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비춰 올림픽에 빠진 나를 본다

감이당 첫수업을 듣고

등록 2014.02.22 11:20수정 2014.02.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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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글쓰기 수업 교재는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였다. 듣던대로 고미숙 선생님께 여지 없이 깨지지만 학생들은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다. ⓒ 이소영


온 나라가 올림픽에 빠져있다. 오늘 새벽은 김연아의 경기가 있는 날이고 나에게는 인문학 공동체 감이당에서의 첫 수업이 있는 날이다.


내가 어떻게 서울에 오게 되었을까? 서울!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는데 40년 만에 드디어 내가 서울로 가는 날이다. 스스로.

아침 7시 39분 천안역에서 서울역을 향하는 급행전철을 탔다. 2012년의 영신수련은 마치 험난함을 뚫고 감이당에 오기 위한 힘과 2013년 경제활동은 감이당 등록금 마련을 위한 돈벌이였던 것 같다.

9시 9분 서울역 도착 충무로로 가기 위해 4호선으로 갈아탔다. 내가 서울에 왔구나.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서울에 왔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서울대 학생이 된 기분이다. 간절히 오고 싶었고 공부하고 싶었다. 더욱이 좋은 것은 시험을 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데 있다.

감이당의 기운을 빨리 느끼고 싶었다. 4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코너를 돌 때는 쇼트트랙 선수처럼 아웃라인으로 추월하고 직선거리에서는 F1카레이서처럼 왔다갔다 사람들을 추월했다.

박지원이 열하로 출발하기 전 의주에서 누각의 기둥과 땅에 술을 뿌려 잘 다녀올 것을 기원했다. 나는 감이당 문턱에 있는 해태 두 마리와 2층 계단에, 먼길 떠날 때 늘 가지고 다니는 커피를 술 대신 뿌리며 나의 공부 여정의 안위를 기원했다.


49명이 들어 찰 방에 앉은뱅이 책상들이 빼곡이 줄맞춰 있었고 일찍 온 사람들은 벽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내가 예상 못한 간식이 나의 기분을 돋우워 주웠다. 늘 이렇게 간식이 있다고 하니 어디서나 먹을  것을 챙겨 다니는 나에게 간식은 큰 기쁨이었다.

작년에 공부했던 사람들은 서로 간식을 먹으며 인사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천안에서 같이 공부하러 올 내 친구들이 30분 후에나 도착하니 나는 낯선 사람들 속에 있다. 그러나 전혀 주눅들지 않고 그들 속에 앉아 내 맘대로 말한다. 1년 먼저 공부한 사람들의 익숙함만큼 나도 자연스럽다.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왔을까. 그저 좋기만 하다. 누구건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게 먼저 인사 건네는 사람도 있다. 오리엔테이션등 몇 번 봤다고 익은 얼굴들도 있다

오늘 10시부터 6시까지 장시간의 공부를 위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몸을 단련하리라. 내 허리통증이 바른 자세로 사라져 버리길, 통증이 내 공부를 방해하게 할 수 없다. 10시가 다가오자 천안 친구들도 도착하고 방안이 가득 찼다. 다들 조와 상관없이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1교시 장자수업, 내편의 소요유와 응제왕편을 읽어오는 숙제가 있었다. 작년에 장자를 읽고 유투브로 강좌도 들었다. 장자의 내편은 다 외워야 한다고 하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계의 '아이돌' 강신주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장자다. 좋아 죽겠다. 강신주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나 하는 스토커스런 생각도 해본다. 내가 사랑하는 강신주가 장자박사인데 그걸 못 외우랴!

주변을 돌아보니 책에, 노트에 다들 열심히 적고 있다.  내가 핸드폰으로 메모하는 것을 딴짓하는 것으로 여길까 하는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경쟁하듯 필기하느라 내겐 눈길도 주고 있지 않았다.

구속 없는 절대의 자유로운 경지에서 노니는 것이 <소요유>라고 적혀 있다. 물고기 곤이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되고 그 새가 태풍이 일 때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변신"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물론 여기에서는 변신이지만 나는 곤이 붕으로 바뀌는 것을 "성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어렸을 적에 어른이 되면 몸의 성장이 이루어지듯 정신적인 성장도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20살, 집을 떠난 자유를 느끼면서 책을 실컷 읽어, 서울대를 나와 지적인 아빠처럼 , 논리정연한 큰 언니처럼 멋진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읽지 않았던 책이 술술 읽힐 리 없었고 순간 순간 눈앞에 닥치는 일들이 더 중요해지면서 책과는 멀어졌고 남자도 사귀게 되었다.

하루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라치면 알 수 없는 괴로움이 나를 바닥으로 바닥으로 끌어내렸고 머릿속에서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루 하루 그렇게 반복되다 보니 심연으로 빨려들 것 같던 느낌도 사라졌다. 겉으로는 즐겁게 생활했지만 후회와 방황을 오가며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이십대를 마쳤고 그럴수록 나는 남편에게 더 올인했던 것 같다.

20살이 넘어서도 30살이 넘어서도 나는 '어른들은 이런다'라는 말을 종종 쓰는 어린아이같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내가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문득 '예전에 좀 더 공부했더라면'을 되뇌며 아이를 잘 키워야지를 나의 새로운 지상과제로 삼아 육아서를 독파하고 그대로 따라해보기도 하고 아이 하나 더 낳으면 진짜 잘키울 수 있겠다는 허황된 생각을 하며 안개같은 길을 걸어왔다.

20살에 노력을 안 했으니 아니 고등학교 때 노력을 안 했으니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한탄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꿈꿨던 인생은 머리 좋은 사람, 타고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더 강력하게 믿으면서 보잘 것 없는 나에 대해 합리화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더 이상의 '성장'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장은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33살 보육교사 교육원에서 1년간 들었던 심리학 수업에서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갖는지 조금 알게 되었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약간 알게 되었다. 지식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나를 알게 되자 나는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2년 매일 1시간 묵상하고 자신을 깨닫는 과정의 수련을 하며 자신을 알게 됐고 2013년 철학강의를 들으면서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혼돈이 정리되자 나는 또 한번 성장하게 되었다. 지식으로 가득 차 많이 알아서 주절거려야 똑똑하고 멋진 사람 같았는데 성장이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내 그릇만큼 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것에 머리가 아니라 '행동'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이 이유도 '그냥'을 붙이게 되었다. 결과를 꿈꾸지만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니 그저 하루하루가 즐거울 뿐이다. 뛰어난 머리를 소유하지 않은 것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내가 뭐 하나에 미쳐서 엄청난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받아들였다.  

학자가 되고 이름을 날리지 않았지만 나는 내 그릇 안에서 붕으로 변신했다. 태풍을 타는 구만리 창천을 나는 붕이 아니고 피라미가 변신한 메추라기 같은 붕일지라도 나는 좋다. 곤에서 붕의 변화는 내게 이렇게 다가왔고 움직임을 낳았다. 성장은 나이가 많다고 어려서 좌절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것이다. 더불어 새롭게 다가온 문구를 보고 또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赤若則己矣

아지랑이와 먼지. 이는 <천지간의> 생물이 서로 입김으로 내뿜어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의 새파란 빛은 과연 제 빛깔일까. 아니면 멀리 떨어져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붕 또한 하계를 내려다볼 때 역시 여기서 올려다볼 때처럼 그와 같이 새파랗게 보일 것이다.(장자 안동림 역주)

변신을 하고 수개월간 태풍을 몰아 구만리 창천으로 올라갔건만 땅에서 올려다본 푸른 빛깔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것과 같이 새파랗다니. 하늘의 빛은 제 빛깔일까? 같은 집이 앞에서 볼 때와 옆에서 볼 때가 다르다. 이와는 반대로 구만리 창천에서 아래로 내려보나 땅바닥에서 위를 쳐다보나 같은 빛깔이다. 우리가 동경하던 새파란 하늘에 올랐더니 새파란 곳이 이번엔 하늘이 아니라 땅인 것이다.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헤매었건만 파랑새는 내 집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격이라할까. 땅으로 다시 내려온 붕은 생각할 것이다. 하늘에 올라던 것이 허무했을까? 아니다. 그 과정을 겪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붕이 바람을 몰아 힘겨운 노력으로 태풍을 타고 올랐던 것은 나를 극복하고 꿈을 향해 달리는 것이다. 꿈을 이루고 내려와야만 땅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새파란 하늘빛에 대한 의심.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명제가 깨지는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된다. 생각의 확장이 일어나고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늘어난다. 장자가 보여준 이 우화는 나에게 말한다. 성장하고 확장하라.

두 번째 의역학과 독송, 그리고 마지막 글쓰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것 하나 지루한 것이 없었고 가슴 뛰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올림픽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고 우리는 선수들에게 응원과 열광 때로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현하며 그 어느 때보다 TV에 집중하고 있다.

선수들은 곤에서 붕으로 변신하고 피나는 노력으로 태풍을 모아 힘겨운 비상을 꿈꾸고 있는 듯하다. 붕은 1년을 기다려 태풍을 만나지만 태풍이 오지 않는다면 1년 내내 땅바닥에 쳐박혀 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붕은 1년마다 비상을 꿈꾸지만 올림픽 선수들은의 조건은 더 끔찍하다. 올림픽에 나갈 기회조차 얻지 못한 선수들이 TV속 선수들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의 노력과 실패 화려함과 좌절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나. 나는 생각해 본다. 4년 내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즐기지도 않고 규칙도 모르는 스피드 스케이트에 빠져 왜 나는 자정을 넘기고 있을까?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과 흥미진진한 승부에 열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지만 온 나라가 올림픽에 빨려드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 진정 새파란 것이 하늘빛인지 의심해 볼 만하다.
#감이당 #목성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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