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 아이에게 던진 교사의 말, 믿기지 않았다

[서평] 한국 사회의 가난에 대한 진실과 거짓 <빈곤을 보는 눈>

등록 2014.01.14 17:13수정 2014.01.1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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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보는 눈> 책표지. ⓒ 개마고원

3년 전쯤이었을까. 교무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아이가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수업 중에 휴대전화를 몰래 꺼내 보다가 들켜 압수를 당한 모양이었다. 흔한 풍경이었다. 으레 그런 자리는 큰소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왜 내 물건 빼앗아 갔느냐는 아이의 볼멘소리와, '요새 애들 도대체가 말이야'로 시작하는 교사의 분노섞인 나무람이 어지럽게 교차하기 때문이다.

가만 보니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한바탕 푸닥거리(?)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그 선생님은 일장훈계를 마치고 아이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 아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서 교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이가 교무실을 나간 직후였다.


"요새 아이들은 가난해도 좋은 휴대 전화기는 다 가지고 다닌다니까."

누구 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를 '놀라운' 말이 교무실 한쪽에서 나와 내 귓전을 스쳤다. 그러자 예의 훈계를 마친 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 거들었다.

"인터넷 비용을 지원받는 생보자('기초생활수급자'의 이전 용어인 '생활보호대상자'를 말한다. 그는 과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정책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들도 가만히 보면 다 학원 다니고 과외받고 그런다니까. 심사 철저히 해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고요."

가난한 집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되나. 이른바 '생보자' 자녀가 학원이나 과외 도움을 받지 말아야 한다니, 그들은 교육을 통한 '입신출세'는 (이미 구조적으로 언감생심이지만)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걸까.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가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험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다. 교무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대한민국의 많은 시민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가난뱅이, '푸어'가 넘쳐나는 세상


가난뱅이, '푸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일하면서도 가난한 워킹 푸어, 집이 있는데도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하우스 푸어, 자녀 교육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에듀 푸어 등등 가난뱅이의 종류도 많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아니 1만 달러만 넘어도 가난은 우리와 먼 단어가 될 줄 알았다. 어지간하면 밥 세 끼 정도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냐고 자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푸어'들이 많은가. 그 수많은 '푸어'들은 모두 '가짜'란 말인가.

이 책 <빈곤을 보는 눈>은 가난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다. 거창하게 '빈곤론'쯤으로 불러도 되겠다. 그렇다고 빈곤 문제를 학술적으로 딱딱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다. 저자 신명호는 실패했다고 고백하지만, '재미있는 빈곤론'이나 '빈곤론 교양서'로 부르기에 딱 알맞은 책이다. 빈곤의 개념과 한국적인 상황에서의 빈곤의 규정, 빈곤에 대해 사람들이 '미신'처럼 믿고 있는 그릇된 '상식'이나 편견 등등의 문제를 두루 짚고 있다. 빈곤의 사회 구조적인 원인과 그것이 되풀이되는 모순적인 정치 상황 등도 저자가 다루는 다양한 문제의 한 가닥을 차지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푸어'들은 결코 가짜가 아니다. 저자는 "한때 우리 사회가 완전히 떠나보냈다고 믿었던 빈곤이란 놈이 슬그머니 우리 앞에 돌아와 있다"(5쪽)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흔히 '신빈곤'으로도 불리는 지금의 가난이 예전과는 다른 낯선 모습과 아주 완강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막강한 빈곤에 대처하기 위해서 저자는 그것에 관한 미신들과 싸우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 책을 쓴 이유다.

저자의 말마따나 절반은 거짓이거나 미신처럼 보이는, 가난에 관한 수많은 상식과 이론들은 대체 무엇일까. '가난한 삶'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저자는 빈곤을 정의할 때는 특정 사회에서 당대 사람들이 누리는 보편적인 생활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가령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 수급자들에게 '아프리카의 굶어 죽어가는 난민들을 생각하면서 당신들의 처지가 얼마나 행복하지 깨달으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못하다.

2010년,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모종의 일로 인터넷 안팎에서 난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 '차명진 의원, 최저생계비 황제체험?'(<한겨레> 2010년 7월 28일자 기사)과 같은 제목을 보면 그때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차 의원은 2010년 7월 23~24일에 참여연대가 진행하는 '최저생계비 하루나기' 릴레이 체험에 참여했다. 그는 하루 체험비로 6300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미트볼 한 봉지(159그램), 야채참치(100그램), 쌀국수(91그램), 쌀 한 컵 등을 모두 합해 3710원에 구입한 후, 세 끼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는 밤에 황도를 먹으며 책까지 읽었으니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는 소회를 밝혔다. 인터넷 누리꾼들은 격렬한 비난을 쏟아냈다.

저자는 불합리한 빈곤선이나 최저생계비 산정 기준 등을 지적하는 대목에서 차 의원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결론적으로 말하는 것은 최저생계비의 비현실성이다. 저자에 따르면, 식료품비·주거비·교육비 등 11개 항목, 361개 품목의 비용을 조목조목 따져 계산되는 최저생계비(2012년 기준 4인 가구 총액 월 149만5559원)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현행 최저생계비가 비현실적으로 낮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평균 어느 정도의 생활비로 살아가느냐를 따져보더라도 확인된다. ··· 정부가 빈곤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최저생계비는 도시 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30%가 안 되는 셈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보통 사람들의 평균소득과 비교해서 이 최저생계비가 차지하는 상대적 크기(비율)가 날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1999년 최저생계비를 처음 책정할 때는 그 수준이 당시 도시 근로자가구 평균소득의 46%였고 2008년에는 35%였는데, 현재는 30%로 더 떨어져 버렸다. ··· 아무리 가난해도 국민으로서 최저한의 기초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고자 만든 개념이 최저생계비인데, 그 보장 수준이 평균소득으로부터 자꾸 멀어진다는 것은 국가가 본래의 자기 역할을 점점 더 소홀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39~40쪽)

최저생계비 문제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빈곤의 상대성이다. 저자는 가난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빈곤선(빈곤한 가구와 그렇지 않은 가구를 구분하는 기준)이 자의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저자에 따르면, 빈곤선(최저생계비)을 일차 기준으로 해서 걸러진 생계급여 수급자 숫자는 '실제로 지원이 필요한 빈곤층'의 총합이 아니라 '현재 정부가 판단하기에 지원이 필요해 보이는 빈곤층'의 합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 단지 소득만 낮은 사람이 아니라...

무엇이 빈곤의 구체적인 상태인가 하는 문제도 짚어봐야 할 문제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없는 것을 빈곤 전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저자는 빈곤을 주거·건강·교육·인적자원 내지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한결같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으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상태로 규정한다. 가난한 사람을 단지 소득만 낮은 사람이 아니라 열악한 주거시설에서,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 고른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가난의 책임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그릇된 편견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흔히 가난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 대 사회의 문제 등의 이분법적인 차원에서 바라본다. 저자는 이런 단순하고 도식적인 이해를 통해서는 가난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마치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인 양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이 만난 몇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빈곤의 원인이 당사자에게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오류'라는 자의식도 없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그렇게 쌓인 세속의 담론들은 관습화된 '지식'이 되어 빈곤과 관련된 정책을 다룰 때마다 '여론'이라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92쪽)

조금만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지적이다. 저자의 반문처럼, 어떤 가난한 사람이 술에 젖어 지내는 며칠을 관찰했다고 해서 알코올에 탐닉하는 성향이 빈곤의 결과가 아니라 빈곤을 낳는 원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이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선 것은 지난 2012년이었다. 170여 개를 넘는 전 세계 국가 중에 39개국만이 2만 달러를 넘는다. 하지만 "각종 빈곤율(상대빈곤율, 노인빈곤율, 아동빈곤율)과 지니계수 등으로 매겨지는 형평성 평가는 우리나라가 가장 불평등하며 가난한 사람의 비율이 높은 나라에 속함을 보여준다".(286쪽) '푸어 시리즈', '푸어 공화국'과 같은 말이 단지 풍자어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어려운 것'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사회나 빈곤과 불평등은 존재하고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목청을 높인다. ··· 우리가 문제를 직시하고 대면한다는 것은 곧 부조리한 현실을 우리 눈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자들의 거짓 논리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과 다른 나라들의 경험을 살피면서 더 나은 삶의 방안을 궁리하는 것이다. 루쉰(중국의 소설가-기자 주)의 말처럼, 본디 있다고도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처럼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 그리고 땅 위의 길은 생각의 길을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302~303쪽)
덧붙이는 글 <가난을 보는 눈> (신명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 12. 27 | 303쪽 | 15,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신명호 지음,
개마고원, 2013


#<빈곤을 보는 눈> #신명호 #개마고원 #가난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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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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