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농부'들이 만들어가는 '마을공화국'

[서평] 마을사람들이 직접 쓴 <홍동마을 이야기>

등록 2015.02.06 17:04수정 2015.02.06 17:04
1
원고료로 응원
'풀무학교'로 유명한 '홍동마을'은 농촌마을공동체 운동의 '교과서'같은 곳이다. 40년 넘게 유기농업, 협동조합, 귀농귀촌 등을 주도하며 작은 마을의 기적을 만들어왔다.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온 과정이라고 했던가. 변방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된 변화는 오늘날 유기농업 가치의 보편화, 마을공동체의 확산, 경제영역에서 협동조합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물결로 이어졌다. 

마을은 하나의 우주이고 세계다


a

<홍동마을 이야기> 표지 홍동은 오랫동안 정직한 땀으로 뿌리 내려온 다양한 대안적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 이민희

마을 사람들이 직접 쓴 이야기들이 담긴 <홍동마을 이야기:마을공화국의 꿈>은 미래 농촌의 대안 모델로 평가되는 홍동마을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바탕으로 홍동마을을 소개하면 이렇다.

홍동마을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다. 1958년에 문을 연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약칭 '풀무학교')가 홍동마을의 씨앗이다. 풀무학교의 건학정신은 '더불어 사는 평민'이다. 엘리트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누구나 자기(自己)를 실현하는 평민을 기르는 교육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학교는 '작을수록' 좋다.

풀무생협(1960년)과 풀무신협(1969년)도 풀무학교에서 시작돼 자립의 여건을 갖춰 각각 지역 주민 자치기관으로 독립, 홍동마을 공동체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975년 관행농 일색이던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최초로 유기농업을 시작했고 오리농법을 도입했다.

현재 홍동마을에는 풀무생협과 풀무신협을 비롯해 농기계조합, 풀무도서조합, 재생비누조합, 농가공조합, 재생지 포장재 제작소 등의 협동조합과 갓골 어린이집, 지역신문 '홍동소식', 대체공업연구소, 풀무학교 전공부(대안대학), 홍동밝맑도서관, 유기농연구소, 목각실, 유물관 등 교육문화단체가 설립됐다. 지금은 발효식품조합, 의료조합, 마을화폐, 햇살에너지조합, 토지재단 등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책에서 홍순명 밝맑도서관 이사장(전 풀무학교 교장)은 "농촌은 농사만 짓는 곳이 아니다. 농사 지을 농토와 집이 있어도 귀농자가 막상 지역에 살려면 유통, 교육, 금융, 복지, 의료, 문화 모두가 걸린다"며 "지역은 산업으로서의 농사를 포함한 유기체라야 한다. 사람이 그렇듯, 지역도 몸과 정신과 영혼이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304쪽)고 강조한다.


적어도 홍동마을에서 마을은 세계이고 우주다. 마을은 학교, 도서관, 빵집, 목공소, 출판사, 공방, 협동조합, 연구소, 농장, 카페와 같이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서 생산하고 길러 마을에서 먹을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가르치고 마을에서 배운다. 마을에서 연구하고 마을에서 정치를 꿈꾼다. (9~10쪽)

철학하는 '농부'를 키우는 마을

최근 번지고 있는 마을공동체의 성패 여부는 '지속가능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주공간이 불안정한 도시민들은 공통된 요구와 관심사를 중심으로 개인과 개인이 관계를 맺는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의 '공동체'를 선호한다. 반면, 전통적인 공동체의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농촌 마을은 농사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비해 경제, 복지, 교육, 의료 등 생활의 전 영역에서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도시와 농촌 양쪽 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가야 할 지속가능한 삶의 터전으로써의 공동체의 모습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만큼 마을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복잡하고 어렵다.

1958년부터 시작된 홍동마을의 역사는 거의 반세기를 이어져 오고 있다. 긴 시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은 있었겠지만 지금의 홍동마을이 미래의 대안적인 농촌의 모델을 선도하고 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의 모든 일들이 마을에서 이루어지는데 왜 학습만은 마을에서 이루어져서는 안되는가? 나는 교육의 모든 과정은 마을 단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은 조각이 아니요 하나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중략) 오랜 준비 끝에 지역을 살리고 생태농업의 일꾼을 양성하며, 경제제일주의로 치달아 위기에 처한 산업문명에 저항하며, 더불어 사는 대안적인 문명문화운동의 기반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마침내 전공부 생태농업과를 개설하게 되었다. (중략) 생명의 수호자로서 농사를 지으며 더불어 사는 지역사회의 건축가를 기르고자 하는 전공부는, 이제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앞서 실천하는 '풀뿌리 주민대학', 지역과 사회 구현을 위해 '더불어 사는 대안대학'으로 발전하려 한다. 지역 속에 숨쉬는 생명과 평화교육은 21세기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임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22~23쪽, '풀무학교 전공부 설립 정신' 중 발췌)

풀무학교 전공부의 수업은 농업 실습만큼이나 인문학 수업을 강조한다. 농업과 인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농업의 몰락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본다. 농촌에 살고 있는 나는 막연히 인문학이 중요하다고만 생각했지 농사와 인문학의 관계를 깊이 사유하지 못했다. 얼 쇼리스가 미국 빈민가에서 만들어 낸 인문학 학습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를 과연 농촌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농사와 인문학은 어떻게 조우하는가. 풀무학교 전공부 강사 강국주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좁게 말해 문학적 상상력이라 할 수도 있을터인데, 문학적 상상력이란 달리 말해 땅에 뿌리박은 상상력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인문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상호 이해 및 해답을 찾는 것이며, 농사 역시 땅과 자연에 대한 근원적 상호 작용과 이해에 바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인문학을 하는 사람과 농사를 짓는 사람의 세계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등안(세계에 대한 공평무사한 시선)이자 너와 나를 동시에 고려하는 보살핌의 정신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문학적 상상력과 땅에 뿌리박은 농부의 상상력은 동일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32~33쪽)

또 풀무학교 전공부 한 학생이 쓴 산문을 보면서 '아, 농사와 인문학을 병행하면 이런 농부를 길러낼 수 있구나' 감탄했다. 잠시 옮겨보면 이렇다.

볍씨를 담는 자루 입구를 잡고 서서 햇살을 받으니 잠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졸다가 중심을 잃고 놀라, 깨다 자다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볍씨는 큰 알곡, 중간 알곡, 까락으로 나뉘어 자루에 담긴다. 내 삶에도 누군가를 큰 사람, 중간 사람, 작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까? 내 삶에는 그런 구별과 나뉨이 없어야겠다. 서로 어울려 살아갈 뿐이다. 그럼 나 자신은? 나는 한 없이 작은 사람이다. (90쪽)

'풀무학교'가 없었다면 오늘의 '홍동마을'은 없었을 것이다. 홍순명 이사장은 "마을이 펼쳐진 교실이고, 학교가 지역의 기관이 되고, 오늘의 학생은 내리의 협동적 지역사회 주민이 된다"(299쪽)고 학교와 마을의 관계를 설명한다. 대안학교의 맏형격인 '풀무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농부를 키우는 학교'라는 점이다. 그것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철학하는 농부들' 말이다. 이렇게 풀무학교에서 배출한 농부들이 마을의 인재가 되어 유기농업도 일구고 협동조합도 만들었다. 이것이 홍동마을이 반세기를 이어온 비결이자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마을공화국의 꿈, 홍동마을 이야기>(충남발전연구원, 홍동마을 사람들 지음/한티재 펴냄/2014.10.6./327쪽/1만5000원)
이 글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 에도 게재했습니다.

마을공화국의 꿈, 홍동마을 이야기 - 새로운 교육 · 농업 · 정치를 일구다

홍동마을 사람들 지음,
한티재, 2014


#마을공동체 #홍동마을 #풀무학교 #농업 #농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4. 4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