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혈' 하던 시대, 과연 끝났을까

영화 <허삼관> 통해 본 의료민영화

등록 2015.02.10 18:23수정 2015.02.1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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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혈

- 정호승

밤 기차를 탄다
피를 팔아서
함박눈은 내리는데 피를 팔아서
뚝배기에 퍼담긴 순두부를 사먹고
어머님께 팥죽 한 그릇 쑤어 올리러
동짓날 밤 기차를 탄다
눈이 내린다

눈길 위에 이미 뿌려진 피는 몰래 감추고
외로웠던 피는 그 추억마저 팔아서
피막이풀 털동지꽃 피뿌리꽃을 만나러
바늘자국 무수한 혈맥을 찾아
밤 기차는 달린다
血蟲들은 달린다
(아래 생략)

피를 돈으로 사거나 판다는 '매혈'이란 단어는 다소 낯설지만, 한때 시에 등장할 정도로 한국에서도 성행했던 적이 있다. 매혈을 일삼는 사람을 빗대 '쪼록꾼'이라고도 했다. 진공 유리병 속에 피가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빗댄 것이다. 한 달에 2~3번씩 상습적으로 매혈하는 사람은 소위 '귀신'으로 통했다는 설도 있다. 매혈은 가난한 이들의 비릿하고 아픈 기억이다.

이제는 불법이 되어 사라졌지만 정말 '매혈'이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2000년대 들어 등록 헌혈자에 대한 헌혈 인센티브 방안으로 금리우대 혜택을 주었을 때 주택 마련을 위해 사실상 '매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도 공공화장실에는 장기매매 스티커가 버젓이 붙어있고, 가난한 대학생들은 학비 마련을 위해 신약 임상시험에 참가하며 피를 뽑는다.

문자 그대로의 '매혈'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 노동자들은 고혈을 뽑아내며 노동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가장 길고, 산업재해 사망률도 1위다. 실제로도 피를 흘리며 죽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매혈 하던 시대, 정말 끝났을까?

영화 <허삼관>의 원작 소설인 <허삼관 매혈기>에는 '노동을 할 때 필요한 힘은 피에서 나온다'며, '피를 파는 것은 곧 힘을 파는 것'이란 표현이 나온다. 허삼관이 처음으로 피를 팔고 깨달은 '피땀 흘려 번 돈'이라는 말이 결코 비유적인 표현으로만 들리지 않는다.

배우 하정우가 감독한 영화 <허삼관>은 매혈을 통해 가족을 부양한 가장의 이야기다. 허삼관은 근근히 노동일을 하며 벌어 먹고 산다. 그러나 결혼을 하거나, 가족들과 외식을 해야 할 때, 싸우다 다친 아들 친구의 치료비를 물어줘야 할 때 등 목돈이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피를 팔아야 했다.

특히 아들 일락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피를 뽑아야 하는 장면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원작 소설은 중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가족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다를 바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의 배경인 1960년대만 해도 실제 건강보험이 없었고, 1970년대 말에 가서야 공무원과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했다. 한국에서 전국민 건강보험이 도입되기 이전의 병원비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대다수 서민들은 의사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극중 아들 일락의 치료비는 당시 공무원 월급의 서너 배에 달한다. 치료비를 먼저 가져오지 않으면 사람이 죽든 말든 치료를 하지 않았다(당시는 작은 의원으로 시작하여 대형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우는 성공신화가 가능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시장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허삼관은 선택의 여지없이 여러 번 피를 팔아 병원비를 마련하려 애쓴다. 결국은 이로도 모자라 결국 더욱 비극적인 방법으로 병원비 구하기 사건이 해소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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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삼관> 한 장면 ⓒ (주)두타연


허삼관이 매혈을 하기 위해 의사에게 통조림을 갖다 바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진찰을 받기 위해 의사에게 허리를 굽신굽신 숙여야 했던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989년 전국민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이 실시된 이후에야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병원비도 어느 정도 단일화 되고, 서민들은 그나마 병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병원 문턱은 여전히 너무 높다. 건강보험료가 체납되어 보험 자격이 정지된 사람이 200만 명이 훨씬 넘고(2014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제공 국감자료), 경제적 이유로 치료를 포기한 사람이 연간 최대 360만 명에 이른다(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중병에 걸리면 기둥 뿌리가 뽑힌다는 말이 괜한 엄살이 아니다. 한국의 10가구 중 한 가구는 재난적 의료비로 고통받고 있다(보건복지부, 2011년 복지욕구 실태조사).

영화에서 과도하게 피를 팔다가 쇼크로 쓰러진 허삼관이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수혈을 받는 상황에 놓이는데... 정신을 차리고 난 뒤 허삼관이 "피값에 병원비까지 내라"는 의사 말에 "왜 허락도 없이 남의 피를 넣어서 돈을 달라고 하냐"며 "(피를) 도로 뽑아가라"고 항의하는 장면이 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아픈 사람은 누구나 병원 이용할 수 있게 해야

매혈 직후처럼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꿈꾸지만, 병원비 걱정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정도도 버거운 게 현실이다. 노동으로 착취당하고 열악한 복지로 또 한 번 뜯긴다. 몸이 부서져라 일한 노동자들은 몸이 아프면 그간 모은 돈을 고스란히 병원비로 지불해야 한다.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의료비조차 스스로 내도록 만드는 무서운 사회다.  

한국은 의료민영화를 통해 병원이 사람들의 고혈을 뽑아내는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경제위기로 서민들이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해 남은 건강보험 흑자 12조 원. 정부는 국민들의 이 '혈세'를 병원자본과 제약자본, 공급자들에게 퍼주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피를 뽑아내는 장면에서 메스꺼움을 느낀 나는 정부의 이런 일련의 것들을 보며 한층 더 어지러움을 느낀다.

한국의 의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최소한 아픈 아이를 병원에 보내며 타는 부모 마음에 병원비 걱정까지 보태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국가의 역할이고, 대부분의 OECD 국가들이 하고 있는 의료체계다. 그리고 이 길을 위해 서민들의 피를 더 뽑아낼 것이 아니라 충분히 배불리 살아온 사람들로부터 재원을 수혈해야 옳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이수정은 보건의료단체연합 기획부장입니다.
#허삼관 #매혈 #의료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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