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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봄날의 책 한국 산문선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등록 2014.01.23 14:00수정 2014.01.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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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오마이뉴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고 튀지 않아서 더욱 정감 가는 문장들. '사는이야기'는 읽으면서 흐뭇한 미소가 번지기도, 눈물이 글썽이기도 하는, 다 우리네 이웃들의 풍경이다. 적막강산에 우레가 숨어있고, 숭늉을 마셨는데 얼큰함이 느껴지는 그 맛! 그게 글의 힘이요, 산문의 매력이다.

문장가로 이름난 상허 이태준 선생은 자신의 저서에서 산문에 대해 말하기를, '음조보다 오로지 뜻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읽으며 쓰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 읽기 좋도록 음조를 다듬으면, 산문의 본분인 '뜻'을 놓치기 쉽다는 뜻이다. 물론 둘 모두를 잡으면 금상첨화겠으나,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본분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다.


뜻을 전하는 것 이외에 어디 무엇이 있는가? 일념 뜻에만 충실한 글들이다. 뜻의 세계가 환하게 보인다. 이 환하게 보이는 뜻, 그것을 가리며 나설 다른 것(음조)을 용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증, 이것은 산문의 육험이요 정신이다. -<문장강화> 104쪽

뜻을 전달한다고 해서 꼭 무겁거나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신변잡기로도, 가벼운 주장으로도 충분하다. 독자가 글을 읽으며, 내가 보고 듣고 맛본 것에 따라 느낀다면 최고다. 주제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보통의 삶은 공감을 위한 최고의 매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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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책 한국 산문선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겉표지 ⓒ 봄날의책

바로 이런 맛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책이 있다.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이란 부제로 엮은 산문집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다.

평소에 비교적 접하기 수월했던 하종강·이계삼 선생의 글부터, 송경동 시인을 비롯해 수려한 운문을 뽐내던 글쓴이들의 산문들. 그리고 농민·소설가·우체부·요리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들이 삶의 향기를 흠뻑 자아냈다.

편집인은 글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최대한 넓은 범위로, 타자에 대한 존중을 고려했다고 했다. 소재가 가벼워도 속뜻은 진중해야 한다, 그런 뜻일 게다.


노동, 생활, 취미와 취향 등 넓은 의미에서 '인생'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최대한 망라하고자 했다. 생활과 노동에 대한 존중, 타자(사람일 수도 있고 또 자연일 수도 있겠다)에 대한 배려심이 담긴 글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편집자 서문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독자의 공감을 이끄는 힘

류상진 우체부의 글은 제목부터가 심상찮다. '와따~아 기왕에 뭣을 줄라믄', '내가 아재를 지달리문 덜 미안하제~에', 지방색이 있다. 제목만 봐도 푸근한 시골의 정이 느껴진다. 때로 대화 한 마디를 그대로 인용하는 게 백 마디 설명보다 낫다. 바로 그런 경우다. 

우편물을 배달하다가 바구니에 깍지를 깐 풋콩을 담아 가지고 오던 할머니를 만났단다. "쪼깨만 지달리라"고 하더니 콩을 준다고 하고는 5분을 넘게 기다려도 나오지 않더란다. 들어 가보니 할머니가 콩을 씻고 있다. "그냥 주시지 왜 씻고 계시냐" 물으니, 할머니의 대답이 포근하다.

"그래도 기왕에 뭣을 줄라믄 묵겄게 해서 줘야 쓴 것이여! 안 그래? 이것 작제만 집에 갖고 가서 애기 엄마한테 밥에 쪼까썩만 놔서 묵으라고 그래 잉! 알겠제!" -본문 71쪽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 아니, 어떤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들 저 맛이 살 수 있으랴. 화자의 표정까지 그려진다. 비록 상상이지만 빠져들게 하는 매력, 그게 바로 대화다. 살아있는 언어, 그대로다.

김언 시인은 고모를 만나고 오는 길에 느꼈던 상념을 글로 풀었다. '완연한 봄날'로 시작하는 문장은 경험과 대비되며 꽤나 극적이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이제껏 고생으로 일관해온 고모의 삶과 그 가족사를 일일이 입에 담을 필요도 없이 고모는 애가 많은 분이다. 널찍한 방에서 같은 잠을 자고 같은 음식과 기저귀를 끼고 사는 저 안의 저 노인들도 얼굴에 박힌 깊은 주름만큼이나 더듬어 펼칠 수 없는 곡절을 어딘가 간직한 분들이다. 한때는 가장 아름다웠을 그 몸을 정신과 함께 잃어버린 사람들. 죽기 전까지 늙어갈 뿐인 그 몸과 정신을 위해서 내가 또 무슨 말을 동원할 것인가. -본문 129쪽

노인병원에 있는 고모를 만나고 나왔다. 더군다나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들렀다는 부가설명이 덧붙는다. 그렇기에 다시 나와서 올려다본 푸른 봄날의 하늘은, 결코 같은 느낌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을 읽은 독자의 시선도 그럴 게다.

담담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법

가벼운 주제를 풀지만,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다. 일차원 적으로 소리치며 주장하지 않아도 글을 읽는 이를 슬며시 젖어가듯 감화시킬 수 있다.

송경동 시인의 글이 그렇다.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청계천 잡부 숙소에 살던 한 일용직 청년의 이야기다.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청년은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다면 어정쩡한 글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말미에 '청년의 벗들은 지금도 일정한 주소지를 갖지 못한 일용공이거나 노숙자거나 빈민들이다'라면서 갑자기 1인칭으로 시점이 변화한다. 그리고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나는 아직도 그 잡부 숙소를 잊지 못한다.' 시종일관 '청년'과 '그'로 지칭되던 인물이 마지막에 '나'가 된다. 글은 현실이 되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의 그늘진 곳을 돌아보게 만든다. <오마이뉴스> 최규화 기자의 '사는 이야기 다시 읽기(사이다)'에서 슬쩍 빌렸다.

흔히 노동문제 같은 무거운 사회 이슈를 가지고 글을 쓰다보면, 주의·주장만 넘치고 '이야기'는 부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는이야기의 목적은 이야기를 통한 공감이죠. 글쓴이처럼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선택과 집중'으로 충실히 전달하고 그 속에 자신의 정서를 차분하게 녹여낸다면, 굳이 핏대 세워가며 주장만 앞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논리적인 설득의 글도 필요하겠지만 이처럼 따뜻한 공감의 글도 분명 필요합니다. -사이다③ '멀리서 또 가까이서... 밀당으로 공감 만든다'에서

글은 꼭 어려운 이론이나 주장을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다. 펜을 들자. 무엇이든 써보자. 옆집 아저씨, 직장의 김대리, 단골 술집, 지하철에서 본 풍경. 모두가 글감이다. 겪은 일만 풀어도 훌륭한 산문이 된다. 평범할수록 공감이 간다. 자, 당신이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다.
덧붙이는 글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강광석외39인 지음, 박지홍외1인 엮음, 노순택 사진, 봄날의책 펴냄, 2013.11, 1만3천원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

강광석 외 지음, 박지홍.이연희 엮음, 노순택 사진,
봄날의책, 2013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봄날의책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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