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400명 죽던 '군 의문사'
타이완 시민들이 변화시키다

[병영에 햇빛을: ⑨-5 取중眞담] 타이완 취재에서 시민의 힘을 절감하다

등록 2014.12.30 13:56수정 2014.12.3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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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 윤 일병은 군 입대 후 112일 만에 부모 한 번 못 만나보고 선임병들의 구타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을 계기로 육군이 단 18일간 조사한 결과 3919건의 군내 가혹행위가 적발됐습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가혹행위가 자행되고 있다고 추정됩니다.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하겠다고 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제 군에만 맡기지 말고 외부에서 본격적으로 감시하고 개입할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병영에 햇빛을' 기획 연재기사를 싣습니다.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타이완 현지취재를 통해 타이완 시민사회와 군이 장병 인권 문제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타이완의 병영 인권 상황 개선 노력을 통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 군이 나가야 할 방향을 짚어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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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영화 '보고반장 3' 금성무, 유지령 주연의 타이완 영화 '보고반장 3'(1994)에는 한국군의 병영 생활 모습과 흡사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있었습니다. ⓒ 김도균


행진할 때면 항상 같은 쪽 손발이 올라가는 고문관, 호랑이 상관의 눈을 피해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병사들, 행동 굼뜬 동기 덕분에 단체기합에 진땀 빼는 풍경…. 비슷한 경험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깊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킵니다.

기자에겐 이달 초 타이완 출장 당시 숙소에서 TV로 본 타이완 영화 '보고반장(분대장- 기자 주) 3'이 그러했습니다. 비록 대사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20여 년 전 타이완군 병사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이 영화에 기자는 몰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 내부의 부조리와 폭력을 마치 남자가 되기 위한 과정인 것처럼 미화시켰다는 비판의 여지는 있을 수 있겠지만, 타이완 영화 속의 군대 풍경은 우리의 그것과도 많이 닮아 있었던 것이죠.

22사단 총기 난사사건, 28사단 집단 구타 사망사건 등 올해 잇따라 터진 병영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한 대안을 찾던 기자가 타이완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두 나라가 가진 유사성 때문이었습니다. 연장자나 선임자의 발언권이 센 유교적 전통, 근대화 과정에서의 식민지 경험과 분단 체제 속에서 한국과 타이완이 치러야했던 적지 않은 대가는 두 나라 군대의 모습을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남북한 무력이 첨예하게 대치하면서 크고 작은 충돌을 빚었던 한반도의 비무장 지대만큼, 대만해협의 긴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958년 중국 대륙 코앞의 진먼다오(金門島)를 놓고 벌어진 포격전에선 피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같은 유혈충돌은 1970년대 말까지도 이어졌습니다. 1965년 8월에는 군인들을 싣고 중국 연안에서 작전 중이던 타이완 정보수집선 2척이 격침 당해 200여 명이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죠.

인구 13억에 현역 군인만도 500만 명이 훨씬 넘는 중국에 맞서 타이완은 60만 명의 대군을 50년 가까이 유지했습니다. 인구 2300만 명에 불과한 타이완이 이 정도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서 치른 대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믿음으로 푸른 제복 속에 청춘을 묻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시는 가족들의 곁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겁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그 숫자는 매년 400여 명을 넘었습니다.

매년 400명 이상 죽던 타이완 군... 90년대 후반부터 인권상황 개선


우리의 군사정권 시절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군 의문사 사건이 타이완 군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이유도 모른 채,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알 수 없이 영정사진이 되어 돌아온 자식 앞에서 부모들의 시계는 영원히 멈춰버렸습니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 후반 이후 타이완 군의 인권상황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병력 싸움으로는 중국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군 혁신을 통해 최첨단 정예군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대대적으로 진행된 감군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장병 인권 개선을 위해 타이완 시민사회가 기울인 노력이었습니다. 그 선두에는 아들을 군에서 잃고 수 년 동안 국방부를 상대로 진상규명을 요구해 온 군중인권촉진회 첸피에(일명 황마마)씨 같은 분들이 서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 : 13cm 쇠못 박혀 죽은 아들, 국방부장관 멱살 잡은 엄마)

또 첸씨 같은 비판적 인사들까지 포용, 민군 협력을 통해 장병인권 개선을 도모했던 타이완 국방부의 인식전환 역시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 볼 만한 지점들입니다.

물론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이완이 군인들의 인권과 관련, 완벽한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7월 군기교육 과정에서 발생했던 병사 사망 사건에서 보듯, 타이완 군 역시 아직도 개선해야 할 점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자가 주목하는 것은 잘못이 발견되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고치려는 타이완 사회의 노력이었습니다.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 직후 타이베이 도심을 점령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쳤던 25만 시민들의 힘은 국방부 장관을 물러나게 했고, 총통의 사과를 끌어냈으며, 전시를 제외한 평시 군사재판의 효력을 영구히 정지시켰습니다.(관련 기사 : 한국 '윤 일병'과 대만 '홍 상병' 닮은꼴 사건, 왜 결론이 달랐나)

기존의 제도가 병사들의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면, 법까지 뜯어 고쳐서라도 개선하겠다는 타이완의 노력은 우리의 그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윤 일병 사망사건 이후 구성된 민·관·군 병영문화혁신위원회는 4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면서 22개 병영혁신과제를 확정하고 지난 19일 국방부에 권고안을 내놓았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던 군 인권 옴부즈만 도입이나 군 사법제도 개혁은 지휘권을 약화시킨다는 군 당국의 반발로 정식 정책으로 결론내리지 못했습니다. 대신 군 복무 가산점제와 복무기간 대학 학점 인정제 등을 내놓았지만 이런 대책이 장병들의 인권을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 문제점을 드러낸 제도는 그대로 남겨둔 채 군의 구조적 문제를 병사들 간 문화의 문제로 치환해 버리면 해답을 찾기란 영영 요원한 일이겠지요.

타이완 취재를 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정부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던 군 통수권자의 열린 태도였습니다.

군 가혹행위 피해사망자 장례식에 마잉주 총통 직접 참석

지난해 홍중추 상병 사망사건 직후 타이완 국민들의 비판여론이 들끓자 마잉주 총통은 "군 통수권자로서 군대 내에서 일어난 위법한 권한 남용 행위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면서 "국민과 유가족에게 정중히 사과한다"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마 총통은 홍 상병의 장례식에도 직접 참석해 애도를 표했습니다. 군 통수권자의 반성은 군사심판법의 개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8월 윤 일병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직후,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모든 가해자와 방조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해 잘못이 있는 사람들은 일벌백계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며칠 뒤에는 "반드시 획기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군 통수권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통감하는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핏 비슷해 보이면서도 참 달랐던 우리나라와 타이완의 간극은 박 대통령과 마 총통의 차이 만큼이나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군 통수권자의 태도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그 사회가 지닌 건강한 시민의 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영에 햇빛을 #홍중추 사건 #윤 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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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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