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촛불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나

등록 2014.06.26 11:19수정 2014.06.26 11:19
0
원고료로 응원
2008년 열여덟의 봄

때는 5월,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었다. 우리들은 열여덟 살 여고생들이었고,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모의고사 점수에 울고 웃는 대한민국 수험생들이기도 했다. 나는 뉴스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학교에서는 만날 수 없는 현실 세계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당시 내 또래친구들 중엔 유독 뉴스를 챙겨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하지만, 우린 연예인 얘기만큼 어제 본 뉴스 얘기를 많이 했었던 것 같다.

비록 우린 매일 학교, 학원, 집만 오가야하는 수험생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나라가 어른들만의 나라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직 선거권도, 주민등록증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숨 쉬고 있는 나의 나라, 그리고 우리들의 나라이기도 했다. 어느날 뉴스를 봤다. FTA 체결로 인해 광우병에 감염된 소들이 섞여있는지 알 수 없는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거리의 아이들

그러한 뉴스를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음날 수업 중간 중간 쉬는 시간마다 교실은 광우병 소고기 얘기로 시끌시끌했다. 나라가 경제를 위해 국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담보로 한다는 사실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와 친구들은 화가 났다.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내게 촛불 집회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중학교 동창한테 광화문 앞으로 광우병 소고기 반대 촛불 집회에 함께 가자는 문자가 왔다고 했다.

거기엔 그 친구 말고 다른 고등학생들도 많다고 했다. 사실 우리에게 거리에서 촛불을 켜는 건 별로 낯설지 않았다. 초등학생 시절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중학생 땐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집회를 지켜보며 국민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땐 거리로 나가 촛불로 밝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너무 어렸었지만 이제 우리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충분히 실천할 수 있는 나이었다.

어느 5월의 주말, 어머니께도 숨김없이 말하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엄마, 친구랑 촛불 집회에 갔다 올게요." "너무 늦게 오지는 마. 중간에 전화 하고." 그때 까지만 해도 우리는 촛불 집회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나 보다. 그날 나랑 친구는 가는 길에 청계천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려 하얀 양초 두 자루와 양초에서 떨어지는 촛농을 받칠 종이컵을 사들고 뚤래뚤래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서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날은 내게 아주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가끔은 발언대에 나와 마이크를 붙잡고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대한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에 박수도 쳐주고 때론 웃기도 했다. 그날, 나는 나라를 위해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참 뿌듯했다. 진정으로 국민으로서 대접받는 듯한 그런 기분을 맛봤다.

소풍은 끝났다.

그렇게 내가 친구와 함께 소풍갔다 오듯이 촛불 집회에 다녀오고 열흘도 채 안되어서 온 뉴스와 신문 속 광화문 광장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탈바꿈 되어 있었다. 매일 뉴스에선 얼마 전의 나 같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물대포가 날아왔다. 그 광경이 너무 낯설었다. 얼마 전까지 내가 촛불을 켜고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물대포가 끝이 아니었다. 전경들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댔고,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광경에 나는 겁에 질렸다. 공포라는 것을 몸소 배웠다. 그 전까지 나와 내 친구들은 광장은 시민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광장을 채우면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5월, 그 이후로 대한민국의 광장은 영영 다시 온전한 시민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삼포세대가 된 촛불 소녀들

2008년,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앳된 여고생이었던 나는 지금 삼포 세대라는 말이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 대학교 5학년 취업준비생이다. 얼마 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한 대학동기가 이렇게 토로했다. 고등학교 3년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이렇게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입학했더니 끝이 아니었다고. 대학에서 또 4년을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점 받고, 밖에서 죽어라 스펙도 쌓았지만 취업 문턱은 너무 높기만 하다고.

그리고 만일 자신이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해도 부모님 도움없이 서울에서 생활하려면 결혼 자금 모으는 건 꿈같은 소리라고 했다. 당장 빌린 학자금 갚을 생각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훌쩍 자라버린 촛불 소녀들에게는 거리로 나갈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다. 나라를 걱정하기 전에 먹고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이십대들이다. 매일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으며 혀를 끌끌 차도 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면 취업에서 받을 불이익부터 걱정하는 것이 다 커버린 촛불 소녀들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2014년 가라앉은 열여덟의 봄

2014년 4월 16일 아침, 터덜터덜 취업 스터디를 하러 올라 탄 버스에서 무심코 들여다본 인터넷 뉴스로 세월호 참사를 처음 접했다. 6년 전처럼 여전히 대한민국이 돈을 위해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낱낱이 보여주는 참사였다. 이를 지켜보며 시간이 흐를수록 참담한 마음은 커져만 간다.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던 열여덟, 친구와 손잡고 거리로 나가 초를 밝히던 열여덟, 나는 그때 보다 더 무능하고, 나약한 시민으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져도 정년퇴임을 앞두신 아버지를 바라보면 차마 거리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두렵다. 2008년, 그때로부터 6년이 흘렀듯이, 또 다른 6년이 흐른 후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하지만 나는 안다. 아직 내 마음 속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록 지금은 현실에 짓눌려 목소리를 내기를 주저하고 있지만, 나와 같은 수많은 촛불 소녀들은 매일 밤 언젠가 될지 모를 화려한 재림을 꿈꾸고 있다.
#촛불집회 #2008년 #세월호참사 #시민 #광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투명가방끈 활동가, 퀴어예술매거진 《them》 발행인, 『퀴어돌로지』 기획 및 공동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