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세상의 사람들이 버린 딱 하나는...

[서평] 이경석 외 13인이 함께 쓴 <섬과 섬을 잇다>

등록 2014.06.30 10:27수정 2014.06.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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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섬을 잇다> 책표지 ⓒ 한겨레출판사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섬과 섬을 잇다>를 주말 내내 읽었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우리 이웃의 문제이면서 언젠가 우리 자신이 겪을지 모를 일들이다. 평택 쌍용차와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의 할매·할배들과 콜트·콜텍의 해고노동자, 현대차 비정규직, 재능교육의 학습지 교사들과 코오롱스포츠 노동자들의 애틋한 사연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대다수가 노동자이자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모른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구구절절 억울하고 분한 사연이 많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고.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니 '앞에 나서지 말고 중간에만 서 있으라'고.


하지만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이 넘는 싸움을 이어오고 있는 그들은 성격이 모나거나 눈치코치 없이 앞에 나서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정리해고 하지 말라! 비정규직 차별하지 말라! 노조활동 인정하라! 살던 대로 살고 싶다!' 들이다. 그것들은 결코 국가를 뒤흔들거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들이 아니다.

고립된 곳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웠네

그런데도 국가와 자본은 그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를 되풀이한다. 그 어떤 죽음과 절망 속에서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잘도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주변 사람들조차 무모하게 나서지 말고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말한다. 사람이 죽어나가고, 살아 있는 사람조차 공장 바닥의 나사 취급도 못 받는데 견디라고만 한다. 그들은 고립감과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아무 일 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바로 곁의 이웃조차 그 사실을 모른 채 싸우고 있는 작은 섬들. 하늘 위에 농성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또 수백 일을 싸우는 현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섬입니다. 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알려지지 않은 섬일 뿐만 아니라, 그 싸움의 정당성을 늘 공격하고 비난하는 제도와 시선의 장벽들에 갇힌 섬입니다. ('머리말'에서)

섬들이 늘어나면서, 억울함과 분노로 뒤범벅된 노동자들의 죽음 옆에서는 산 자들의 욕망과 무관심이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섬들은 그럴수록 더 외로워진다. 이 책의 산파 구실을 한, 그 외로운 섬들을 잇는 '섬섬 프로젝트'가 탄생한 배경이다.


14명으로 이루어진 공동 저자들은, 각각 만화와 글을 맡은 두 사람이 한 쌍이 되어 7개의 사연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각 꼭지 뒤에는 그 사연들이 펼쳐진 저간의 '역사'를 일지 형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나름대로 참신한 구성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실감 나는 만화를 통해 '섬' 이야기의 심장을 보여주는 방식이 이채롭다. 이들 이야기가 정색하고 다가올 때의 부담감이 한결 덜하다.

만화와 르포와 역사 기록이 어우러진 이 새로운 시도는 그 자체로 '섬'에 사는 주인공들에게 희망이 된다. 때와 곳과 사람들이 달라 그야말로 '섬'처럼 홀로 떨어져 있던 사연들이 이들 14명의 붓과 펜 끝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고립되어 있던 '섬'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던 이들이, 그들을 보며 함께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한숨을 내쉬던 사람들이 이 세상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외롭게 떠 있는 그 수많은 섬들이, 바다의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팔을 잡거나 어깨를 겯고 있듯이 말이다.

'섬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공동 저자들의 바람은 소박하다. 그들은 이 책 한 권이 막강한 국가와 권력을 이길 만큼의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책에 담은 그들의 소망이 장기투쟁 현장의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작은 울타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이 땅에 사는 한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든든한 연대감을 갖기를 원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복직 투쟁을 왜 포기하지 않느냐고. 우리의 대답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같은 고통에도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대답 가운데 적어도 이것 하나는 같다. '혼자 살 순 없지 않느냐.' 우리가 77일 동안 공장 안에서 단호하게 버린 건 혼자만 잘사는 방법이었다. 우리는 혼자 살고자 동료를 버리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봐왔다. 홀로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는 죽음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방법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았다. (35쪽)

쌍용차의 진실규명을 위해 여전히 싸우는 노동자들의 증언이다. 삶은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 이 세상은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그 자명한 진실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쉽게 망각하는가. 쌍용차와 강정과 밀양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말들은 우리 모두의 오래된 미래인지도 모른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작년에 낸 책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의 한 대목에서 교무실에 있는 교사들을 '섬'으로 표현했다. 서로간에 대화와 소통이 사라진 교사들의 모습을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섬'에 빗댄 것이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학교 현실을 이처럼 핍진하게 묘사한 비유도 없지 않겠다 싶었다. 저자의 탁월한 상상력에 감탄한 기억이 새롭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교무실에서 작은 '섬'처럼 살아가는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이 떠올랐다. 그 침묵하는 '섬'들에 좌절하면서 나도 모르게 조용히 '섬'이 되어가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이 땅의 수많은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며, 그 스스로 아이들에게 어떤 삶을 보여 주어야 하는가.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201쪽)

강정마을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실린 강 주교의 말이 문득 강렬한 화두가 되어 다가왔다. 나는 한 명의 교사일 뿐이지만 나에게서 온 학교의 변화가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말이다. '섬'과 '섬'을 이으려는 이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조용히 덮었다.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섬과 섬을 잇다: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이경석 외 113인 함께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 5. 21. / 279쪽 / 15,000원)

섬과 섬을 잇다 - 여전히 싸우고 있는 우리 이웃 이야기

하종강 외 지음,
한겨레출판, 2014


#<섬과 섬을 잇다> #한겨레출판 #이경석 외 13인 공저 #장기투쟁 사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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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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