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방문,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프란체스코 교황의 방한과 한국인의 빛

등록 2014.08.13 19:13수정 2014.08.1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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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한국을 방문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 EPA/연합뉴스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한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나같이 특정 기간에만 성당에 나가는 '사이비 신자'는 물론 카톨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교황의 방문은 가슴 설레는 일인 듯하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취임 이후 바티칸 궁전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 묶고 있으며, 마피아의 돈세탁 창구라는 오명을 썼던 바티칸 은행을 강도높게 개혁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은행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예수님이 잡혀갔던 날을 기리는 성목요일에는 최초로 이슬람 신자와 여성들의 발을 씻겨 주어 관습을 깨고 기득권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연이어 보여주는 모습들은 단순히 이벤트라고 치부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이 있다. 

교황은 베네치아나 피렌체가 아닌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있는 람페두사 섬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 섬은 아프리카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작은 보트에 몸을 맡겨 유럽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풍랑에 목숨을 잃었는데 교황은 바다에 헌화하고 숨진 이들을 위해 미사를 올렸다.

이탈리아 밖 해외 첫 방문지로 브라질을 택했었다. 브라질에서는 마약 소굴로 유명한 바르지냐 슬럼가를 방문하였다. 유럽 지역에서는 빈곤으로 허덕이는 알바니아를 처음으로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왜 하필 한국을 선택했을까? 교황은 한국 방문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한국인들에게, 전 세계에 보내려는 걸까?

계엄령 해제와 교황의 방문

가톨릭과 가장 가까운 아시아 국가는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인구의 8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이다. 스페인에게 300여년 넘는 기간동안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스페인의 종교 가톨릭이 자연스럽게 필리핀인들에게 스며들었다. 국력은 약해도 필리핀의 추기경 숫자는 한국보다 많았다.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필리핀을 두 차례 방문하였다. 첫 방문은 1981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집권하던 때였다. 1972년 대통령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하고, 영구 독재를 꿈꾸었다. 많은 민중들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이어졌다. 마르코스에게는 자신의 이미지를 미화시킬 그럴듯한 이벤트가 필요하였다.


그는 여러차례 교황에게 필리핀을 방문해 달라는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그 자체로 평화의 상징인 교황이지만, 가톨릭 국가 필리핀에서는 특히 의미가 깊었을 것이다. 그 때 요한 바오로 2세는 "계엄령을 철폐"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결국 교황이 방문하기 얼마 전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2월 17일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하였다. 교황이 발을 내디딘 곳은 마닐라 국제공항이었고, 그를 맞이한 사람은 마닐라 교구장 신 추기경 (Jaime Cardinal Sin)과 마르코스 대통령이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각계 각층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활발해졌고, 그 선두에는 야당 지도자였던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있었다.

아키노는 국가 전복 등의 날조된 죄명으로 투옥되었고, 40일이 넘는 단식 투쟁으로 저항하였다. 마르코스는 그런 아키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은 옥고를 통해 얻은 심장병을 치료하려는 아키노를 미국에 보내주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던 중에 교황의 필리핀 방문이 결정된 것이다. 계엄령을 철회한 마르코스는 선거에 출마하였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아키노는 미국에서 이를 맹렬히 비판하며 "암살자의 총탄에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라며 마닐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정부측 군인들에게 호송되어 트랙을 내려오다가 총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호송하던 군인이 아키노를 쏘아 즉사시킨 것이다. 얼마 전에 그 트랙을 내려오던 사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필리핀 정부는 이후에 공항 이름을 NAIA (Ninoy Aquino Interantional Airport)로 개명하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일 동안 필리핀에 머물렀다. 그는 첫 번째로 400년 전통의 산토 토마스 대학교(University of the Santo Tomas)를 방문해 젊은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이 대학교는 스페인 신부들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가톨릭 대학교다. 미국이 "미개한 필리핀인"들을 개화시키기 위해 식민 통치를 결정하였다는 논리에 대항해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보다  훨씬 오래된 대학교라고 많이 강조된다.

하바드 대학교는 미국 최초의 대학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필리핀에는 대학 교육이 실시되었다는 사실로 필리핀의 지적·정치적 능력을 선언하는 말이다. 교황은 이후 톤도의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리잘 공원에 가서 17세기 일본에서 순교한 필리핀인 로렌조 루이스와 다른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식을 행하였다. 이는 로마 이외에서 행한 최초의 시복식이었다.

교황과 민주주의의 만남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번째 필리핀 방문은 1995년 세계 청년의 날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교황을 맞이한 사람도 역시 신 추기경과 당시 대통령 피델 라모스였다. 이 또한 의미 깊은 환영이었다. 라모스 대통령은 80% 이상의 국민이 가톨릭을 믿는 아시아 최대의 가톨릭 국가에서 최초로 기독교 신자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었다. 또한 그와 신 추기경은 마르코스의 오랜 독재를 끝내고 1986년에 피플 파워 국민 혁명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니노이 아키노의 암살 이후 거리는 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으로 가득찼다. 마르코스는 이러저런 방법으로 아키노 암살로 초래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였지만 이 때 일침을 놓은 사람이 신 추기경이다. 추기경은 이후에도 반 마르코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마르코스는 다시 한 번 비상선거를 제안하였고,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와 맞붙었다. 마르코스가 장악한 국회와 달리 민중들의 개표기구 남프렐(NAMFREL, 자유선거 국민운동본부)는 코라손의 승리를 발표하여 두명의 당선자가 대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런 상황을 깨뜨린 것이 라모스 대통령이었다. 당시 부참모총장이었던 그는 마르코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체포 위협을 피해 시내에 있는 아기날도 캠프로 피신하였다. 이 때 신 추기경은 라모스와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고, 국민의 80%인 가톨릭 신자들은 추기경의 호소에 구름같이 몰려들어 중심부의 에드사(EDSA)를 메웠다.

마르코스는 폭탄을 투하해서라도 시위대를 밀어버리겠다고 하고 탱크를 보냈지만, 그 앞에는 수녀들이 기도를 하며 독재에 저항하였다. 비폭력과 평화의 상징 가톨릭이 폭력과 야만을 삼켜버린 순간이었다.

교황의 두 번째 방문에 약 300만 명의 필리핀인들이 거리에 서서 그를 환영했다. 다음날인 1월 13일(필리핀은 이때 우리나라의 초가을 날씨 정도로 선선하다), 교황은 산토 토마스 대학교에서 열리는 국제 청년 포럼에서 대표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또한 20여만 명의 학자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였다.

일요일인 15일에는 퀴리노 그랜드스탠드에서 열리는 세계 청년의 날 폐막식에 참가하였는데, 이때 모인 사람은 약 400만 명으로서 교황의 재위기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행사였다.

교황이 비추는 빛은 희망인가

프란체스코 교황은 명목상으로는 대전에서 열리는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 계획을 확정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방한 첫날, 바티칸 국의 수장으로서 한국의 통치권자인 박근혜 대통령을 만날 것도 계획되어 있다.

교황의 한국 방문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한창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 개입이 주요 사회 이슈인 상황이었다. 불법 대선 개입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다. 박 대통령의 사전 인지 여부와는 독립적으로 불법 대선 개입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박 대통령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시 교황 방한 이슈가 이 문제를 덮기 위한 물타기인지 아니면 교황의 이미지를 이용해 방문을 추진하려는 세력들과 한국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일보 전진의 빅딜인지 고민했었다. 마치 필리핀에서 계엄령 해제를 약속받고 마르코스의 초청에 응해 주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선례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그리고 백여일 동안 온 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대통령의 눈물도 있었고, 잊지 않겠다는 약속들도 난무하였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눈물은 마르고 사람들의 기억은 사라졌다고 확신하는 이들이 공공연하게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언론은 정권의 앵무새가 된지 오래여서 뉴스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닌 대본이 되었고, 야만은 정치와 사회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는 군대 내 엽기적인 폭력 살인사건과 학교에서의 구타 살인사건 등 입에 담을 수 없는 험악한 일들이 터져 나왔다.

한국은 급속한 물질적 성장과 '가만히 있는' 정신적 지체의 괴리가 가장 큰 사회들 중에 하나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한 사람이" "내탓이오 내탓이오"를 외치고 가슴을 두드리며 회개하기보다는 그저 "네 탓이오, 남 탓이오, 모두 아랫사람 탓이로소이다"고 고함지르는 사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과 교육과 미래는 빛을 잃어 가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벗' 프란체스코 교황의 방한이 이들을 감동시켜 회개하고 반성하도록 만들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따끔한 일침으로라도 이들을 치료하기를 기도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한국인들의 가슴에 남을 수 있는 무언가인 "프란체스코의 빅딜"이 꼭 있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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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방한 #필리핀 역사 #프란체스코 교황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플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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