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가... 전설의 황금도시, 정말 사악하다

[사표 쓰고 떠난 세계일주 45 ] 사라진 잉카제국의 수도 페루 쿠스코

등록 2014.05.10 21:14수정 2014.05.1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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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잉카의 수도 쿠스코

또르르 또르르.


맑은 비가 구슬처럼 내리던 날 아침, 준과 나는 아침 첫 배를 타고 태양의 섬을 빠져 나와 국경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페루 국경까지는 버스로 겨우 30분 남짓 걸렸을 뿐이지만, 어느새 주변의 여행객이 부쩍 늘어났음을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향하는 곳은 유럽의 정복자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황금빛 도시, 페루 쿠스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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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페루의 국경을 건너고 나면, 광풍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한국의 문화와 가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페루 소녀들의 습격이 시작된다. ⓒ 김동주


별다를 것 없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국경을 넘어 쿠스코에 닿는 10시간 동안 유일하게 내 흥미를 끈 것은 동양인 남자가 보일 때마다 국적을 확인하는 현지의 소녀들이었다. 첫 번째 사건은 페루와 볼리비아 간의 금을 넘자마자 벌어졌다.

배낭을 메고 이민국으로 걸어가는 준을 붙들고는 사진을 찍자고 애원하는 소녀들. 한 사람이 달려와 사진을 청하면 그를 따라 또 다른 소녀들이 달려와 우리의 팔을 잡아 이끈다. 가게에서 기념품을 파는 점원들은 카메라를 가리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처음 보는 한국인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페이스북 친구를 요청한다.

얼핏 들여다 본 그녀의 핸드폰에는 <꽃보다 남자>를 비롯한 한국 드라마 주인공들과 가수들의 사진으로 가득하다. 새벽 1시가 넘어 도착한 지구 반대편 도시의 주점에서 한국 노래가 들려온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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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기와와 닮은, 쿠스코의 지붕. 고층건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모습이 잉카시대를 연상시킨다. ⓒ 김동주


그러나 뜻밖의 환대로 상승한 낯선 도시에 대한 호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대 잉카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쿠스코(Cuzco)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쿠스코의 특별함은 외국인에 대한 물가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데에 있다. 우유니 사막과 더불어 남미 여행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마추픽추' 라는 좋은 관광자원을 가진 페루 정부는 작정하고 외국인을 등치기로 한 느낌이다.


기차로 겨우 3시간 거리에 불과한 마추픽추 행 편도 열차의 가격은 무려 80달러, 더 놀라운 사실은 기차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통수단을 다 통제한다는 점이다. 외국인에게만 비싼 기차 값을 치르지 않고 마추픽추에 가는 방법은 오래 전 스페인 정복자들처럼 숲길을 따라 며칠씩 걷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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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근교 현지인들의 거주지와 아르마스 광장 주변의 중심가는 큰 차이를 보인다 ⓒ 김동주


고대 잉카제국의 신비를 따라 쿠스코를 찾는 전세계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결국은 이들에게 독이 된 듯한 느낌이다. 관광지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쉴새 없이 새 도로를 깔고 새하얗게 정비된 건물들을 지어나가는 모습은 시 외곽의 언덕으로 어지럽게 그물지어 있는 현지인들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여행객을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다. 어쩐지 잉카 제국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 같아 가슴에 쿵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역사란,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남아있는 잉카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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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의 중심부인 아르마스 광장. 주말이면 관광객을 위한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 김동주


'티티카카 호수에서 태어난 만코 카팍이 그의 황금 지팡이를 두드리자 땅이 열리며 지팡이를 집어삼켰다. 그 지점에 돌을 쌓아 세운 도시가 쿠스코, 바로 황금의 도시다.'

잉카신화에 나오는 쿠스코의 탄생 이야기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번성했던 거대 제국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400m 에 건설된 도시로, 풍부한 황금과 은으로 한때 최고의 번성기를 맞았다. 콜럼버스 덕에 바다 건너에 다른 땅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까지 바다는 곧 세계의 끝이었다 그런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잉카의 배꼽에 해당하는 도시가 바로 쿠스코(Cuzco)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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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곳곳에는 잉카제국 당시의 모습을 그린 벽화들이 많이 남아있다. ⓒ 김동주


그러나 1438년부터 약 100여 년간 강대한 발전을 이루었던 잉카의 몰락은 한순간이었다. 스페인 본토에서는 전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뜨내기 항해사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당시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뒤 불과 180명의 병사들로 수천의 잉카군대를 모조리 멸살 시켰다.

쿠스코에서 황금을 발견한 그의 무리는 당시 유럽에 광풍처럼 몰아치던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 전설을 이용해 수많은 탐색대를 휘하에 두고 쿠스코를 비롯한 잉카제국 곳곳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황금을 제외하고는 관심이 없었던 그들은 잉카 시대에 만들어진 옛 길과 돌벽들을 중심으로 도로와 건물을 건설했다. 덕분에 여전히 뛰어났던 잉카의 건축술을 엿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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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시내의 돌벽과 바닥은 오래 전 잉카의 모습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태양신을 위한 신전인 꼬리칸차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 김동주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쳐 인도를 따라 걷다 보면 녹색 잔디로 덮여 있는 공터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꼬리칸차'라고 불리던 잉카제국의 태양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건물뿐 아니라 정원까지 상당 부분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그 많은 황금은 스페인 군이 녹여 본국으로 보내고 중심을 잃은 신전은 터만 남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잉카의 황금이 독이 된 것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보화를 가득 실은 그들의 범선은 해적의 목표가 되기 일쑤였고 어떤 배는 암초를, 혹은 폭풍을 만나 찬란한 보물과 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수도였던 쿠스코를 정복한 피사로는 결국 그 황금을 노린 다른 동료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리 오라, 내 검이여. 내 인생 모든 여정의 동반자여."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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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스 광장에서는 주말마다 다양한 주제의 행사와 벼룩시장이 열러 관광객이 지루할 틈이 없다. ⓒ 김동주


쿠스코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길, 카테드랄 대성당 앞에서는 잉카의 전통문화 재연이 한창이다. 파괴된 잉카의 궁전과 신전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유럽인들의 교회 앞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춤사위에 슬프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라도 남아 있어 주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콜럼버스와 그를 추종한 스페인 정복자들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전설의 황금도시 엘도라도는 그들이 욕심이 만들어낸 전설일 뿐이었다. 밤에도 이토록 눈부시게 이렇게도 아름다운 황금빛 도시를 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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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으로 이루어진 도시 엘도라도는 사실 쿠스코의 밤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 김동주


간략 여행정보
남미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이 찾는 도시인 쿠스코는 그 명성답게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매우 많다. 대부분의 숙소와 식당은 중앙광장인 아르마스 근처에 있으며 많은 펍에서는 늦게까지 파티가 이어지니 시끄러운 것이 싫다면 조금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는 것이 현명하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매 주말 잉카의 문화를 재연하는 행사가 열리며, 매년 6월 셋째 주가 되면 페루에서 가장 큰 축제인 인티 라이미 축제가 쿠스코에서 열린다. 인티 라이미 축제는 실존했던 잉카의 축제 중 하나를 재현한 것으로, 페루는 물론 과테말라, 콜롬비아에 사는 잉카의 후손들까지 모여드는 엄청난 규모다. 브라질 리우의 카니발, 오루로의 카니발과 더불어 남미 3대 축제 중의 하나라고 하니 6월이야말로 쿠스코를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때다.

여담이지만 쿠스코에서는 60분 등 마사지를 우리 돈 6,000 ~ 10,000 원 사이에 받을 수 있다. 좀 더 자세한 쿠스코 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3636173

#쿠스코 #잉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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