전에 아내와 그 일을 하던 것을 생각하다가 우연히 육체가 욕이고 죄라는 생각을 하면서 희열에 싸였다. ··· 내가 느끼는 죄감은 성에 대한 죄의식도 아니고 육체 그 자체도 아니다. 어떤 육체의 구조 ··· 즉 그녀의 운명, 그리고 모든 여자의 운명, 모든 사람의 운명. 그래서 나는 겨우 이런 메모를 해본다. ― "원죄는 죄(=성교) 이전의 죄"라고. 하지만 나의 새로운 발견이 새로운 연유는, 인간의 타락설도 아니고 원죄론의 긍정도 아니고, 한 사람의 육체를 맑은 눈으로 보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원죄>, ≪김수영 전집 2 산문≫, 141쪽)

<여자>는 '여자'에 관한 시이면서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운명'에 관한 시다. 수영의 '원죄론'을 빌려 표현하면, '육체'는 '운명'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 '육체'를 긍정하는 것은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육체를 "맑은 눈으로 보고 느"낀다는 것은 그의 '운명'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수영은 아내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육체 또한 "맑은 눈으로 보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그는 전쟁의 고난과 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가난에서 오는 좌절과 고통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세상의 공포와 두려움도 결국은 그를 빗겨갔다.

이석의 집으로 피신한 수영은 1주일 후쯤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빡빡 밀린 것만 빼면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돌아와 닭장 앞을 어슬렁거렸고, 가끔 모이도 주었다. 불안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수영은 자신만의 일상을 차분히 꾸려나갔다. 수영은 전쟁 같은 일상을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여자> #김수영 #원죄 #한국전쟁 #5.16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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