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 기획자들... 강기훈이 무죄면 당신은 유죄다

[게릴라칼럼] 유서대필사건 무죄 확정에도 여전히 억울한 우리

등록 2015.05.18 17:02수정 2015.05.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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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무죄 확정에 기뻐하는 지인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던 강기훈 씨가 1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의 이부영 전 의원과 함세웅 신부, 김상근 목사 등 회원들이 대법원의 판결에 기뻐하고 있다. ⓒ 유성호


"라이터를 누가 건넸어? 다 알고 있어!"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보다, 너무 무서웠다. 24년 전인 1991년 5월 6일, 시내 가두투쟁을 나갔다가 '백골단'(당시 시위대 체포조를 부르던 말)에게 잡혔다. 경찰차에 태워져 헬멧과 곤봉으로 얻어맞으며 경찰서에 내려졌다. 잡혀온 일행과 분리돼 홀로 어떤 방으로 끌려갔다. 앞에 한 명, 양 옆에 한 명씩, 또 한 명은 내 의자 뒤에 섰다. '왜 데모했냐' 이런 건 아예 묻지도 않았다.

그해 5월 1일 학교 후배 김영균은 '노태우 정권 타도와 공안통치 분쇄'를 외치며 분신했다. 경찰에 끌려가 '그 방'에서 만난 이들은 내게, 김영균이 분신할 때 그에게 라이터를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윽박질렀다. 말도 안 된다는 항변에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는 낮은 대답이 돌아왔다.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똑같은 질문을 하고, 그때 상황을 글로 쓰라고 강요했다. 다음 날 학교 당국과 지역 종교단체의 탄원과 주선으로 풀려나면서 그들이 안기부 직원임을 알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너무나 무서웠던 1991년 5월의 기억

6월 10일, 시내에서 6월항쟁 기념대회에 참석한 동료가 연행돼 안기부 분실로 곧바로 이송됐다. 김영균 분신의 배후를 '만들어내기' 위한 집요한 질문과 고문. 동료는 죽어간 후배의 숭고한 죽음을 지키기 위해 22일 동안 안기부 분실에서 홀로 싸웠다. 수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수사 당국은 이적단체를 구성했다는 조직사건으로 방향을 틀어 20여 명의 선후배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자식아, 병신 되기 전에 불어! 너만 고생이야, 응? 우리가 너 같은 놈 한두 번 겪어봤겠어? 여기는 간첩을 잡는 곳이야, 알겠어? 그런 우리가 너를 왜 잡아왔겠어? (중략) 우리도 자꾸 말하기 귀찮으니까 알아서 해! 잘못되면 너 이 새끼야, 병신 돼! 어차피 밝혀질 걸 가지고 후배를 개 굽듯이 구워 죽여놓고 그게 안 밝혀지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어? 이 새끼야!" - 김영균열사추모사업회 추모집 중

당시 동료가 쓴 고문과 구타의 기록이다. 결코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러나 24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의 아픔을 다시 헤집고 세상에 드러낸 건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1991년 강기훈에게 덧씌워진 유서대필사건은 결코 수사관의 실수나 검찰과 법원의 판단 오류 때문에 빚어진 일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다.


김기설은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에 폭행당해 사망한 것에 항의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같은 해 5월 서강대에서 분신했다. 강기훈은 후배인 김기설의 분신자살을 방조하고 유서를 대신 작성했다는 이른바 '유서대필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3년간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사건 이후 24년이 지난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재심 결과 '무죄'를 확정했다.

1991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수서비리에 이은 강경대 사망과 연이은 분신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려 있었다. 유서대필사건, 후배를 불에 태워죽이고 유서를 대필하는 '패륜'의 시나리오는 수세에 몰린 정국을 반전시킬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때마침 저항시인으로 각인된 김지하가 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이 <조선일보>에 특필됐고, 서강대 박홍 총장은 '어둠의 세력' 운운하며 죽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서대필사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사건이었고, 강기훈은 그들에게 선택된 먹잇감이었다.

'분신 배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적단체 누명을 쓴 내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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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 이희훈


5월 14일 강기훈 무죄 판결 이후, 그 당시 고초를 겪은 한 후배는 "우리가 김영균에게 라이터를 건넸다는 '분신 배후'가 됐다면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아예 없었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했다.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지만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당시 정권은 정국 반전의 '한 방'에 혈안이 돼 있었다. 김영균이든 김기설이든, 후배를 죽음으로 내몬 '패륜'사건의 주인공이 필요했을 뿐이다. 강기훈이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가 '강기훈'이 돼야 했다. 나의 동료와 많은 선후배들은 '강기훈'이 되지 않았기에, 엉뚱한 이적단체 구성원이 돼 수감과 수배 생활을 해야 했다.

1894년 10월 프랑스는 유대인 사관 드레퓌스를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 종신형을 선고한다. 증거는 드레퓌스의 필적이었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재판에 크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결정적인 증거인 필적이 드레퓌스가 아닌 드레퓌스 상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를 묵인한다. 10년이 지난 1904년에 재심이 청구됐고, 무죄가 확정된 것은 선고가 내려진 뒤 12년 만이었다. 드레퓌스는 육군 소령으로 복직됐고, 이 사건은 프랑스 인권을 신장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이라고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조작'사건은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무려 24년의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서울고법이 강기훈의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검찰은 곧바고 대법원에 항고했다. 대법원은 검찰 항고 이후 3년이나 흘렀지만 답이 없었다. 그 세월 동안 강기훈은 간암이라는 병을 얻어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최근에도 건강이 더 악화돼 재판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24년 만의 무죄 판결. 그러나 당시 사건을 조작한 수사 당국이나 검찰, 숱한 의문점이 있는데도 유죄로 판결해 강기훈을 옥살이시킨 사법부는 일말의 반성조차 없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던 김지하 시인, 어둠의 세력 운운하며 죽음의 배후를 캐라고 연일 목소리를 높인 박홍 총장, 유서 대필을 기정사실화 하며 운동진영을 패륜으로 몰아간 <조선일보>를 위시한 보수 언론들. 강기훈이 무죄면 당연히 이들은 유죄다.

또 강기훈을 파렴치범으로 조작해 기소한 검사와 유죄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사과는 물론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올바른지 반문해봐야 한다. 당시 구속영장을 직접 청구하는 등 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은 신상규는 지금 동덕여대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2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배석판사 가운데 한 명인 부구욱은 현재 영산대 총장과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회장을 맡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해버린 이들이 교육현장에 몸담고 있다는 것, 소름끼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강기훈이 무죄면 국가는 유죄다... 반성과 책임 보여야

그뿐만 아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김기춘은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사건을 지휘한 강신욱은 대법관을 역임했다. 담당검사이던 남기춘과 곽상도 등은 여전히 권력의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강기훈이 3년의 옥살이 끝에 간암을 얻어 지금까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이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살았다. 강기훈의 무죄 확정에도 이들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법의 존엄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거취를 되물어야 할 때다.

단순히 경찰, 검찰, 법원의 실수와 오류로 빚어진 일이 아니다. 정권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그들은 있지도 않은 패륜을 기획했다. 강기훈의 24년 인생은 이들에 의해 망가졌다. 내 주변의 많은 선후배들은 분신 배후가 되지 않기 위해 '이적단체 구성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5월 18일, 강기훈이 당시 판검사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당연하다. 그러나 이들이 사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직접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드레퓌스사건이 프랑스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국가가 통렬한 반성을 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기훈은, 나는, 1991년에 '어둠의 세력'이 된 수많은 우리는, 유서대필사건의 무죄 확정에도 여전히 억울하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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