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지... 살아나서 큰일인데!"

한많은 삶 살다가 간 무명천 할머니 생가 방문기

등록 2014.12.17 14:16수정 2014.12.17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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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당시 턱에 총을 맞아 평생동안 무명천을 둘러매고 살다 돌아가신 진아영 할머니가 살았을 적에 촬영한 동영상을 일행이 보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인 에드워드 뭉크의 <절규>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 오문수


"차라리 죽지! 살아나서 큰일인데!"

무명천 할머니 진아영씨 동영상에 나왔던 한 지인이 한 말이다. 주름과 고통스러운 얼굴. 살아있음이 죽음보다 훨씬 고통스러움을 본 진아영 할머니의 지인은 "차라리 죽지 왜 살아났나!"라고 탄식했을까.

여수에도 제주 4·3평화공원 같은 공원을 건립하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한 여수현대사 평화공원 추진위원단 일행이 방문 이튿날 무명천 할머니로 알려진 '진아영' 할머니 생가를 방문했다. 진 할머니 댁은 제주시 한림읍 월령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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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령리는 선인장 재배로 이름난 곳이다. 진아영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선인장 농장 모습이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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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 돌담에 누군가가 '무명천 할머니 삶터'라는 글귀를 새겼다. ⓒ 오문수


제주시를 떠나 진 할머니 댁을 방문하려면 애월읍을 거쳐 한림읍으로 간다. 일행을 안내한 전임 4·3연구소장 김창후씨가 애월읍 해안도로를 따라 한림읍으로 가는 버스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귀촌한다는데, 애월읍은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오는 곳입니다. 이효리 집이 이곳에 있고 박지성도 땅을 샀다는 설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이 총 5억 원 이상 투자하면 영주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해안도로에는 카페와 숙박시설 등이 계속 들어섭니다."

예쁜 해안도로 주변에는 그림 같은 집과 카페들이 들어서고 바다와 어우러진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외지인들이 귀촌한다는 건 살기 좋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 평화는 10분도 못 되어 탄식으로 변했다.

진아영 할머니의 동영상은 4·3의 비극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고 지도자들의 잘못된 선택이 죄 없는 양민에게 천추의 한을 낳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


무명천 할머니의 처절한 아픔을 가슴속 깊이 느끼다

진아영 할머니는 4·3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49년 1월 북제주군 한경면 관포리 집 앞에서 무장대로 오인한 경찰이 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당시 나이 35세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할머니는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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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진아영 할머니의 살아생전 시절에 촬영한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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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보낸 싯귀와 할머니의 영정사진 ⓒ 오문수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어 소화장애를 겪으며 진통제와 링거액이 없으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창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무명천을 두르고 살던 진할머니는 후유장해와 심장질환, 골다공증 등으로 혼자 살 수 없게 되자 성 이시돌 요양원으로 들어갔다가 2004년 9월 8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두 평쯤 되는 안방과 한 평쯤 되는 골방에는 할머니의 삶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낸 시와 그림과 글이 걸려 있었다. 살았을 적 자신이 당한 일을 얘기하며 무명천을 벗은 모습에는 없어진 턱과 몇 개의 이빨만 보였다. 귀 기울여 들어도 턱이 없으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는 모습에 일행은 침을 삼키며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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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 뒷곁에는 한겨울인데도 예쁜 꽃이 피어있었다. 할머니의 넋일까?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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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에서 20여미터 떨어진 바다에는 세찬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 시대의 파도를 고스란히 맞아 부서지는 모습이 떠올랐다 ⓒ 오문수


고인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던 일행은 고통의 세상을 잊고 영면하기를 빌며 고인의 영전에 절을 올렸다. 20여미터쯤 떨어진 바닷가에는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커다란 바위 하나가 파도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포말 속에서 무명천 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아낙네가 시대의 파도에 휘말려 55년 동안의 긴 세월을 부서지고, 깨어지고, 망가졌을 텐데… 나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부디 고통 없는 좋은 곳으로 가세요.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무명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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