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향수'에 젖은 내 또래 '노털'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전진한다

등록 2015.03.18 15:47수정 2015.03.1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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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초로 투표권을 행사한 때는 1969년 10월이었다. 7월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 본부중대에서 대기병 생활을 하던 때였다. '삼선개헌 국민투표'에 참여하게 됐다.

투표 장소는 연대본부 인사과 막사 안이었다. 대위 계급장을 단 인사과장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투표'를 하게 됐다. 네댓 명 대기병 동료들의 맨 앞에 위치했던 나는 깜짝 놀라 맨 뒤로 돌아가 붙었고, 차례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깊은 갈등과 번민의 자맥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공포와 불안감 속에서도 과감히 ×쪽에 기표를 했다. 박정희의 삼선개헌에 반대를 한 것이다. 그 후의 얘기는 너무 길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기간병과 훈련병을 포함한 2500여 명 연대 병력 중 삼선개헌 국민투표(공개투표)장에서 반대란에 기표를 한 사람은 어쩌면 나 한 사람뿐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만 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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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훈련소 조교 시절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 조교 시절의 모습이다(오른쪽). 1970년 봄이었을 것 같다. ⓒ 지요하


삼선개헌에 성공(?)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맞붙은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 때는 투표를 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때 베트남 전장에 가 있었는데,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도 투표를 한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기가 막혔다. 어디에다 대고 항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박정희가 참 비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삼선개헌 국민투표 때도 명료히 했던 생각이었다.

나는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남은 군복무 기간 6개월을 최전방 중동부전선의 폭설과 혹한 속에서 생활했다. 철책선으로 투입되었을 때는 병장 계급장을 달고 분대장 근무를 했다. 그리고 1972년 5월 제대했다. 제대 직후에는 '남북7·4공동성명'이라는 대사건을 접했다. 그때는 '통일'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통일이라는 말이 어떤 '실감'을 안겨주는 현상을 경험했다.

하지만 1972년 10월의 '유신정변'을 목도하면서 '남북7·4공동선언'은 박정희의 속임수였음을 깨달았다. '시월유신'을 꾸미기 위한 계략이었음을 어린 나이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박정희의 비겁함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곧 '시월유신 국민투표'라는 정치행사를 맞게 됐다. 정권의 일방적 홍보에 현혹된 아버지는 유신헌법에 찬성을 해야 한다고 했다. 유신체제만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밥상머리에서 반박을 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누이동생을 설득하여 함께 반대표를 던지기로 했다. 제대로 된 투표장에서 비로소 해보는 비밀투표였다. 그럼에도 이상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유신헌법은 전국적으로 93%의 찬성표를 얻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고장(충남 태안)에서는 무려 97%의 찬성표가 나왔다. 그 사실에 나는 전율했다. 찬성 97%라는 숫자 앞에서 야릇한 공포를 체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0명 중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고작 3명꼴이라는 얘기였다. 그 3명꼴 안에 나와 누이동생이 포함됐다. 당장엔 누가 반대를 했는지 모르더라도, 급기야는 감시의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절로 곱송그려지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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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장에서 1971년 초 베트남 전장의 미군 헬기장에서. 대부대작전에 참가하여 정글에 투입되기 전 마지막 사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촬영에 임했다. ⓒ 지요하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으로 민주주의가 파멸의 길을 걷는 암울한 터널 속 같은 시절을 살아오면서 가끔 술에 취하면 "노털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줘야 이 나라가 산다"라는 소리를 주절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주절거리면서도 그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유신체제 찬성 93% 속에 함몰해 버린 내 또래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젊은이들이었던 내 또래들이 과연 흐르는 세월 속에서 의식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 그 함몰에 대해 자각의 눈을 뜨고 반성도 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으로 이입할 수 있을까? 의문을 떠올릴 때마다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에 도달하곤 했다.

고맙게도 어느새 세월이 바람같이 흘러, 시월유신 국민투표에 대다수 찬성표를 던졌던 내 또래들은 이제 60대 후반 '노털'들이 되어 있다. 그들 대다수는 오늘도 '박정희 향수'에 젖어 살고, 현 박근혜 정권의 지지층으로 남아 있다. 요지부동이다. 그들 덕에 박정희는 사후에도 전두환을 낳아 독재의 음영을 계속 드리울 수 있었고, 이명박으로 부활할 수 있었고, 오늘은 혈육인 박근혜로 말미암아 재생을 구가하고 있다. 그러니 북한에서의 김일성 못지않게 남한에서는 박정희 신격화가 추진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도 같다.

요즘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이른바 노털들에 대한 젊은이들의 공박을 심심찮게 듣는다. 노털들이 젊은 층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도 있고, 나라를 망친다는 말도 있다. 자연수명 연장으로 노털들은 넘쳐나는데 '노인다운 노인'들은 없다는 말도 들린다. 내가 젊은 시절 술에 취하면 주절거리던 "노털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줘야 나라가 산다"는 소리를 노털이 된 내가 오늘 다시 듣는다. 그런데 내가 그 소리를 할 때는 별 희망의 기운이 없었는데, 오늘 젊은이들의 그 말 속에는 희망의 기운이 있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지난 15일 발표한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0년 전에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단연 1위를 차지했는데, 올해에는 노무현이 1위로 올라섰다는 내용이다. 시사점이 크다. 10년 후에는 변동 폭이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오로지 TV 등 제한된 영역 안에서 일방적인 정보만을 주입받고 사는 노털들에 비해 오늘의 젊은 층은 다양한 방식으로 종합적인 정보들을 얻는다. 스마트폰 하나로도 세상 구석구석을 보고 읽는다. 종편방송들과 조중동 따위 수구족벌 언론들이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는 정보와 판단의 힘을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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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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