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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드라마 <미생>의 워킹맘 선차장 ⓒ tvN
며칠째 야근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잠잘 때 들어가는 시간이 많아졌고, 주말근무도 해야 했다. 아이들 얼굴을 며칠째 보지 못하니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여직원들은 어떨까? 회의할 때 주위를 둘러보니 여자, 특히 아줌마들이 별로 없다. 사원·대리급일 때는 30~40%정도는 되었던 것 같은데...
그 많던 여직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직종은 여자들이 하기 힘든 일인 걸까? 종종 '엄마가 될 줄 알았다면 직업선택에 신중을 기했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커갈수록 이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많던 여직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인터넷 뉴스 한 번 클릭하기 힘들 정도로 쉴 새 없이 일했는데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 퇴근시간까지 이어지는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오늘까지 급하게 해달라는 자료가 있었는데, 그제야 생각났다. 며칠 전부터 재촉했던 데이터라 일을 마저 마치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던 오후 7시 30분쯤,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민들레', '책 읽고 독후감'이라는 예약어로 알람이 울렸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맞다. 며칠 전 유치원에서 내 준 아이 과제가 있었다. 며칠째 일이 너무 바빠서 잊고 있었다. 내일까지 민들레꽃을 스크랩북에 붙여서 보내야하고, 책을 읽고 느낀 점을 그림으로 그려야 한다. 이런 건 시부모님께서 해주실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늘은 남편도 늦는다고 했는데... 부랴부랴 하던 일을 접고 사무실을 나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미친 듯이 뛰어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비가 와선지 오늘따라 버스가 오지를 않았다.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도착해야하는데, 차는 또 얼마나 막힐 것인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예전에 초등학생 아이를 둔 '워킹맘'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프로젝트가 너무 바빠서 집에 3일 만에 들어간 거야. 그것도 밤 12시에. 그런데 내일까지 엄마랑 같이 해서 가지고가야 하는 숙제가 있었어. 학교에서는 분명 3일이라는 시간을 준 것이지만, 아이랑 나랑 대면한 것이 3일만인데 어떻게 그 숙제를 내일까지 해갈 수 있었겠어? 아이한테 숙제 종이를 돌려주면서 이야기했어. '이건 지금 못한다, 그냥 가서 혼나라'고, '같이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아이가 울더라. 나도 울고 싶더라."
그 선배의 말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이런 전쟁 같은 시간을 치러야 하는 걸까. 그 선배는 이런 시간들을 매일 어떻게 쌓아가면서 버텨왔던 것일까? 막히는 빗속을 뚫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9시 30분. 거의 집에 뛰어 들어가다시피 도착한 후 아이에게 말한다.
"OO야~ 우리 책 읽고 그림 그리자."
평소에는 "엄마 왔다"이러면서 아이들을 안아주곤 하는데, 무슨 경주하고 온 사람마냥 헐떡이는 숨을 참고서 책을 후다닥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주는 건지 책장을 넘기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책을 읽어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아이가 따온 민들레는 스크랩북에 붙여놓고, 씻으러 들어갔다. 씻으러 들어가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아, 맞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
계속 일을 하다가 아이 과제가 생각이 나서 후다닥 집에 왔으니, 저녁을 먹을 새가 있었겠는가. 씻고 나와서 빵과 과일로 요기를 하고 잠자리에 누우니 오후 10시 30분이 되어가는 시간이다. 아이들 잠도 늦어졌다. 평소 같으면 9시 30분에는 잠자리에 들었어야 했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자정쯤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하던 일을 마저 할 요량으로 사내 시스템에 접속을 했다. 자료 작성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아마도 일을 다 마치고 왔으면, 또 아이가 잘 때 퇴근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늦게 잤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었다. 부스스 일어나서 알림장을 확인하다가 또 난리가 났다. 둘째 아이가 봄 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도시락을 준비해오란다. 잠이 순식간에 확 달아났다. 주간계획표에 있었는데, 내 일정에 등록한다는 것이 깜박했나 보다. 아침에 김밥 도시락 재료를 준비할 수도 없고, 허둥지둥 냉장고 안을 열어서 무슨 재료가 있는지 확인했다.
김밥은 이미 물 건너갔다.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로 대강 야채볶음밥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둥지둥 출근 준비하면서 도시락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야채를 썰어 넣고, 간을 맞췄다. 조금 늦게 출근하는 남편에게 볶으라고 시켜놓고 화장을 했다. 머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편에게 과일을 깎아서 도시락과 같이 준비하라고 시켜놓고, 나는 출근할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침에 그렇게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통근기차에 오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때, 출근길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는 것이 또 생각난다. 회의 준비는 하나도 안 했는데... 아침부터 바쁜 일정의 시작이다. 그나마 좀 덜 바쁘다는 부서로 옮기고 나서도 이 모양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어떤 전쟁 같은 시간들이 다가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버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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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 tvN
자기계발서와 육아안내서는 워킹맘에게 충고한다. "일과 육아에서 모두 완벽하게 잘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잘하고 싶다가 아니다. 그냥 현재를 버텨내고 싶다. 완벽히 잘한다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소풍 가는 아이 도시락을 준비 안 해줄 수 없고, 과제라고 내오는 활동을 해가지 않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거기에 회사 일을 늘 지연시킬 수도 없다. 회사에서 큰 성공을 바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당장 보고해달라거나, 내일까지 급하게 처리해달라는 일을 두고서 아이 때문에 일찍 퇴근하기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생각해보라. 심각한 회의를 오후 6시가 넘어서도 하고 있다. 임원이 실시간 보고를 하라고 하고, 팀장님과 관련자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책마련 회의를 하고 있는데, '저... 아이가 아파서...' 내지는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해서...', '아이 숙제 때문에...' 라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일이 바쁜데, 아이 핑계를 대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와야 하는 게 정말 싫다.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대부분의 워킹맘은 현장에서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며, 남편과 아이 양육자에게 전화를 돌리며 사정을 이야기 하기 바쁘다.
우리 어렸을 적에도 일하는 엄마들은 있었다. 우리네 엄마들도 이런 전쟁 같은 시간을 살았던 것일까? 엄마들의 전쟁 같은 하루 속에서 우리들이 커왔던 것일까? 만일, 내 딸아이가 나중에 나와 같은 삶을 산다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은 매일 버티는 삶을 사는 것, 전쟁 같은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다. 전쟁 같은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나에게 훈장이라도 선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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