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을 하는 자가 영웅이 된다

[독서 에세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록 2015.03.14 11:08수정 2015.03.1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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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표지 ⓒ 웅진 지식하우스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가 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다섯 권을 몽땅 읽었다. 마지막 권을 읽고는 조금 뜸을 들이다 이제야 글을 쓴다. 뜸을 들이다 보면 신화 속 그 많은 인물들과 이야기들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 단 하나는 인물일 수도 있고, 이야기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단 한 가지는 무엇이었을까.

다섯 권의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상호적이면서도 독립적이었다. 그러니 평소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어느 특정한 테마가 궁금했던 독자라면 그것을 담고 있는 부분만 뽑아 읽어도 내용 이해가 어렵지 않을 듯싶다. 또한 반복되는 내용도 더러 있어 첫째 권부터 연이어 읽은 독자라면 마지막 권에 와서는 의도하지 않아도 굵직한 신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관계, 그리고 몇몇 모험 속의 주인공이나 그들의 상징 등속을 자연스레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책에 실려 있는 신화 속 모든 사건들은 '사건'이라 쓰고 '상징'으로 읽어도 될 만큼 상징 덩어리들이었다. 저자 이윤기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알았다는 기쁨에 만족하며 책을 덮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상징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신화를 읽는 독자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신화가 신화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면서.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상징들을 현실로 승화시키기 위해 너무 애를 쓰다 보면 금세 기력이 쇠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골치 아프게 신화를 대하지는 말자. 신화는 신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므로 어느 부분에서는 읽는 재미만을 느끼고 지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 하자는 의미에서 마지막 권의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에서 만큼은 어떤 상징을 끌어오고 싶었다. 그들의 모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아손은 왜 황금양털을 찾아 떠났을까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은 이아손을 비롯한 50명 가량의 영웅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황금양털'을 되찾아오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이야기 속의 황금양털을 그리스인의 자존심이라고 여기고, 그 자존심을 무사히 찾아 멋지게 귀환한 이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영웅들은 왜 양털을 찾아와야 했을까.

이아손은 이올코스라는 나라의 왕자이며 싸움도 잘하고 의술에도 조예가 깊은 청년이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으레 그렇듯 무지 잘생기기도 했다. 이아손이 5살 때 숙부가 이아손의 아버지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왕이 된 사건이 벌어진다. 그때 아버지는 이아손을 산 속 깊이 숨겨 놓았는데, 산 속에서 열심히 힘을 연마하던 20살 이아손이 왕좌를 되찾기 위해 마치 무협지 주인공처럼 숙부 앞에 '짜잔' 나타난다.


하지만 숙부가 쉽게 자리를 내줄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조카를 무턱대고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건을 건다. 황금양털을 되찾아 오거라. 그럼 너가 왕이다. 황금양털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숙부도 모르고, 이아손도 모르고. 숙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험한 바다에서 양털을 찾아 헤매다가 죽어 버려라.

이아손은 이 조건을 '덥썩' 받아 들고는 함께 모험을 떠날 영웅들을 수소문한다. 이에 모여든 영웅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모두다 제각각 신화 속 어디쯤에서 주인공을 할 법한 사내들이다. 헤라클레스도 그 중 하나였고 말이다.

이 모험은 단순한 모험이 아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 모험이었다. 꿈 속에서조차 생각해 보지 않은 꿈같은 일을 행해야 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모여든 영웅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아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아손은 배를 만드는 아르고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제껏 바다에 뜬 적이 없는 배, 꿈도 꾸어본 적이 없는 배를 만드세요. 꿈도 내가 꾸고, 바다에도 내가 띄우겠어요."

영웅들은 신나게 모험을 즐긴다. 이아손을 제외한 영웅들에겐 아무 의미 없는 양털 쪼가리였음에도 그들은 모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다. 그들은 왜 그러는 것일까. 모험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헤라클레스가 이아손에게 한 말로 미루어 영웅들이 모험을 즐기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그대를 핑계 삼아 이렇게 모였듯이, 그대도 금양모피를 핑계 삼아 어른이 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이아손은 마음만 먹으면 늙은 숙부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왕좌에 오르기 위해 자신이 용감하다는 사실을 입증할 필요도 없었다. 왕이 되기 위해 어떤 명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헤라클레스 말처럼 이아손은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 즉 어른이 되기 위해 스스로 모험에 뛰어든 거였다. 다른 영웅들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들은 모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을 각오로 난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영웅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영웅은 영웅이기 때문에 모험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모험을 즐기기 때문이 영웅인 거라고. 진정한 영웅이란, 울뚝불뚝한 근육을 방패 삼아 나약한 우리들을 보호해주는 누군가가 아니라, 모험을 통해 성장한 진짜 어른으로서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누군가인 거라고.

영웅의 세계가 우리에게 비춰주는 진실은 인간은 숙명적으로 모험을 즐겨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험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전에서 벗어나기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모험하길 꺼려 하는 우리네 범속한 인간들은 결코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험을 하기 위해 꼭 목숨을 걸거나, 바다로 뛰어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다만 무엇이든 '시도'하고 '해'봐야 할 것이다. 모험 그 자체가 두려워 성장을 반납하지만은 말아야 할 것이다.

맺는 글이 준 숙연함.. 어느 예언자의 당부가 떠오르다

모험과 성장을 생각하며 글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책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그리고 '맺는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저자 이윤기 선생은 2010년에 세상을 떠났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책을 본인이 마무리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마지막 권은 저자 사후, 컴퓨터 속에서 조용히 숨쉬고 있던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끄집어내 엮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 보니 '맺는글'은 저자가 아닌 저자의 딸의 몫이 되었다. 그녀의 글을 읽으니 왠지 숙연해지고 울컥해졌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그러자 그때, 어느 예언자가 이아손에게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 했었다.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뻐하느라고 마음 빗장까지 열었다가 슬픈 일 당하고, 슬퍼하느라고 삼가다가 기쁜 일을 만나는 수가 있는 법이오.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 그대들이 겪을 앞날도 이와 같을 것이오."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고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숙명을 되새기며 슬픔을 거두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신화를 통해 우리가 자각하게 되는 것은 결국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인 것 같다. 우리는 결코 헤라클레스처럼 12과업을 마쳤다고 신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100과업을 마친다고 해도 우리는 계속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신이 될 수 없어서 서러울 건 없다. 우리는 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으니까. 바로, 모험. 모험을 하는 신은 없다. 영생하는 신은 모험이 필요치 않다. 삶의 환희를 만끽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죽어야만 하는 우리 인간만이 삶의 역동성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윤기 선생은 53세에 처음으로 그리스 땅을 밟고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쓰리라 마음 먹었다고 한다. 늦은 나이이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모험을 택한 거였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 세상이 아무리 이렇더라도 역시 인간은 모험을 해야 하는 거야.' 책을 덮으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뜸을 들이고도 이 생각 하나가 계속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이윤기/웅진 지식하우스/2010년 10월 15일/1만3천5백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

이윤기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2000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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