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예수처럼 사흘만에 부활했습니다

[포토] 한림 협재포구에서 바라본 제주의 봄바다

등록 2015.03.14 16:59수정 2015.03.1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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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협재해변에서 바라본 천년의 섬 비양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봄날 파도는 젊고 싱그럽게 밀려왔다. ⓒ 김민수


칼바람을 동반한 매서운 추위는 결국 내 발걸음을 천년의 섬 비양도가 보이는 협재바다로 이끌었습니다. 간혹 여행은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있는 곳으로 안내받아 가기도 합니다.

이제 가야하는 날인데 이렇게 따스한 봄날이라니 조금 얄밉기도 했지만, 머무는 내내 추웠더라면 정이 떨어져 다시는 찾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그나마 다행이지요.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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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 협재포구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비양도를 바라본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아주 조금만 눈높이 위치를 달리하면 전혀 다른 모습들을 보는 행운을 잡을 수 있다. ⓒ 김민수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비양도를 바라보고 싶어 해안가 바위들을 더듬어가며 협재포구 쪽으로 걸었습니다. 제주화산석은 걷기에 그리 편하지 않습니다.

렌즈가 잔뜩 들은 배낭을 둘러메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다른 손에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겨드랑이에는 삼각대를 끼고 걸으니 무척이나 불편합니다. 후회가 가득합니다. 배낭 안에는 제주도에 와서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렌즈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렌즈가 가장 무겁습니다. 그 렌즈만 없었더라면 짐은 많이 줄었을 것이고,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에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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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포구의 등대 포구의 등대는 늘 애잔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등대, 밤마다 두 눈 부릅떠야하는 삶, 그런 등대의 삶을 닮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있다. ⓒ 김민수


욕심이 나 스스로를 옥죈 것입니다. 긴 여행을 하려면 짐을 최대한 가볍게 할 것, 이제 그런 것조차도 망각했을 정도로 나이가 들어버렸고 편리함에 익숙해졌는가 봅니다. 그냥, 자가용 트렁크에 넣어다닐 적에는 전혀 무거운 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제주공항에서 이곳 협재바다까지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그것도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일주도로를 따라 몇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고 여행의 마지막 날 이곳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힘도 들고 어깨도 아프고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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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포구에서 바라본 한림 완연한 봄바당, 이틀 전만 해도 칼바람 때문에 바다에 서지 못했었는데 어느 사이 봄바당이다. ⓒ 김민수


버스를 타고 그냥 공항으로 가버릴까 하는 유혹과 공항 가까운 곳에 있는 해수탕에서 몸이나 풀고 서울로 올라갈까 하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협재바다에 서니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길 잘 했습니다.


천천히 하는 여행의 묘미는 기동성이 없다보니 마음 먹은 대로 바로 실행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냥 그 현실에 적응할 수 밖에 없고, 그 현실이 보여주는 바를 일정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지금 눈에 보이는 풍광들도 그 덕분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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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포구 포구 안은 늘 잔잔하다. 포구는 작은 배들의 보금자리요, 보호처다. 우리 삶에도 포구와 같은 곳이 필요하지 않은가? ⓒ 김민수


지금은 잠시 무거운 짐들은 포구 한켠에 내려놓고 가볍게 걸어다니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괜시리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거짓말이라 해도 할 수 없겠지만, 사실 손목시계가 제주도에 들어온 날 저녁 7시 55분 경부터 멈춰버렸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시계는 멈춰져 있었고, 나는 그냥 습관적으로 시계를 차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침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시간을 맞춰놓았습니다. 그냥 멈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러나 그 이후 이 글을 쓰는 14일 오후까지도 시계는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계가 예수처럼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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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가는 길 방파제, 등대가는 길에 서서 봄바다를 바라보는 여행자, 긴 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가벼워야 할 일이다. ⓒ 김민수


마치, 잠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 쉬라고 하는 메시지를 누군가 제게 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알려준 것 같았습니다.

봄날처럼 따스한 날만 일상이 아니라 칼바람 몰아치고 폭풍우가 몰려오는 날도 일상이며, 일상은 다 아름다울 수 있으며, 그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서 맞이하는 일상, 그 일상에서 오늘 같이 설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여행, 삶의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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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를 장노출로 담아보았다. 시간의 중첩, 과거와 과거의 만남,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다양한 철학적 의미들을 담는 촬영기법이라고 생각한다. ⓒ 김민수


똑같은 것을 바라보되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풍경사진을 담을 때에는 누구나 담을 수 있는 풍경화 같은 풍경사진을 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 자리에 서서 찍으면 복제품처럼 나올 수 있는 그런 사진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진의 성격상 아무리 같은 곳에서 찍어도 같은 사진은 없지만, 늘 그렇듯이 흔한 사진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풍경사진을 담을 때 장노출 기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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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바다의 색은 코발트빛과 에메랄드빛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파도가 밀려오면 어느새 바다는 하얗게 변했다. ⓒ 김민수


함덕에서 우연히 만났던 제주토박이 한 분이 사진을 찍는 나를 보더니 말을 걸어왔습니다.

"혹시, 김영갑 선생을 아세요?"
"예, 김영갑 갤러리 유명하지요. 살아 생전에 만난 적도 있어요."
"아, 그래요. 글쎄 요즘에 어떤 사람들은 김영갑 선생이 찍은 사진하고 똑같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를 테면 장노출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기법만이 아니라 그 좌표를 찾는 거죠. 그게 뭐하는 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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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방파제 끝으로 길이 계속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상상을 하게 된다. ⓒ 김민수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사진을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누군가의 작품을 베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장노출로 담는 사진은 나름 저만의 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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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 협재포구에서 바라본 마을, 바다 가까운 집 주택에 해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바다에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 김민수


이제 점심을 먹고 협재에서 떠나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협재해녀의 집', 제가 여행을 하면서도 음식점이나 이런 것 추천하지 않는 편인데 이곳의 해물라면과 문어숙회 세트는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현지인들의 이야기로는 해물라면은 어디라도 그렇게 맛나다고는 합니다.

여기가 이번 제주 여행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행운처럼, 제주도에 살 적에도 그냥 스쳐지나가기만 했던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내 의지나 계획대로 였다면 그냥 공항으로 가야했지만, 여행이란 반드시 내 계획대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여행이기도 하니까요(기사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3월 12일, 제주도 협재바다와 포구에서 담은 사진입니다.
#천년의 섬 #비양도 #협재 #파도 #장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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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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