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 이난영, 그녀가 곧 돌아온다

가수 이난영 타계 50년 기념 축음기 콘서트 개최

등록 2015.04.10 17:53수정 2015.04.10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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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인 1965년 4월 11일 새벽, 한 시대의 노래가 소리를 거두었다. 한 달여 전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 공연에서 마지막 무대에 오르고 난 뒤, 가수 이난영은 마흔아홉 삶을 조용히 혼자 마쳤다.

한국 대중음악사 불후의 고전 <목포의 눈물>을 위시한 숱한 히트곡으로 1930~50년대를 풍미했던 이난영의 삶과 노래는 대중가요 100년 역사와도 묘하게 중첩되어 있다.


말년의 이난영


이난영은 1916년에 이옥례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호적상 이름은 이옥순).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보통학교도 중퇴해야 했을 만큼 힘든 유년을 보냈지만, 천부적인 음악 재능을 인정받아 1932년에 극단 태양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해 이난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듬해 1933년 일본 공연 중에는 첫 번째 음반을 녹음했고, 곧 오케레코드 전속이 되어 당대 최고의 가수로 성장해 갔다.

1935년 9월 '조선 10대 도시 찬가 모집'의 당선작 <목포의 눈물>이 발표되면서 이난영의 인기는 더욱 확고해졌다. 일제강점기 활동 가수 중 가장 많은 노래를 발표했고, 인기의 척도라 할 수 있는 개인 걸작집 음반을 낸 가수 8명 중 하나였으며, 일본 가요계에서도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이난영이 가수 데뷔 10년째가 된 1941년에는 소속사 오케레코드 주최로 10주년 기념 공연과 표창식까지 열렸는데, 당시 '가신(歌神)'으로까지 선전되었던 이난영이기에 가능했던,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난영이 일본에서 발표한 음반


무대와 음반을 통해 열정적으로 노래했던 이난영은 광복 이후에도 최고의 가수로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45년에 남편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단에서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며 때론 단발과 남장도 마다지 않았고, 1947년 최초의 국산 음반 제작에 성공한 고려레코드에서는 광복 이후 첫 번째 가요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김해송을 앗아간 뒤에는 자녀들을 음악가로 키우는 데에 헌신해 김시스터즈와 김보이즈의 미국 진출을 이끌었다. 1963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김시스터즈와 같은 무대에 서기도 하며 자녀들의 성공을 확인한 이난영은, 다시 귀국해 더욱 고독해진 시간을 보냈고, 결국 1965년 4월 11일 새벽에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이난영의 반백년 노래 인생은 시대를 풍미한 한 가수의 삶에 그치지 않고 한국 대중가요 백년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난영이 태어난 1916년에 최초의 대중가요 <카추샤의 노래>가 무대와 신문 지면을 통해 유행하기 시작했고, 대표곡 <목포의 눈물>은 가장 오래된 주류 장르로 꼽히는 이른바 '트로트'의 전형을 확립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중반 이난영과 김해송


이난영 자신이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것에 더해 다양한 인연으로 얽힌 주변 인물들의 면면 또한 화려하다. 전쟁 때 희생되지 않았더라면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모습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대중음악의 천재, 남편 김해송. 최초의 전문 드럼 연주자로 시작해 히트 작곡가로 성장한 오빠 이봉룡. 성공적인 걸그룹 활동과 미국 무대 진출이라는 두 가지 성과를 처음 본격적으로 이루어낸 딸과 조카, 김시스터즈. 그리고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가요황제', 만년의 연인 남인수.

극적인 희비가 파란만장하게 얽혀 있는 이난영의 삶을 반추하고 그의 숱한 명곡을 다시 들어 보는 타계 50년 기념 행사가 오는 4월 11일에 열린다. 옛 가요 사랑모임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는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이난영의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축음기 콘서트를 오후 6시에 개최한다.

이번 유정천리 축음기 콘서트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진, 음향, 영상 자료들이 대거 소개될 예정인데, 1933년에 발매된 이난영의 데뷔곡, 1957년과 1961년(추정)에 녹음된 이난영 육성, 1963년에 촬영된 미국 방송 출연 영상, 그리고 지금껏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던 이난영의 죽음에 관한 증언 등이 준비되어 있다.

이난영 타계 50년 기념 축음기 콘서트 ⓒ 유정천리


또 <목포의 눈물>을 비롯한 이난영의 대표작들도 발표 당시 음원 그대로 준비되었고, 그 중 일부는 유정천리 회원들이 소장하고 있는 축음기음반을 현장에서 직접 재생해 들어 볼 예정이다. 첫 번째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1933년), 일본 활동 당시의 작품 <アリランの唄>(1936년), 한국 재즈 불멸의 고전 <다방의 푸른 꿈>(1939년) 등이 주요 작품이다.

유정천리에서는 이번 이난영 타계 50년 기념 축음기 콘서트에 이어, 올해 9월 <목포의 눈물> 발표 80년과 내년 6월 이난영 탄생 100년, 그리고 한국 대중가요 100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역시 준비하고 있다.

<목포의 눈물> 80년 기념 음반에는 1936년에 발매된 일본어 버전, 이난영이 눈물 속에 부른 1957년 방송 실황 등 다양한 <목포의 눈물> 희귀 음원이 총망라될 예정이며, 이난영 전집 음반에는 지금까지 국내외 자료 수집으로 확보된 이난영의 모든 작품이 상세한 해설과 함께 수록될 예정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이난영 #목포의 눈물 #유정천리 #축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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