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차린 '항암 밥상'... 그나마 남편이 낫네

[나의 암 극복기⑥]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고통이 서러움을 눌렀다

등록 2014.12.12 20:58수정 2014.12.12 20:58
5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암 환자를 위한 것이라며 차린 아들의 밥상은 생식에 가까웠다. ⓒ 구글 무료 이미지


닷새 만에 퇴원해 집에 왔는데 다섯 달은 흐른 듯했다. 병원에 들어갈 때 많이 버려서 그런 지 집이 헐렁해 보인다. 그 헐렁함에 헐렁한 몸뚱이 하나 보태고 보니 집이 꽤 낯설다.


퇴원한 날 밤에 나를 제외한 세 식구가 모여서 회의를 하는 눈치더니,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서 간호할 생각인가 보다. 남편은 시아버님 때문에 시골로 내려가고 큰 아이는 출근을 했다. 첫 당번은 아들인 모양이다. 일주일씩 돌아가며 나를 돌보기로 했단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나중에 닥칠 어려움을 짐작도 못 하고, 직장에 휴가를 내면서까지 엄마를 돌보기로 한 아이들이 고마웠다. 아니, 우리 식구 누구도 나중에 닥칠 지옥을 짐작하지 못했다.

저 혼자 먹을 음식은 제법 만들어 먹는 아들은 뭘 하는지 종일 동동거리며 바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주방으로 가 보니, 아들은 인터넷에서 암 환자에게 좋은 음식 재료를 검색해서 장을 잔뜩 봐다 놓고 요리법을 찾고 있었다.

퇴원하면서 목의 호스는 떼어 냈다. 당연히 거기 달린 이물질 주머니도 떼어 냈다. 두 개의 호스를 꽂고 있다가 한 개가 되니 그나마 홀가분하다. 따라서 집에 오면 마음이 좀 편할까 싶었는데 오히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간사한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 오만가지 생각 중에서도 학교 생각이 제일 많이 난다. 달력을 보고 계산해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이다.

수술하던 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지만...


남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집에서 사고를 제일 많이 치는 사람이 나란다. 나 역시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대신 얼른 딴소리를 한다. 2012년 3월, 그러니까 수술하던 해에 나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대학교에 입학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내가 꼭 해 보고 싶은 일이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자동차 정비고, 또 하나는 관광가이드다. 관광가이드에는 국내가이드와 인바운드, 아웃바운드가 있다. 나는 인바운드 가이드가 돼서, 우리나라로 오는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과목이 국제관광이다. 외국어 수업이 가장 어려워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지만, 다른 공부는 할 만했고 학교생활도 재미있었다.

학생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언니였다. 자기 엄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게 미안하고 송구스러워서 아예 부르지 않는 학생들도 있지만, 뜻밖에 친절하고 잘 따르는 학생이 많아서 학교 생활을 하는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 했다. 문제는 교수님들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교수님들은 호칭 때문에 잠시나마 어려웠다고 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니 통증 때문에 고통스러운 중에도 미소가 나온다.

그러나 그 미소도 잠시. 혹여 학교를 못 다니게 될까봐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교수님들, 강의실과 교정이 스르륵 눈앞으로 지나간다.

아, 나는 여기서 끝인가! 이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걸까. 칼로 잘라낸 상처보다 가슴이 더 아리고 아프다. 남편과 아이들 몰래 진학 학원에 다니던 일, 모의고사에서 그 어려운 영어와 수학 점수가 잘 나오면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던 일 등이 뇌리를 스친다.

서러움에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프니까 수술한 부위에 통증이 더 심해진다. 겁이 나서 울음을 그쳤다. 통증이 얼마나 심한 지 서러움에 에이던 가슴이 오히려 진정이 된다.

시계를 봤다. 아직 약 먹을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병원에서 간호사가 나에게 하던 행위를 떠올려 봤다. 가슴에 연결된 호스로 이물질이 잘 빠지지 않으면 손으로 짜던 생각이 났다. 손으로 짜면 무척 아팠던 기억도 함께 났다. 그래 한번 해 보는 거야!

유방에 연결된 호스에 달린 작은 펌프를 조심스럽게 펌프질했다. 이물질이 호스를 타고 주머니로 흘러들어 간다. 그 양이 제법 많다. 원래는 수술 후에 수술자리에 고인 이물질이 자연스럽게 호스를 타고 이물질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억지로 짜니 죽을 만큼 아프다. 마른 눈물이 찔끔찔끔 난다. 점점 이물질이 나오는 양이 줄어든다. 펌프질을 멈추었다. 어쩐 일인지 통증도 줄어들고 가슴도 조금 시원해졌다. 통증이 통증을 잡은 것이다.

아들이 차려 준 생식에 가까운 밥상... 대견했다

잠깐 잠이 들었었나 보다. 아들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니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을 챙겨 왔다. 반찬을 보니, 채소를 그냥 생것으로 썰어서 담은 것과 된장, 고추장이 전부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지고 궁리를 해도 생소하기만 한 암 환자의 식단. 음식을 만든다는 게 무리인가보다. 나는 호들갑에 가깝게 '맛있다'를 연발하며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아들이 대견해서 웃음도 같이 먹었다. 아들의 음식 솜씨가 좀 나아질 무렵 일주일간의 임무가 끝나고 딸의 당번이 시작됐다.

딸 역시 일주일간 휴가를 받았는데, 엄마를 돌본다는 놈이 한 이틀은 동생이 해 놓은 음식을 챙겨주더니 음식이 떨어져 가니 안절부절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음식이라고는 라면밖에 끓일 줄 아는 게 없으니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그렇게 민망스러운 딸의 당번도 끝나고 이번에는 남편이 시골에서 올라왔다. 남편의 당번 기간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시골에 계시는 97세의 아버님을 모시느라고 골몰하는 중이다. 아버님께 걱정을 안 끼쳐드리려고 내가 수술한 것을 비밀로 하기로 했기에 그냥 서울에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말씀드리고 왔단다. 남편은 34년 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모시겠다고 낙향을 했다. 하지만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는 분이 계셨기 때문에 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이들이나 남편이나 거기서 거기인 셈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편의 음식은 먹을 만했다. 남편은 암 환자가 먹으면 좋은 음식 책을 사서 들여다보며 연구한 음식을 만든다. 그것도 싫은 내색, 귀찮은 내색 한 번 없이 이것저것 골고루 만들어 주는 편이다. 이제 퇴원한 지 2주가 지나고 항암을 할 시기가 돌아왔다.
#퇴원 #늦깎이대학생 #고통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