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죽은 아이라는 건 없다

진도에서 만난 풍경들... 누가 이 애틋한 기다림을 모욕하는가

등록 2014.05.04 20:43수정 2014.05.0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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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첫 날 이때가 .구조할 수 있던 때였다. 의혹에 싸인 3시간 47분 ⓒ 양준웅


소설 <유토피아>에서 시민들은 정신지체인들의 특이행동을 재미있어 한다. 정신지체인의 특이행동을 가치 있는 유머의 원천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그들과 더불어 살 자격이 있다고 판단한다. 

그 판단에 동의하나, 오늘 대한민국의 좌표는 디스토피아 쪽임이 분명하다. 세월호 참사 초기 '대통령과 그의 관료들'이 보여준 특이행동은 나를 혼돈에 빠뜨렸다. '그들'의 수수방관을 읽어내는 데 며칠이 걸렸다. 한 명도 살릴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버티고 버둥거리던 희생자들에게 '그들'이 보낸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구조는 없다! 인양이 있을 뿐.'

물론 재미없었고, 따뜻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너무나 모멸스럽고 억울해서 팽목항에 갔다. 지난 4월 28일 밤에 경기도 일산을 출발해 진도대교에 도착한 이튿날 새벽까지, 나는 허술한 정보나마 정리해 생각 주머니를 서너 개 만들었다. 그 중 가슴 아픈 주머니는 승선자 명단을 봉함하거나 조작하면 영영 신원을 알 수 없게 될 익명의 승객들에 관한 것이었다. 어느 언론사는 승선객을 500여 명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 누구였을까.

팽목항, 4월 29일 새벽 다섯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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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의 새벽. 아이들을 기다리는 간식들. ⓒ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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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수평선 왼쪽으로 쾌속정을 타고가면 30분 거리에 맹골수도가 있었다. ⓒ 조정


사리 첫날의 새벽 바다는 잔물결을 밀며 날 밝기를 기다릴 뿐 고요했다. 한 남자가 망연히 서 있다가 돌아갔고, 한 여인이 난간 끝에 서서 울었다. 조금 있으니 또 한 여인이 와서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먼 바다를 보다가 주저앉아 울었다.


차례로 진도에 왔던 '그들'이 떠올랐다. 이 처참에 대한 공감 없이,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겁박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두려워하느라 사납거나 무표정했다. 무표정하기로 치면 바다가 압권이었으나, 바다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길고 길게 주문을 외어 호소했다.

'문 열어라 물아. 문 열어라 물아. 문 좀 열어다오 물아.'

팽목에는 텐트들이 많기도 했다. 유류품 보관, 희생자 신원 확인장, 가족 DNA 검사소부터  약국과 택배 무료 배송 텐트까지 1km 거리가 온통 텐트였다. 사람이 많았지만 조용히 비켜 다녔다. 리어카를 끌고 부지런히 쓰레기를 수거하는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학생들의 움직임에 오롯이 눈이 갔다. 변변찮은 어른으로서 미안하고 고마웠다.

구조 기민성이 저 봉사자들만큼만 되었어도 '구조자 제로'의 불명예나 '애초에 구조 의도가 없었다'는 혐의는 벗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제주 해녀들에게 부탁했어도 두 명은 구했겠다"는 말이 나오겠는가.
 
동거차도 가는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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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랑 9호의 구조보트 세월호에서는 한 척도 사용되지 않은 채 침몰했다. 승무원과 해경들의 잘못이었다. ⓒ 조정


참사 현장과 가장 가까운 섬은 동거차도라고 했다. 1일 오전 9시에 인근 서망항을 출발한 섬사랑 9호 갑판에서 승객 두 사람을 만났다. 사진가용 카메라를 맨 장년은 휴가를 마친 어느 여객선 선장이라 했고, 이순쯤으로 보이는 양복 차림은 망자들에게 부어 주려고 소주 한 병을 들고 온 서울 사람이었다.  

선장이라는 장년에게 물었다. 전날 진도의 선박 관련 사업가에게 들은 말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맹골수도가 울돌목이나 백마섬등만큼 조류가 센 곳은 아니라던데 정말 그런가요?" 

그는 갑갑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리 배가 지나온 쪽 바다를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다른 곳과 구분되게 흐르는 물결 가닥 보이지요? 저기 오는 배도 그 힘을 정면으로 안 받으려고 비스듬히 오잖아요. 맹골수도는 훨씬 세게 개울물처럼 흘러요. 다만 세월호 같은 대형 선박들은 영향을 거의 안 받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맹골수도의 강한 조류가 이번 사고의 원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청해진해운이 승무원 안전 교육비로 1년에 겨우 54만 원을 쓰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은가도 물었다. 그는 강경하게 답했다. 해운회사의 문제라기보다 안전교육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 철저히 점검하지 않는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는 말이었다.

소주병을 보여주던 양복 차림은 사흘 전 진도에 왔다면서,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 '종북' 선동꾼이 많다고 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하자 "아, 참 모르시네. 우리나라에 종북 좌파가 58만 명이 있어요"한다. 무엇에 근거한 수치일까. 그이는 여러 말을 하다가 옆에 선장님에게 "무슨 판단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갈라서 너는 좌파 나는 우파로 합니까"라는 면박을 듣고서야 조용해졌다.

물거품 이는 프로펠러 앞에 앉아 새 나일론 끈으로 닻줄을 수선하는 수부의 솜씨가 야물고 꼼꼼했다. 한참 서서 구경했다. 정부나 군대는 왜 저 늙은 수부처럼 일하지 않았을까, 그 부실함의 수심으로 사람이 빠져 죽었다. 슬도, 독거도, 창유도, 나배도 등을 거쳐 관매도를 지날 때 사고 현장이 멀리 보였다. 옅은 해무 때문에 주변의 맹골도나 병풍도는 흐릿했다.

오후 2시 45분에 동거차도를 찾아온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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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산에서 바라본 사고 해역 생명 구조에는 무력했던 배들이 시신을 인양하기 위해 서있었다. 사람 사는 곳에서 멀지 않으니 수중고혼들이 덜 외롭기를 바랐다. ⓒ 조정


동거차도 선착장은 섬의 북쪽이었는데, 만입(灣入)이 유독 깊었다. 태풍이 불어도 정박한 배들이 흔들리지 않을 듯했다. 서거차도를 들러 1시간 후에 돌아온다는 배 시간에 맞추느라 잰걸음으로 동도산에 올랐다. 보기보다 거친 동백덤불과 대숲을 뚫고 봉우리에 오르자, 300여 명 생목숨을 삼킨 맹골수도가 발밑이다. 부표를 띄워 표시한 침몰 자리를 향해 크고 작은 배 이십 여척이 즐비했다.

소주를 가져간 이는 바다 쪽으로 소주를 붓고, 기도할 사람은 기도를 했다. 바다는 환영처럼 쓸쓸하고 해는 밝았다. 좁은 봉우리를 비집고 텐트를 친 방송사 직원들이 내다보았다. '전원구조'라는 방송을 처음 내보낸 방송사였다. 정부가 이 사건 최악의 허위사실 유포인 '전원구조'에 대해 왜 응징하지 않는지 의아한 터라, 그들을 보는 내 눈이 곱지 못했다. 분한 마음으로 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조건 좋을 때 왜 구조하지 않았을까. 더 나쁜 상황에서도 인양을 하루 몇 구씩 하면서........'

원통하고 억울한 어느 엄마는 "나 건드리면 누구든 찔러 버릴 거야"라고 소리쳤다. 그런 말이라도 안 하면 숨을 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조에 일말의 도움을 주지 않은 채, 티벳의 대머리독수리 떼처럼 죽음을 지켜보아온 해경선들과 언론사들. 나는 다만 바다에게 부탁했다. 승선자 명단에 있건 없건 한 명 빠짐없이, 몸이라도, 내어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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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이 시신으로 돌아온 5월 1일 저녁 7시 배에서 시신을 수습해 내리는 동안 소방 대원 두 명이 흰 막을 펼쳐 가려주었다. ⓒ 조정


오후 1시 45분경에 회항하는 배를 탔다. 한 시간 후에 그 자리로, 단원고 여학생의 시신이 흘러들어 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 했다. 먼 바다로 가지 않고 마을을 찾아온 아이. 섬의 허리를 빙 돌아 섬의 가슴팍으로 파고든 아이를 마을 사람들이 수습한 모양이다. 그 무렵 나는 슬도 앞을 지나며 슬하(膝下)라는 단어에 눈물겨웠다. 슬하를 떠난 아이들.

갑판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실종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들 손가락이 왜 부러졌을까요?"
"잠수부들이 들어가니까 대부분 무언가를 꽉 붙든 채로 물에 떠있더랍니다. 굳은 손가락을 풀어내다가 그리 된 거지요."

그 외 말들은 기억하기도 싫으나, 이 대화만은 적는다. 그 아이들이 죽게 된 배후를 밝히지 않거나, 잊는 것은 범죄라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팽목항으로 돌아온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다이빙벨을 실은 바지선이 서망항 쪽으로 떠나고 있었다.

"다이빙벨이 왜 철수하나요?"

jtbc 기자들에게 물으니 헛헛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아이들 장례를 치르고 다시 진도에 온 부모들이 시위를 마친 후, 아이 둘이 시신으로 돌아왔다. 119 대원들이 수습해 앰뷸런스에 태우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나도 그 티벳의 대머리독수리처럼... 드라이아이스 위에 눕힌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 꼭꼭 여며주며 "우리 아들 추우면 안 돼요"라고 우는 엄마를 보았다던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죽은 아이라는 건 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이일 뿐이다.

애틋한 기다림을 모욕하는 사람들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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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마다 현수막 진도 군민들이 마음을 담아 마을 어귀마다 현수막을 걸었다. ⓒ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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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 진도 임회면의 가로수에는 빠짐없이 노란 리본이 묶여있어다. ⓒ 조정


정 많은 진도 사람들은 마을마다 실종자 생환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걸었다. 팽목항에서 임회면소재지까지 가로수에는 한 그루도 빠짐없이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서로 도움을 주려고 애썼고, 땅은 노란 유채꽃을 피워 애틋한 제 기다림을 보여주었다.

승선자 명단으로도 CCTV로도 확인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저 기다림에 응답할까 생각하며 진도대교를 넘었다. 섬 밖 육지에는 뻘소리, 뻘짓이 소란했다.

분향소에 간 대통령은 꽃 한 송이 들고 위패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서 갑자기 한 노파와 끌어안으며 사진을 찍었다. 저건 어느 나라 예법인가 어리벙벙한 사이,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대국민 사과라고 우겼으나 안 통했다.

이후 청와대는 종교지도자 몇을 불렀다. '그들'의 표정은 단장의 고통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직관력 뛰어난 고대의 부족민들은 괴이한 일이 반복되면 지도자를 제물 삼아 하늘에 죄를 고했다. 저 화기애애한 회동자들 중 누가 이 시대의 지도자일까.

열두 시간을 운전해 집에 돌아왔다. 음모와 생명 경시와 헌정 유린의 진앙지인 서울 가까이 오는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차단하고, 협박하고, 숨기고, 거짓말하는 정보 부유물 속에서, 나는 '대통령 책임 하에 300명 넘는 사람이 수중고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것을 '세월호 학살'이라고도 말한다.

이 억울한 주검들 앞에서 책임자가 해야 할 직임은 곡비(哭婢)이다. 울지 않고 세워지는 방책은 다시 비인간적일 터이다. 눈물 없는 지도자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세월호 #동거차도 #맹골수도 #예레미야 #세월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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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2000 한국일보로 등단. 시집 <이발소그림처럼> 공동저서 <그대, 강정>.장편동화 <너랑 나랑 평화랑>. 2011 거창평화인권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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