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그날 이후 저는 '공기 대장'이 되었습니다

'하얀 공깃돌'로 남은 고모... 하지 못한 말 한마디

등록 2014.07.19 14:49수정 2014.07.19 14:49
3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공기놀이를 하는 초등학생들 ⓒ 권우성


"왜 자꾸 삼춘만 이겨!"
"어? 어! 그랬어? 미안 미안."
"에이 나 안 해!"


조카와 놀아준다는 것이 그만…. 아, 그녀가 삐쳐버렸다. 적당히 져주기도 하고 놀아줘야 할 것을, 시합을 하듯이 매번 이기려 들었으니 어쩌랴.

30여 년 전에도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공기를 제일 잘한다는 여자아이와 시합을 한 적이 있다. 그맘때는 여자 남자 사이에 놀이도 구분하고 따로 놀던 때여서 싸울지언정 같이 놀기란 쉽지 않았는데,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남녀 대항전을 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이겼다. 무척 뿌듯했다. 남자자식이 여자애들 놀이에서 이긴 게 뭔 자랑이냐 할지 몰라도 난 스스로 대견했다. 집에 와서도 식구들에게 자랑할 정도였다.

내가 공기를 열심히 한 것에는 나만의 사연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봄방학 때였으니 겨울 끝자락 즈음이겠다. 볕에 있어도 한참 웅크리고 있자면 손이 시렸으니 말이다. 그런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부르셨다.

"내 말 잘 들어라. 고모가 한 달 있다가 시집가. 너 절대 시집가지 말라거나 울면 안 돼. 고모 나이가 많아서 지금 꼭 시집가야 해. 지금은 이해 못하겠지만 그게 고모를 위하는 거야. 애기처럼 울면 안 돼."

아! 고모가 시집을 간다니…. 난 순간 멍해졌다. "애기처럼 울면 안 돼"라는 말에, 얼떨결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평소에 고모가 나에게 자주 하던 명령 같은 말이어서 왠지 지켜야 할 것만 같았다. 한 달 후라, 너무 갑작스러웠다. 시집가는 것은 잔치하는 거니깐 좋은 일인 것 같은데, 그 주인공이 고모인 것은 싫었다. 하지만 참기로 했고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때 난 고모가 엄마보다 더 가까운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 있는 고모 말고, 친척 중에 고모가 또 있다는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고모는 세상에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인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난 5살 때부터 고모와 자고 고모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도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고모가 나를 돌봐주셨던 거다.

노는 것을 형들한테도 배웠지만 고모에게는 더 고급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갈매기나 소나무를 그리는 법도 고모한테 배웠고, 개구리나 바람개비를 접는 법, 구구단, 감자밭에서 맹꽁이를 잡는 법 등도 고모한테 배웠다. 형 셋 틈에 낀 내 편이 되어준 사람도 고모였다.

"고모 한 달 있다 시집가... 너 절대 애기처럼 울면 안 돼"

a

소나무 ⓒ 윤성효


물론 그것에는 대가가 따랐다. 고모 말을 안 듣거나 시킨 것에서 어긋나면 엄청 혼이 났다. 말로 엄청 몰아세우면 정신이 다 없다. "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게 어디서 까부냐"며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연속해서 혼내는 것이 고모의 주특기였다. 그래서 동네 애들도 고모를 무서워했다. 그래도 나에게 고모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세련되고 가까운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당부를 받고서 몇 날이 지났을까. 고모가 조용히 날 불러 옆 밭 큰 소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고모는 아무 말 없이 미리 준비해놓은 하얀 돌을 서까래 망치로 다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이렇게 조용한 사람이 아닌 것을. 고모도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딱딱 돌 부딪히는 소리만 났고 돌조각만 느린 화면처럼 튀었다. 난 공기 만들어주는 것보다 고모가 시집 안 가는 게 더 좋은데…. 돌조각이 더디 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아직 차네. 춥지?"
"아니, 안 추워."
"공기는 다섯 개로도 하고 일곱 개로도 해. 일곱 개가 더 어려운 공기지. 이거 선물이야."
"……."

그 뒤로 난 고모가 생각날 때면 공기를 했다. 지금도 그 공깃돌을 만지작거려본다. 여러 번 집을 옮겨 다니면서 이제 공깃돌은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세 개가 없어졌으니 공깃돌 하나에 한 10년씩 세월도 같이 흐른 셈이다. 그 사이에 고모도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가셨다. 항암치료를 받다 돌아가신 탓에 머리가 하얀 공깃돌 같았다. 공깃돌을 만지작거리자니 고모 가시던 날 그 머리가 안쓰러워 쓰다듬어 드렸던 기억도 떠올랐다.

이 글을 쓰면서 분위기 좀 잡겠다고 음악을 틀었더니 마침 이선희의 노래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이 나온다.

"비바람이 없어도 봄은 오고 여름은 가고. 오 그대여. 내 남은 그리움 세월에 띄우고 잠이 드네. 꿈을 꾸네."

'추억의 공깃돌을 던지면' 난 고모 생각이 난다. 그 많은 시간이 있었건만 하지 못했던 말도 생각난다.

"고모 사랑해요."
#고모 #공기놀이 #공깃돌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단독] 대통령 온다고 축구장 면적 절반 시멘트 포장, 1시간 쓰고 철거
  2. 2 '김건희·윤석열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 스님들의 경고
  3. 3 5년 만에 '문제 국가'로 강등된 한국... 성명서가 부끄럽다
  4. 4 플라스틱 24만개가 '둥둥'... 생수병의 위험성, 왜 이제 밝혀졌나
  5. 5 '교통혁명'이라던 GTX의 처참한 성적표, 그 이유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