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시간에 깨어있는 학생들, 당황했다

[아이들은 나의 스승 32] 수능 필수 교과 지정 이후 달라진 '한국사'의 위상

등록 2015.03.10 08:15수정 2015.03.1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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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이 시작됐다. 겨우내 준비한 수업지도안을 들고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되니, 이때는 늘 초임 시절처럼 들뜨고 설렌다. 아이들의 수업 태도도 그 어느 때보다 좋다. 평소엔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들이지만, 교실엔 온통 낯선 친구들뿐이라 학년 초 얼마간은 서로 데면데면해 한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이때가 1년 중 수업 분위기가 가장 좋다고들 한다.

특히 올해 내가 가르치는 한국사 수업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 교과로 지정된 이후에 생긴 변화다. 지금껏 한국사는 서울대 지원자들과 몇몇 역사 '오타쿠'들만을 위한 과목이었다. 그런데 영어, 수학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아침에 '기타' 과목에서 어엿한 '중요' 과목으로 등극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과목 서열이 국영수에 이어 '넘버 4'란다.

1교시인데도 부담스러울 만큼 다들 눈이 초롱초롱하다. 대개 1교시는 비몽사몽 가운데 수업이 진행되는, 서로에게 '버리는' 시간이었다. 아침 등교 시간이 늦춰진 효과라며 눙쳤더니, 아이들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수능 필수 과목 시간에 어찌 잠을 잘 수 있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비록 농 섞인 대화였지만, 고등학교에서 한국사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첫 수업 시간, 시키기도 전에 교과서에 비닐 옷을 입혀온 친구도 있었다. 한 해 반짝 배우고 말 과목이 아니니 이 정도 '예우'는 갖춰야하지 않겠냐는 거다. 구입과 동시에 버려지는 교과서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학교에서 17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모르긴 해도, 자발적으로 교과서에 옷을 입혀온 경우는 이 아이가 처음이다.

하루아침에 '기타' 과목에서 '중요' 과목으로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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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로만 수업해도 될까? 학년 초면 교무실에 '간택'을 기다리는 과목별 참고서와 문제집들이 수북이 쌓인다. 수능필수교과로 지정된 이후로 한국사도 영어, 수학 못지않다. ⓒ 서부원


여하튼 한국사 교사로서 좋긴 한데,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대학입시가 모든 교육과정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수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둠수업도 해보고 싶고, 때론 역사적 사건을 두고 토론수업도 진행해보고 싶지만, 수능을 치러야 한다는 걸 떠올리면 시도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학부모들과 아이들의 시큰둥한 반응이 내심 두렵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교의 수업은 수능 시험 유무에 따라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수능이 존재하고, 모든 아이들의 공통된 꿈이 '수능 대박'인 한, 오로지 교과서에만 기대어 수업하는 학교는 없다. 수능 준비가 곧 문제 풀이고, 전국의 고3 교실에서 교과서가 사라져버린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제 한국사도 영어, 수학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될까.


기실 설레는 마음으로 '1년 농사'를 준비하며 겨우내 고민한 부분이기도 하다. 결론은 수업을 교과서만으로 이끌고 갈 수는 없다는 것. 교육부는 평이하게 출제하고 절대평가를 도입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지만, 수능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주기 위해서 최소한의 문제 풀이 수업은 필요하다고 봤다. 물론, 교육부의 방침이 언제 또 바뀔지 모른다는 해묵은 불신 탓도 없진 않다.

첫 수업시간, 문제집 이야기를 꺼냈더니 하나같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교과서와 노트를 챙겨오라는 것 빼곤 수업을 위해 아이들더러 무언가를 준비하라는 건, 사실 교사가 된 후 처음이다. 말 꺼내기조차 조심스럽고 어색했다. 여태껏 만년 '기타' 과목이어서 별도로 부교재가 필요하지도 않았거니와, 마치 아이들을 상대로 '책장사'를 하는 것 같아 극도로 꺼려온 탓이다.

문제집을 준비해오지 못했다고 흠씬 두들겨 맞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참고서나 문제집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구입해 스스로 공부하는, 말 그대로 '참고 자료'이자 '보충 교재'이니 교사가 아이들에게 사라 마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듣기로는, 예체능 과목처럼 수능을 치르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교과 시간에서 '부교재'를 준비하라고 했단다. 올해 자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는 어느 학부모는, 과목별로 교과서는 '기본적으로' 모두 사야 하고, 참고서나 문제집은 '필수적으로' 따로 구입해야 하는 실정이라며 부담스러워했다. 과목마다 참고서와 문제집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교과서 가격은 아직까지는 저렴하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반값으로 공급되고 있다. 새내기의 경우, 교육 과정에 따른 십여 종의 교과서를 6만 원 남짓이면 모두 살 수 있다. 무상교육인 중학교 때와는 달리 교과서 대금을 따로 치러야하기 때문에 적은 비용에도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가격 대비 품질로 따진다면 시중에서 교과서만한 책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물론, 추가 징수를 당할 가능성도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고등학교 교과서는 현재 정부와 출판사들 사이에 가격 소송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3월 교육부가 대부분의 검정교과서에 대해 가격인하 명령을 내리자, 이에 반발한 출판사들이 소송을 냈다. 만약 대법원이 최종 출판사들의 손을 들어준다면, 학부모들은 교과서 값의 나머지 반을 추후 더 부담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때 시행된 '교과서 가격 자율화' 정책으로 교과서 가격이 턱없이 오르긴 했지만, '부교재' 값에 견주면 부담이랄 것도 없다. 동일 과목의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 등의 가격을 비교해보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개중 싼 축에 든다는 한국사도 괜찮다 싶으면 한 권에 2만 원을 훌쩍 넘는다. 아무리 싸도 만 원 이하의 참고서나 문제집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생면부지 교사에게 문제집 '기부'하는 이유

교무실 책상 위에는 수십 권이나 되는 부교재 더미가 놓여있다. 하나같이 표지에는 '교사 연구용'이라고 적혀있다. 매번 교과서와 함께 주어지는 교사용 지도서로 다음 학기를 준비해왔기 때문에, 여태껏 그것들은 폐지일 뿐이었다. 대개 교무실 한쪽에 쌓아둔 채 필요한 아이들이 알아서 가져다 보도록 했다. 이를 '노리는' 아이들이 교무실 주변을 서성이곤 하는데, 해마다 학년 초면 볼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다.

지난 겨울방학 동안 각 출판사 영업사원들이 관행적으로 올려놓고 간 것이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 교과로 지정된 까닭인지 예년에 비해 그 양이 두 배도 더 되는 것 같다. 8종인 교과서를 낸 곳 외에도 처음 보는 생소한 출판사 이름이 수두룩하다. 한 출판사에서 네다섯 종의 문제집을 낸 곳도 드물지 않다. 이 많은 책들을 누가 다 지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생면부지의 교사에게 이렇듯 많은 책을 해마다 '기부'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부교재로 채택되는 것. 그들의 영업은 사실상 '한철 장사'다. 수능을 준비하려면 참고서와 문제집 없이는 안 된다는 걸 그들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이따금 학교를 불쑥 찾아와 다른 지역, 다른 학교의 사례를 소개하고 비교하며, 불안감을 조장하고 경쟁심을 부추기기도 한다.

출판사는 다르지만 내용과 형식은 '도찐개찐'이다. 일단 분량이 많고, 빳빳한 종이에 '올 컬러'에다, 버리기 아까울 정도로 편집과 디자인이 화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웬만한 사전 두께의 어느 참고서는 한 페이지에 한두 문제만 수록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뒀고, 지문 상자 테두리를 쓸데없이 컬러로 처리한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든 가격을 올리려고 작정을 한 모양새다.

수록된 문제는 거의 그대론데 디자인만 살짝 바꿔놓곤, '개정판'이라고 내세우며 슬그머니 가격을 올린 것도 있다. 또, 이전의 수능과 전국연합평가 때 나온 기출 문제들을 짜깁기해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 채워놓고는 새 교육과정을 반영했다고, 내신과 수능을 완벽하게 대비할 수 있다고 호들갑 떠는 경우도 있다. 내용은 별반 차이도 없으면서, 경쟁이라도 하듯 화려하게 치장하고, 담합이라도 한 듯 가격 역시 비슷하다.

수능과 연계된다는 이유로 전국 모든 고등학교에서 교과서처럼 사용되는 교육방송(EBS) 교재도 예외는 아니다. '공인'된 것이니 내용은 좋고 가격은 쌀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큼지막하게 'EBS'라고 적힌 뒤표지에 8300원이라 적혀 있어서 순간 이거다 싶었는데, 웬걸, 상하 두 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권이 9400원이니, 사실상 다른 교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다. 교육방송조차 수능에 목 멘 아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작년 수능이 끝난 직후, 고3 교실에서 버려진 참고서와 문제집 더미를 본 적 있다. 나르다가 복도 바닥에 흘려 널브러진 것들만도 몇 박스는 될 듯했다. 그때 폐지함을 나르던 고3 아이들 둘이 푸념처럼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이게 대체 얼마야?"
"지금까지 내가 구입한 참고서와 문제집을 폐지로 팔아도 족히 몇 만 원은 될 걸!"

듣자니까, 고3의 경우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 한 달에만 드는 부교재 값이 30만 원도 더 된다고 한다. 언제부턴가 부교재 값이 등록금을 훌쩍 넘어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정작 교과서는 없고 참고서와 문제집만 가득 담긴 아이들 가방을 보면서, 어느새 교육을 빙자한 '시장'이 돼버린 학교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교육 광풍'은 이미 학교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능 한국사 #부교재 #사교육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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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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