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했던 북촌의 46시간... 역사책 한 권 쓰겠네

[북촌기행②] 북촌 계동길(상) ― 역사의 보물단지, 현대 사옥 언저리

등록 2014.11.15 17:41수정 2014.11.1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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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동길 정경 평온해만 보이는 계동길은 갑신정변, 건준 결성, 우익정당 조직, 3.1운동 물밑작업 등 굴곡진 근현대사의 물줄기가 소용돌이 친 곳이었다 ⓒ 김정봉


북촌은 당대 권력을 쥐락펴락한 실세들이 모여 살다보니 근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다. 계동의 집들과 건물, 계동·재동·가회동에 살았던 인물만 엮어도 훌륭한 근현대사가 된다. 대원군의 개혁정치, 갑신정변, 3·1운동 물밑 작업,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우익정당 조직 등 굴곡진 근현대사의 물줄기가 북촌에서 소용돌이 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북촌 중에 특히 중앙학교에서 현대사옥으로 이어지는 계동길은 소용돌이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계동의 유래를 들어보면 참 재미나다. 계동은 제생원에서 나왔다. 제생원이 있다 하여 붙여진 동네 이름, 제생동(濟生洞)은 계생동(桂生洞)과 섞여 불리다가, 계생동이 기생동(妓生洞)으로 들린다 하여 아예 '생'자가 빠지고 그냥 계동으로 바뀌었다 한다.


승문원·제생원·관상감·경우궁·계동궁...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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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집터에서 본 계동 현대사옥 김옥균은 현 정독도서관 자리에 살았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갑신정변 현장이었던 현대사옥이 훤히 보인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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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옥 정경 현대사옥 자리에는 승문원, 제생원, 경우궁, 계동궁, 관상감이 있었다. 지금은 표지석에 이름만 남긴 채 사라져 그 흔적을 알 길이 없다. 관상감 관천대만 비교적 온전히 남아 터를 지키고 있다. 멀리 키 작은 첨성대, 관천대가 살짝 보인다 ⓒ 김정봉


무심히 지나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동길 어귀, 아치형틀에 고동색 줄무늬 건물, 누가 봐도 현대 사옥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려 우리와 무관한 재벌 건물쯤으로 여기며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계동 현대 사옥이 들어선 터와 언저리는 역사의 보고요, 현장이다. 이장(移葬)한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마냥 주인 눈치 보며 구석 찾아 들어선 몇 개의 표지석이 그 자취를 남겼다. 

조선 초만 해도 외교문서를 담당했던 승문원(承文院)과 서민의료기관인 제생원(濟生院), 기상업무를 맡아보던 관상감(觀象監, 서운관이 바뀐 이름)이 짜임새 있게 들어선 곳이었다. 지금은 별을 관찰하는 관상감 관천대(觀天臺)만 옹색하게 남아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승문원은 세종 때 경복궁으로 옮겨가고 제생원은 세조 때 혜민서에 병합되어 대신 경우궁(景祐宮)과 계동궁(桂洞宮)이 들어섰다. 경우궁은 순조의 친모, 수빈 박씨(綬嬪朴氏)를 모신 사당이었고 계동궁은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의 집이었다.

현대 사옥 이쪽저쪽에 있던 경우궁과 계동궁은 갑신정변 때 고종과 왕비의 임시처소가 되면서 근대사 몇 쪽을 담당하였다. 승문원, 제생원, 관상감, 경우궁, 계동궁은 표지석에 이름만 남긴 채 휘문학교를 거쳐 현대사옥 밑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현대그룹 사옥에 묻힌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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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총국 정경 꼭 130년 전, 이곳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총판 홍영식의 주최로 우편제도 도입 축하잔치가 열린 곳이다. (종로구 견지동 소재)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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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집터 정독도선관 안에 있다. 언덕에 있어 북촌이 다 내려다보인다. 김옥균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서재필 집이 있었고 좀 떨어져 홍영식, 박규식, 서광범 집이 있었다 ⓒ 김정봉


1884년 12월 4일 밤 9시가 지난 시각, 우정국 만찬회장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꼭 130년 전 일이다. 우리나라 첫 우편제도를 도입했다 하여 벌인 잔칫날이었다. 급진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도했다. 이 때 경우궁, 계동궁이 있던 현대 사옥 자리는 정변의 주요 현장이었다. 

주도자들은 우정국 상황을 정리한 후, 일본 공사관에 들러 병력동원 약속을 재차 확인하는 동시에 창덕궁에 머물고 있던 고종과 왕비를 경비하기 좋은 경우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이 자리에서 수구 대신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정변이 일어난 날 자정에서 익일 새벽 무렵이다. 청과 은밀히 내통하던 왕비의 계속된 환궁 요청에 정변 이튿날 오전 10시, 일단 거처를 계동궁으로 옮기고 개화파와 종친의 연립내각을 발표하였다.

주도자들은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던지 끈질긴 환궁 요구를 수락하여 결국 오후 5시, 창덕궁 관물헌으로 환궁하였다. 익일(세쨋날) 오전 9시, 사회개혁과 근대화의 내용을 담은 혁신정강을 발표하고 서울 요소에 게시하였다. 오후 3시, 왕비와 내통하던 청군은 일본의 묵인 하에 창덕궁으로 진입하여 정변은 막을 내렸다. 3일천하, 시간으로 따지면 46시간에 불과하였다. 

갑신정변은 근대국가건설과 자주독립이라는 그럴듯한 정강에도 불구하고, 반외세를 주창하고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과 달리 극복대상이었던 외세, 일본을 등에 업고 정변을 일으켰다는 점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

갑신정변 주도자들은 북촌에 살던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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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동 백송 현 헌법재판소 안에 있다. 600년 묵은 나무로 조선의 역사와 함께했다. 이 나무 밑에 홍영식과 박규식 집이 있었다. 홍영식 집은 갑신정변 이후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들어섰다. 뒤로 살짝 보이는 집은 윤보선 집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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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수 집 1945년 8월18일 고려민주당이 결성된 곳이다. 원세훈이 위원장, 이 집 주인이었던 한학수가 재정을 맡아 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유명한 한정식집이 들어서 헐리진 않았다. ⓒ 김정봉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이다. 모두 잘나가는 양반집 자제로 남 부러울 게 없었다. 김옥균은 개혁세력으로 고종의 총애까지 받았고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의 차남이었으며,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로 북촌 땅 2177평을 소유한 부자였다. 서재필 또한 일본 육군학교에 유학한 잘 배운 청년 지식인이었다.

이들 모두 북촌에 산 이웃사촌들. 김옥균은 정독도서관 자리, 그 옆에 서재필이 살았다. 현(現) 헌법재판소 백송(白松) 근처에 홍영식 집과 박규수 집이 있었다. 박규수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사상의 계승자이자 개화사상의 선구자여서 사상적으로 이들 청장년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서광범은 감고당길,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사이에 집이 있었고, 박영효는 인사동 경인미술관이 집이었다. 모두 한 발짝 걸어 나오면 만날 수 있었다.

현대 사옥이 들어서기 전 이 터에는 옆에 있는 원서공원과 함께 휘문학교가 있었다. 휘문학교는 민영휘가 세운 학교로, 휘문의 '휘'도 여기서 왔다.

민영휘는 이재에 밝은 대표적인 권력형 비리축재자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한 대가로 관직과 재산을 하사받은 친일 반민족적 행위자다. 이런 인물이 '교육사업'에 뛰어든 게 아이러니하지만, 아직 그의 후손은 휘문 이사장으로 건재하다.    

어쨌든 휘문(중)학교는 해방 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주도한 첫 정치집회가 열린 장소로 역사의 일면을 장식하였다. 친일행위자가 세운 학교에서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여운형이 "조선민족 해방의 날은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대중연설을 하였으니 감회가 더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최초의 정치집회 장소, 휘문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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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빌딩 잿빛 건물이 보현빌딩으로 건준 창립본부였으나 흔적이 사라진지 몇 해 지났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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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집터 계동에서 원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중턱, 안동칼국수 집이 여운형집 이었다. 이마저 도로가 나는 바람에 집은 동강나 지금에 이른다. 고갯길과 보현빌딩, 휘문학교를 바삐 다녔을 여운형의 발길이 아른거린다 ⓒ 김정봉


현대 사옥 서쪽 '산내리한정식' 집은 을사조약에 반대한 한규설의 손자 한학수가 살던 집으로, 주로 우익진영의 회합장소였다. 민주당 이름이 처음 역사에 얼굴을 내민 고려민주당이 결성된 곳이다.

이 한정식 북쪽 보현빌딩은 임용상의 집터로, 건준(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 창립될 당시 창립본부였고 건국활동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 아무런 표시 없이 집이 헐리고 잿빛 건물이 들어섰다. 해방 직후 위아래 집에서 성격이 다른 정치세력이 태동하고 있었다.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기억은 온전히 우리 몫이 되었다.    

현대 사옥 뒤편, 계동에서 원서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 중턱에 여운형 집이 있었다. 큰길이 나면서 집이 동강 나버렸고, 현재 '안동칼국수' 집이 들어섰다. 불운은 계속되는지, 이 집은 몇 년 전 불에 타 새 단장하였다. 여운형의 자취는 더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고갯길과 보현빌딩, 휘문중학교를 분주히 오갔을 여운형의 발길이 아른거린다. 

갑신정변, 건준, 여운형의 생을 말하자면 근대사와 해방전후사 전면을 다루는 것이어서 이를 소화하기에는 힘이 부치고 지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오래된 주막의 주모가 계동 사람에 대해 옛 이야기하듯 한 것이니 가볍게 듣고 지나갈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뭉개지고 사라지고 묻히는 근현대사의 유적에 대한 기억과 걱정도 했으면 하는 바람은 크다.
#계동길 #현대사옥 #갑신정변 #건준 #경우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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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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