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말실수', 위대한 도서관이 태어났다

[가다툰의 네버랜드 21] 숨 막히게 행복했던 두 번째 이집트 여행

등록 2014.05.14 15:06수정 2014.05.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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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사는 기자가 본인의 가치관과 방식을 가지고 떠난 배낭여행을 주관적 관점과 감정으로 풀어낸 '여행기' 형식의 연재 기사이며, 일반적 여행 정보와 객관적 사실만을 엮은 기사와는 '다름'을 밝힙니다. - 기자 말

'소피, 우리 먼저 나갈게. 기차표는 우리가 끊어놓을 테니 걱정 말고 다섯시에 보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은준과 기남의 비어있는 침대와 쪽지 한 장이었다. 아침잠이 많은 이보와 내가 곯아떨어진 사이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알렉스를 둘러보러 나간 것이다. 좀처럼 일어날 줄 모르는 이보를 흔들어 깨워 겨우 채비를 한 뒤 숙소를 나왔다.

트램을 기다리며 첫 끼니로 산 샤와르마를 먹는데 반대편에서 우리를 보시며 미소 지으시던 할아버지가 샤와르마를 가리키시며 엄지를 치켜드신다. 맛이 있느냐 물으시는 것 같았다. 우리도 엄지를 치켜들며 아주 맛있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이렇게 이어지는 낯선 사람들과의 무언의 소통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루의 시작부터 괜스레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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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의 트램은 아랍어로만 표기되어 있는데다 복잡한 알렉스의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서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용하기 어려울 듯 했다. ⓒ 김산슬


우리의 목적지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트램은 처음이라며 설레니 이보가 깜짝 놀랐다. 체코에는 트램이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여서 그에겐 트램이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 트램의 이용료는 25pt(피아스타 Piastar, 파운드보다 작은 단위로 100 피아스타는 1파운드다, 피아스타는 아랍어로 '끼르쉬'라고도 불리며 두 이름 모두 사용된다). 채 오십 원도 안 된다. 이집트의 공공요금들, 특히 교통 요금은 십수 년 전 물가에서 뚝 멈춰버린 듯하다.

알렉스의 트램은 아랍어로만 표기돼 있는데다 복잡한 알렉스의 골목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서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용하는 데 꽤 애를 먹을 듯했다. 일부 가이드북에서 트램 노선과 주요 역을 다뤘지만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이 그 책을 봤을는지.

우리가 트램에 오르니 낯선 외국인의 등장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곧 우리가 "앗쌀라무 알레이쿰" 하고 인사를 건네는 순간 모두들 와하하 웃으며 인사에 화답한다. 뭐야? 외국인이 아니었잖아? 하는 표정으로 안부를 묻고 자신들의 일상을 풀어낸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처럼 트램 안의 모두가 수다를 떤다.


"곧 내려야 돼요. 한국 아가씨!"

그들은 우리가 행여나 잘못 내릴까봐 세 정거장 전부터 우리에게 곧 내려야 함을 알려주느라 바빴다. 트램 안의 모두가 같은 말을 해주는 걸 듣고 있자니 마치 아랍어로 쓰인 돌림노래 동요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우리가 폴짝 트램에서 뛰어내리자 다들 창밖으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신다. 연신 옆에서 싱글벙글인 이보는 어제부터 이곳에 홀딱 빠져버렸다. 카이로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닉슨 대통령의 황당한 실수가 만들어 낸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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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외벽에 크게 새겨진 한글, '월' 둥글게 도서관을 둘러싼 외벽에는 지구 상의 언어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여기에는 자랑스러운 한글도 새겨져 있는데, '세','월','름'이라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 김산슬


대학가를 지나 조금 더 걷자 눈앞에 익숙한 회색 빛깔의 거대한 벽이 보인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 장소가 내가 알렉스를 사랑해마지않는 가장 큰 이유다. 특이한 모습의 외관부터가 방문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도서관을 둥글게 둘러싼 외벽에는 지구상의 언어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노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여기에는 자랑스러운 한글도 새겨져 있다. '세' '월' '름'이라는 글자들이 선택돼 새겨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낯선 땅에서 내 나라 말을 보며 느껴지는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원전 288년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세계 최대 크기, 그리고 세계 최다 장서를 보유한 세계 최고의 도서관이었다. 지나가는 배에서 책을 약탈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파피루스 책을 빌린 뒤 베껴 쓰고서는, 원본을 자신들이 보관하고 필사본을 돌려주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은 책들이 모여 이뤄진 명성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명성을 떨치던 도서관은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황제의 이집트 정복에 한 번, 그리고 3세기 경 수차례 이어진 로마군의 습격과 약탈로 인해 잿더미가 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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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외부 ⓒ Adel Hamd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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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의 열주실을 연상케하는 파피루스 형상을 한 기둥들이 거대한 유리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 Adel Hamdi.H


그 후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에 의해 추진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 계획은 무바라크 전 대통령과 유네스코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시작됐다. 재미있는 것은 이 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이집트를 방문해서는 수십 세기 전에 불타고 없어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보고싶다 한 것이다.

그가 정말로 이 도서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던 것인지, 그 전설적인 도서관의 명성을 '다시' 보고 싶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1974년부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렇게해서 드디어 2002년. 웅장한 내부, 반짝거리는 눈으로 책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나오는 기분 좋은 에너지까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풍기며 새롭게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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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내부 ⓒ Adel Hamd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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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한국 책도 발견할 수 있었다. 북한 관련 도서도 옆에 비치되어 있다. ⓒ 김산슬


현재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의 수는 800만 권에 이른다고 하니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양이다. 물론 이 상징적인 건물을 재건할 수 있었던 데는 아랍 세계를 비롯한 유럽 및 세계 곳곳에서 보낸 기부금과 기부품의 도움이 컸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이토록 많은 도움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건 이 도서관이 단순히 이집트의 것이 아닌, 기원전부터 무려 300년 동안 인류의 문명 발전에 기여한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한다.
2011년 처음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나는 놀라서 떡 벌어진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내 평생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오직 책만을 위한 이토록 넓은 공간이라니!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의 열주실을 본 뜬 파피루스 형상의 기둥들이 거대한 유리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총 11층으로 이뤄진 도서관 중 5개 층은 지하층이었지만,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유리천장을 통해 지하층까지도 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맙소사!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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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가장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풍경 11층으로 이루어진 도서관 중 5개 층은 지하층이었지만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유리천장을 통해 지하층까지도 구석구석을 밝히고 있었다. ⓒ 김산슬


그리고 그곳에는 내 친구 아델이 있었다. 아델은 2년 전 첫 방문 때 찾았던 데스크에서 근무하던 사서였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와 차근차근 설명을 하며 메모까지 해주는 친절한 아델이 좋았고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곧 알렉스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2주 후 아랍의 민주화 혁명인 '아랍의 봄'이 일어났고 나는 이집트를 급하게 떠나야만 했다.

어느 날 문득 아델의 소식을 SNS에서 못 본 지 꽤 됐다는 걸 깨달았을 즈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주변에서 유혈 사태를 동반한 시위가 발생했으며, 세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는 기사를 봤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서관 주변이라니, 그는 아니겠지.'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사고와 그 즈음부터 보이지 않던 그의 소식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여행 노트를 샅샅이 뒤져 다행히 남아있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낼 땐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 다행히 그는 무사했다. 계정에 오류가 생겨 잠시 삭제했었다고 한다. 알 함두릴라(신에게 감사를). 본디 인생은 한치 앞도 볼 수 없다지만, 정말 매일마다 사람이 죽기도 하는 곳을 삶터로 두고 살아야 하는 이집트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쪽이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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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는 친구 아델.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친구다. ⓒ Adel Hamdi.H


여행을 하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걸을 때마다 많은 인연들이 걸어 들어와서 내 인생의 선물이 됐고, 그때마다 나의 마음은 한 귀퉁이씩 뚝뚝 떼어져서 그들과 떠났다. 그것은 그만큼 추억할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그만큼 재회를 약속하기 어려운 것들을 그리워하고 그래서 가슴 아파할 일도 많음을 뜻하기도 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이들을 마음에 품은 채 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의 여행을 이어나갔다. 인생은 공평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다.

"오 하느님, 맙소사! 어떻게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다시 만난 아델은 예상도 못한 손님의 깜짝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이었다. 처음 만난 곳에서 재회하는 반가움에 마음과 상기된 얼굴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아델은 내가 다시 이집트를, 그중에서도 알렉스를 찾아온 걸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엇보다 2년 전 딱 한 번 그것도 아주 잠시 만났을 뿐인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걸 고마워했다. 짧은 그 만남에도 아델이 내게 깊이 남았던 건 순전히 그가 보여준 친절과 진심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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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내부. 1층 입구에서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이다. 따라서 현재 시선의 높이보다 아래에 있는 층들은 모두 지하층이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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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색색의 조명들로 변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외부. 밖에서 바라보면 살짝 올라간 언덕 같지만 실제로는 저 부분이 도서관 내부에 태양광을 비춰주는 유리 천장이다. ⓒ 김산슬


살면서 꼭 붙잡고 싶은 인연을 만난다면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인생에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잠시 멀어진 것 같아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도, 마지막에 결국 남는 것은 진심이니 말이다. 진짜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결국 '진심'을 보여준 이에게 돌아가게 돼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신뢰와 진심뿐이다.

아쉽게도 아델이 퇴근하는 시각은 우리가 카이로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 시간이었다. 도서관을 나온 우리는 카이트 베이 요새도, 다른 관광지도 모두 건너뛰었다. 그저 해변을 걷고, 마주 오는 이들과 눈인사를 건네며 도시를 헤맸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어떤 인공적 건축미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지중해의 파도와 그 위로 걸린 하늘보다 멋있을 수는 없었다.

안녕, 사랑하는 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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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인공적 건축미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지중해의 파도와 그 위로 걸린 하늘보다 멋있을 수는 없었다. ⓒ 김산슬


숙소에서 은준과 기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 아딜과 작별한 뒤 어젯밤 그 식당에서 저녁으로 새우 만찬을 즐기고 우리는 마쓰르 중앙역을 향해 걸었다. 나는 밤의 마스르 역이 좋았다. 붉은 가로등 빛이 달빛만큼이나 포근했다. 그 달빛이 비치는 기다란 정거장의 모습이 좋았다. 바다 냄새가 실린 서늘한 바람이 좋았다. 아릇아릇 비추는 가로등의 모습이 어찌나 따뜻한지 마치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주황빛 가로등 아래 길게 이어진 플랫폼에 서 있노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것들은 둘러멘 가방 속에 전부 있었다. 그리고 어디든 함께 가줄 이가 있었다. 기차가 도착했다. 이제 카이로에 돌아가 마지막 이틀을 보낸 뒤 우리는 다합으로 가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낼 예정이었다. 언제나 사랑해 마지않았던 알렉스의 밤공기와 작별하는 마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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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의 마스르 역이 좋았다. 붉은 가로등 빛이 달빛만큼이나 포근했다. 그 달빛이 비치는 기다란 정거장의 모습이 좋았다. 아릇아릇 비추는 가로등의 모습이 어찌나 따뜻한지 마치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발목을 붙잡는 듯했다. ⓒ 김산슬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방문하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싶다면 넉넉히 하루를 할애하는 게 좋다.

도서관 본관 외에도 박물관과 몇몇 미술작품들이 있는 공간들이 있는데 이집트의 현대 미술 작품들도 있어 한번쯤 둘러볼 만 하다.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는 서적 및 기념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도 있다. 가격은 정찰제로 조금 비싸다 생각할 수 있으나 알렉산드리와 도서관의 모습을 앤틱한 느낌의 사진으로 담아낸 3파운드 짜리 책갈피는 선물용으로도, 개인소장용으로도 좋다.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면 도서관의 외부를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특히 밤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1번 트램을 타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간다.

▲ 도서관의 운영시간 : 이집트는 무슬림 국가로 금·토요일이 주말이다.
평일(일-목), 토요일 기준 11:00 - 19;00
금요일은 15:00 - 19:00
라마단 기간은 11:00 - 14:00 이다.

▲ 도서관 입장료 (2013년 1월 기준)
일반 10 EGP 학생 5 EGP
2개의 박물관은 각각 20 EGP(학생10 EGP)
콤보 티켓은 일반 학생 모두 45 EGP.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면 가이드 투어를 신청할 수 있는 데스크가 있고, 투어는 약 15분 동안 이뤄진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ALEXAND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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