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끊어 나라빚 갚고 자주자강 이루세"

[노래의 고향 58] 국채보상가

등록 2014.07.23 14:54수정 2014.07.2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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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일어난 국체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 고택. 대구 중구 계산동의 상화고택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정만진


박찬호의 <한국가요사> 25쪽에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4일자에는 <국채보상가>라는 제목을 단 노래가 게재되어 있다. 작자는 함경남도 단천군 남문의 국채보상소 발기인인 이병덕, 김인화 등의 연명으로 되어 있으며, 가사는 4.4조에 한글이 섞인 시구로 이루어져 있다'는 기술이 나온다. 박찬호가 인용하고 있는 '<국채보상가> 전반부 일부' 중 가장 앞부분의 4행만 재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괄호 안의 한글은 재인용자 표기)

愛國心(애국심)헤愛國心헤
大丘(대구)徐公(서공)相敦(상돈)일세
一千三百萬圓(일천삼백만원)國債(국채)
設立(설립)同盟(동맹)斷烟會(단연회)라


노랫말에는 애국심이라면 대구 사람 서상돈이 최고라는 뜻과, 그가  금연으로 (돈을 모아) 1300만 원의 나라빚을 갚으려는 단체 결성에 앞장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한 이 대목은 1907년 당시 일본의 강압에 눌려 지게된 억지 나라빚이 1300만 원이었다는 사실과, 그 국채를 갚기 위해 민간 모금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1907년 국채는 당시 국가 예산 1년분

1300만 원은 그 무렵 우리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거금이었다. 사람들은 빚에 휘둘려 국가의 자주 경영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1907년 2월 21일, 김광제 서상돈 등은 지금의 상공회의소에 해당하는 대구민의소 창립총회와 국민대회를 열면서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모금운동인 국채 보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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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 공원묘지 내의 서상돈 묘소 ⓒ 정만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고종도 금연을 했다.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들도 앞다퉈 도왔다. 그러나 끝내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일본의 교묘한 탄압 공작에 밀려 결국 이 운동은 좌절하고 말았다. 일본의 대표적 방해는 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한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을 '모금한 돈 횡령' 혐의를 씌워 1908년 7월 12일 구속한 일이었다. 9월 22일 양기탁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그 이후 보상운동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채보상가> 노랫말에 등장하는 '大丘(대구)'


노래에 대구가 '大邱' 아닌 '大丘'로 표현된 점이 흥미롭다. 본래 '달구'였던 대구는 신라 경덕왕의 한화 정책 때(757년) '大丘'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조선 영조 때 대구의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 '丘'를 지명에 쓸 수 없다면서 '大丘'를 '大邱'로 바꾸어달라고 임금에게 청원했다.

영조는 "이미 1천 년이나 써온 이름이고, 다른 지방에서는 그냥 구(丘)를 지명에 사용하고 있는데 왜 유별나게 그러느냐"면서 도시이름 개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구 선비들은 기어이 대구(大邱)만 사용했고, 마침내 정조 이후 대구(大丘)는 대구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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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2월 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가 발표되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대구시민회관 뜰에 운동 90주년을 맞아 건립된 <대구상공회의소 국채보상운동기념비> ⓒ 정만진

그 대구(大丘)가 <국채보상가>에 등장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타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구(大邱) 아닌 대구(大丘)가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만약 타지인들 사이에 대구(大邱)가 일반화되었다면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국민적 노래에 대구(大丘)가 버젓이 등장할 리 없다.

대구에 만들어진 국채보상운동 기념물들

대구시민회관 앞마당에는 '대구상공회의소 국채보상운동 기념비'가 1997년 7월 세워졌다. "국채 1300만 원은 우리 한(韓)제국의 존립과 직결된 것이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고 주창한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된 대구민의소 자리가 바로 현재의 시민회관 터이기 때문이다.    

김광제와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한 광문사 자리에도 그 사실을 기념하는 작은 빗돌이 세워져 있다. 빗돌의 자리는 고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사범 졸업 이후 교생 생활을 했던 수창초등학교 뒤쪽 담장 바로옆이다. 대규모 인쇄소였던 광문사는 대한매일신보의 대구 지사 역할도 겸하고 있었으나 국채보상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신문사 일은 다른 곳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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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중구 국채보상공원 내의 국채보상운동기념관 안에 들어가면 국채보상운동의 내용을 두루 알게 된다. 사진은 안중근 의사가 국채보상운동 관서지부장을 맡아 평양에서 모금운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화면이다. ⓒ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관도 새로이 문을 열었다. 1998년 12월  도심 가운데 녹지에 국채보상공원을 설치했던 대구는 2011년 10월 5일 공원 안에 기념관도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도 열렬한 국채보상운동가였다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증언해주는 자료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다. 

서상돈의 묘소는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 공원묘지 안에 있다. 도심에서 거리가 한참 멀고 외진 곳이다. 하지만 그의 고택은 계산동 상화고택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어 찾기가 아주 수월하다. <국채보상가>가 '자주자강의 정신을 실천한 서상돈'(고택에 비치된 소형 홍보물 표지의 맨 위에 실려 있는 표현)을 두고 "지금 우리 국가 간난(艱難)한데 / 누가 이런 열성 가질런가 / 경상도 대구의 서공 등 / 사람마다 찬미하도다" 하고 칭송한 서상돈의 고택은 국채보상운동기념관 다음으로 답사자들이 많이 찾는 국채보상운동 유적이다.
#국채보상운동 #서상돈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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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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