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제 권하는 사회, '보약' 찾는 고등학생들

[아이들은 나의 스승 38] 고등학생들에겐 잠잘 시간이 '보약'

등록 2015.06.04 15:59수정 2015.06.04 15:59
0
원고료로 응원
아침 교문에 서서 등교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괜스레 미안해지기 일쑤다. 피곤에 쩐 그들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 10대 특유의 생기발랄함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다는 설렘은커녕 마치 학교가 아닌 노역장에 출근하는 것 같은 일그러진 표정만 얼굴에 가득하다. 젊은 그들에게 오늘은 그저 쏜살같이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고통스러운 하루다.

교실에 들어오니 일찍 등교한 아이들이 엎드려 자고 있다. 올해부터 등교 시간이 30분 늦춰졌다지만, 그래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익숙한 풍경이다. 3년만 버텨내자고 다짐하지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니 매일 아침마다 몸은 천근만근이다. 아이들 중에는 등교 시간이 늦춰진 꼭 그만큼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다더니, 한 아이는 공부하다 새벽 2시 넘어 잤다며 뽐내듯 말했다.

'밥보다 보약' 스스럼 없이 말하는 아이들

a

민수(가명)의 사물함에는 약통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칼슘 보충제고, 다른 하나는 비타민제라고 한다. 매일 아침 복용을 하는데, 먹게 된 지는 꽤 오래 됐다고 한다. ⓒ pixabay


태우(가명)는 자리에 앉아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내려놓고 맨 처음 하는 일이 있다. 가방에서 보약을 꺼내 빨대를 꽂아 마시는 것이다. 작년부터 매일 아침 먹기 시작했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꺼내 마시기가 처음엔 쑥스럽고 어색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또래끼리 그다지 드물지 않은 풍경이어서 서로 담긴 내용물을 물어볼 만큼 익숙해졌단다.

아닌 게 아니라, 교실 내 분리수거함을 보면 보약 껍질이 종종 보인다. 시간에 쫓겨 아침을 거른다 해도 보약은 꼭 챙겨온다는 그는 먹기 전과 후가 확실히 다르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덕분에 비몽사몽 헤맸던 1교시 수업이 훨씬 덜 힘들게 느껴진다며, 새벽녘까지 공부를 해도 안심이 된다고 했다. '밥보다 보약'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는 '보약 예찬론자'다.

민수(가명)의 사물함에는 약통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칼슘 보충제고, 다른 하나는 비타민제라고 한다. 매일 아침 복용을 하는데, 먹게 된 지는 꽤 오래 됐다고 한다. 가족이 모두 먹는데, 특별히 어디에 좋아서라기보다 다들 피곤하니 애써 찾는 '피로회복제' 같은 것이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때그때 찾아 먹지 않으면 왠지 허전한 '일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태껏 시험 기간 중에는 카페인 음료를 즐겨 마셨다고 했다. 지금은 끊었지만, 당시엔 그 효과를 톡톡히 봤다고 한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캔이면 두세 과목 벼락치기 하는 일 정도는 너끈하단다. 여기저기서 하도 몸에 해롭다고 하니 눈에 보여도 선뜻 손이 가진 않지만, 혹 급할 땐 순간 고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종일 공부에 시달리는 아이들만 찾는 건 아닌 듯하다. 교무실에서도 갖가지 약봉지나 약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포장의 그림으로 보아 양파즙, 대추즙이 고작이지만, 듣자니까 동료 교사 중 출근하기 전에 장어즙이나 자라즙을 꼬박꼬박 복용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보약의 종류도 가지가지인 셈인데, 그나마 책상 위에 놓인 각종 영양제에 비하면 소수다.

비타민과 홍삼은 기본, 철분제, 오메가3, 셀레늄, 물에 타먹는 발포 비타민제에 이르기까지, 한데 모아놓으면 웬만한 약국의 영양제 코너 하나쯤은 차릴 정도의 양이다. 태어나 한 번도 영양제 같은 걸 먹어본 적이 없어 마냥 낯설고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에게 그것은 시나브로 삼시세끼 밥을 먹는 일과 같은 것이거나 적어도 식후 커피를 찾는 습관처럼 돼버렸다.

아이들에게 '보약' 대신 '시간'을 허하라

몸에 좋다는 걸 부러 찾는 거야 딱히 나무랄 일은 아니다. 더욱이 바쁜 일상 속 식사를 통해 충분히 섭취하기 어려운 영양소를 보충하려는 목적이라면 권장할 일이지 몽니부릴 일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오용'되고 있으며, 다분히 '중독'의 경향마저 보인다는 점이다. 보약과 영양제 등을 꾸준히 복용하는 이유를, 아이들도 교사들도 하나같이 "피곤하니까"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이 음주 전후에 먹게 되는 숙취 해소제가 떠올랐다. 부러 숙취 해소제를 찾을 게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거나 주량에 맞춰 적게 마시면 될 일이다. 음주의 고통을 해결할 근본적인 방안은 술을 강권하는 잘못된 음주 문화를 뜯어 고치는 것이다. 애꿎게 한낱 숙취 해소제에 의존해 뻔히 다음 날 시달릴 줄 알면서도 폭음을 하는 건 어리석고도 못난 짓이다.

교사들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이 피곤한 건 잠잘 시간이 태부족하기 때문이다. 매일의 부족한 잠을 영양제로 보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에게 '보약'을 지어주기 전에, 그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새벽 2시에 잠들어서야 어찌 다음 날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가능하겠는가. 피로는 휴식이나 잠으로 풀어야지, 결코 약으로 대신할 순 없다.

오전 8시 반에 등교해, 정규 수업 7시간에다 방과 후 수업 2시간이 끝나면 저녁 6시 반이다. 학교 급식소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하고나서 버스 타고 집에 가면 밤 11시가 넘는다. 씻고 간식 챙겨 먹고 못다 한 숙제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우면 빨라야 12시 반이다. 태우와 민수의 1년 365일 공통된 일과다. 그나마 하교 후 독서실 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널널한' 편이란다.

그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내뱉는 푸념이 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긴 그들도 그렇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행복해질 것이라 별로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남들 다 하니까 따라 하고, 그러자니 몸이 못 버텨 '보약'에 의지하게 된 것 아니겠냐며 반문했다. 그들의 부모라고 다를까. 어쩌면 자녀의 손에 들린 약봉지와 영양제는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격려'일지도 모른다.

사족 하나. 밑도 끝도 없는 공부 경쟁이 한창 커나갈 아이들의 잠을 빼앗아가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제약사들에게 아이들은 블루오션일 수도 있겠다. 요즘 들어 가장 '핫'한 광고는 모두 건강에 관한 것이다. 종편이나 케이블 TV는 말할 것도 없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입거나 신거나 먹는 건강 보조 제품을 하루 종일 선전하고 있다.

몇몇 영양제 광고에서는 먹기 전후의 상태를 비교해보라거나 작업 능률이 배가된다며 소비자들의 충동구매를 부추기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태우와 민수네 가족 모두 그 광고에 나온 영양제를 사서 복용하고 있단다. 둘 모두 그걸 먹는다고 건강해질 리 있겠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래도 먹지 않으면 더 나빠지지 않겠냐며 우려했다. 거칠게 말해서, '영양제 중독'이다.

'보약'을 먹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우리 교육이 그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주야장천 영양제 광고를 해대는 제약사와 방송사는 그저 '조연'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보약' 대신 시간을 허하라. 그들에겐 잠잘 시간이 '보약'이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영양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