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기록,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을 읽고

등록 2014.12.28 14:28수정 2014.12.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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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책 표지 ⓒ 이주영


잃어 버리는 것과 잊어 버리는 것은 다르다. 나는 건망증이 심해 핸드폰과 지갑을 수없이 잃어 버리고 다녔다. 멍청함에 대한 자책과 돈으로 환산되어 돌아오는 현실적인 고통에 나는 애써 '잃어 버린 것'을 잊어 버리려 애썼다.

그 습관은 불편하고 복잡한 사회적 사건들을 외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언젠가 굵은 헤드라인으로 만났을 외규장각에 대한 소식 역시 내겐 생소했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는 잃었던 외규장각 의궤를 다시 되찾기 위한 고군분투의 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다. 나는 기억하려, 책을 펼쳤다.


의례는 그 시대의 다양한 문화와 철학을 담고 있다. 혼인의례 속 대추를 던지는 의식 하나에도 다산에 대한 기원과 인력이 중요했던 농경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듯이 의궤는 여러 줄기로 뻗어 그 시대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고문이다. 따라서 의궤를 잃은 것은 조선시대의 핵심적인 시간을 빼앗긴 격이다.

박병선 박사가 한국도 아닌 프랑스의 국립도서관 창고에서 의궤를 발견했을 때, 코끝에 달려든 잃어 버린 100여 년의 묵향에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박사가 의궤 반환을 위해 투병 중에서도 애를 쓰고 한국에 돌아온 의궤를 보고 나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순간의 장면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의궤가 처음 발견된 지 30년이 더 지나서야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도 긴 설명이 필요했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각국의 이해관계는 팽팽하게 마주했다. 하나를 내주면 귀찮은 선례가 되어 100개의 다툼이 예고되어 있었고, 한 발자국을 물러나면 끝까지 밀려 반쪽자리 반환만 남게 될 상황이었다. 날 선 공방의 끝엔 항상 도돌이표가 그려졌다. 아무리 지쳐도 시간과 말을 아낌없이 할애하는 노력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한쪽의 열정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순식간에 판도가 뒤집히기 때문이다. 끝이 없어 보이는 협상의 페이지를 읽으며 나는 두어번 백기를 들고 책을 덮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책을 펼쳤다. 그들의 진정성을 존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들이 겪은 고통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협상이 20년 동안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들려주며, 당시에 정신을 넘어 신체마저 괴롭혔던 저자의 회의와 격한 감정 역시 담아낸다. 하지만 그 고통이 개인에 대한 증오나 분노로는 뻗지 않는다. 저자는 마담 상송이 고집스런 의견을 낼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위치와 배경을 인정하고 그녀의 철저한 신념을 존경한다.

그리고 '적이자 동지'였던 프레데릭을 향한 고마움을 많은 페이지를 통해 말한다. 또한 저자가 잊지 않고 등장 시킨 많은 이들은 책 속에서 하나같이 소중히 다뤄진다. 저자는 의궤 반환을 위해 거쳐간 모든 이들을 존중하며, 이 과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협상의 결과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 역시 중요했다는 점을 말하는 듯하다. 


모든 일은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의미를 찾기 위해선 기록만큼 '의미'있는 일이 없다. 이 책은 누구보다 저자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아이들에겐 너무도 바쁘기만 했던 외교관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외교관들에겐 마음으로 전하는 '대통령의 펜'이 되는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잊지 않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고통조차 잊어 버리려 했던 나의 건망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하루하루 더 많이 잃어 버렸고 공허함은 커져갔지만 외면만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강화도 외규장각에 그대로 남아 전해졌다면 더 좋았을 '외규장각 의궤'는 한 번의 약탈을 겪어내고 더 깊은 시간과 함께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들의 치열했던 20년 협상의 기록은, 의궤의 유랑이 '145년'이라는 수적인 시간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그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기에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나는 잃은 것의 고통을 피하려, 억지로 잊으려했던 습관이 싫어졌다는 기록을 여기에 남겨본다. 기록하라, 잊지 않기 위하여.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하여.  
덧붙이는 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유복렬 | 눌와 | 2013-08-12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145년의 유랑, 20년의 협상

유복렬 지음,
눌와, 2013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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