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아이들과 파를 끊었습니다

[사진 노래] 마을이라는 삶터에서 살그마니 찍는다

등록 2015.07.18 14:54수정 2015.07.18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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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몸짓은 놀이가 되고, 모든 놀이는 어느새 사진이 됩니다. ⓒ 최종규


살그마니 손짓


만화책을 넘기는 손이 고요합니다. 칸마다 흐르는 이야기에 푹 사로잡힙니다. 아주 작은 몸짓조차 없이 바람조차 잠드는데, 문득 한손이 움직이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도록 천천히 한 쪽을 넘깁니다. 한 손은 책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살그마니 움직입니다. 새로운 쪽을 넘길 적에만 바람이 다시 불고, 새로운 쪽으로 넘어가고 나면 손짓도 사그라들고 바람도 숨을 죽입니다. 두 눈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는 마음으로 스며들고, 이 동안 둘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도 못 알아채거나 안 느낍니다. 책순이를 지켜보다가 내 어릴 적 모습을 돌아봅니다.

살짝 바지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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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서재이자 도서관은 언제나 책터이면서 놀이터가 됩니다. ⓒ 최종규


겨울에서 봄으로 들어설 적에는 갓풀이랑 유채풀을 썰어서 씁니다. 봄에는 쑥을 썰어서 쓰고,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고들빼기 풀하고 모시 풀을 썰어서 씁니다. 여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까마중 풀을 썰어서 쓸 만한데, 이런 들풀은 풀벌레가 몹시 좋아하는 풀이기도 합니다. 보드라우면서 맛날 때에 뜯지 않으면 어느새 벌레밥으로 모조리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풀벌레도 사람도 저마다 바지런히 살펴야 풀밥을 먹습니다. 갓 돋아 아직 풀벌레가 건드리지 못한 잎사귀를 한 줌 뜯어서 멸치 볶음에 섞습니다. 살짝 바지런하면 밥맛도 삶맛도 새롭습니다.

땀흘리면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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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서 모시풀을 뜯어서 멸치볶음을 하는 밥살림도 얼마든지 사진이 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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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도 어느새 사진이 됩니다. ⓒ 최종규


땀흘리면서 노는 아이가 참으로 싱그럽다고 생각합니다. 땀흘리면서 일하는 어른은 더 없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씩씩하게 뛰 노는 아이가 참말로 대견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운차게 일하는 어른이 그지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땀흘리면서 살고, 노래하면서 살아요. 서로서로 웃으면서 살고, 이야기하면서 살지요. 즐겁게 이루는 하루이고, 기쁘게 누리는 하루입니다. 즐거운 하루이니 사진을 찍고, 기쁜 하루이기에 사진을 새삼스레 찍어요. 내 즐거움을 사진 한 장으로 싣고, 함께 짓는 기쁜 삶을 사진 두 장으로 엮습니다.


마을이라는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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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곳에서 살아갈까요? 아름다운 곳이 있어야 그곳으로 가서 살 수도 있고, 오늘 우리가 사는 곳을 아름답게 가꿀 수도 있습니다. ⓒ 최종규


바닷마을은 바닷바람이 세기에 집을 다닥다닥 붙여서 짓는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돌울타리를 높게 쌓는다고 해요. 그런데, 집이랑 돌울타리만 있으면 바닷 바람이나 큰 물살이나 드센 빗줄기를 견디기 어려워요. 바닷가를 따라 '바람막이 나무'를 여러 겹으로 가꾼다고 하듯이, 마을도 숲정이로 감싸고, 집마다 나무가 우람하게 자라도록 돌볼 때, 비로소 비바람을 그으면서 집이랑 마을을 알뜰히 건사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나무가 있기에 열매를 얻고,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삶터를 돌봅니다. 나무가 없이는, 그러니까 숲이 없이는 문화도 역사도 사진도 없습니다.

우리 몸짓은 춤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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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을 하고 싶은 큰아이한테 칼을 맡기고 파를 끊도록 시킵니다. 곁에서 큰아이 손놀림을 물끄러미 지켜보니, 이 눈길도 고스란히 사진이 됩니다. ⓒ 최종규


신나게 잘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 몸짓은 언제나 춤입니다. 소꿉놀이를 하든, 마당을 달리든, 숟가락을 쥐든, 장난감을 잡든, 이를 닦든, 참말 언제나 춤이 되는 몸짓입니다. 춤은 스스로 즐겁다고 느끼는 삶일 때에 샘솟습니다. 빼어난 춤꾼한테서 배우는 춤이 아닙니다. 스스로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사람이 스스로 손짓이랑 발짓을 하면서 저절로 누리는 춤입니다. 아이들은 책이나 영화나 학교에서 '놀이를 배우지' 않아요. 스스로 즐겁게 온갖 새 놀이를 짓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삶을 즐겁게 사랑하면서 기쁘게 한 장씩 찍습니다.

비 오는 날 파를 끊기

여덟 살 아이도 부엌칼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 여덟 살 아이한테 부엌칼을 손에 쥐도록 하지 않으나, 가끔 작은 칼을 건넵니다. 마당에서 파를 뜯거나 자를 적에 여덟 살 아이한테 심부름을 맡기면서 한 줌 훑어 보라고 말합니다. 비 오는 날 파를 끊으려고 마당을 빙 도는 큰아이를 보고는 다섯 살 동생이 "나도! 나도!" 하고 외칩니다. 여덟 살 큰아이는 동생더러 "너는 아직 안 돼." 하고 말합니다. "나도 하고 싶은데" 하고 말하는 동생한테 "그럼 너는 우산 좀 씌워 줄래?" 하고 말합니다. 작은아이는 누나한테 우산을 받쳐 주면서 칼놀림을 살펴봅니다.

오늘 이곳에서 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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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며 비로소 기지개를 켭니다. 하늘도 볕도 바람도 좋아서 빨래가 잘 마르겠네 하고 생각하다가 마당에 드러누워서 하늘바라기 사진을 한 장 찍으며 놉니다. ⓒ 최종규


사진 한 장을 잘 찍든 못 찍든 대수롭지 않을 줄 느끼기 쉬울 수 있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제 막 한글을 익히는 아이가 글씨를 잘 쓰든 못 쓰든 대수롭지 않은 줄 안다면, 사진찍기도 이와 비슷하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즐겁게 글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글쓰기가 재미있고, 글씨도 정갈하게 거듭납니다. 즐겁게 살림을 꾸리면서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사진찍기가 재미있으며, 내 사진 한 장에 싱그러우면서 맑은 기운이 흐릅니다. 빨래를 널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늘 이곳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등허리를 톡톡 두들기면서 펴다가 하늘숨을 마시며 웃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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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작은아이는 '집'을 그렸다고 합니다. 어떤 집일까요? 아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깃든 그림을 오래도록 쳐다보다가 방 한쪽에 붙입니다. 사진은 사진기에 앞서 마음으로 먼저 찍습니다. ⓒ 최종규


가위질을 하고 싶어서 종이만 보았다 하면 오리는 작은아이는, 그림놀이를 즐기는 누나 옆에 엎드려서 그림 두 점을 그립니다. 방 바닥에는 작은아이가 갖고 놀다가 그대로 둔 장난감이 하나씩 늘어나고, 종잇조각이 널브러지며, 마무리로 그림 두 점을 놓습니다. "잘 그렸다. 아버지 보여주면 좋아할 거야" 큰아이가 작은아이한테 '다 들리는 귓속말'을 합니다. "아버지, 자, 다 그렸어. 한번 봐 봐" 작은아이가 빚은 그림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바알갛고 새까만 빛으로 하나씩 테두리를 북북 매기면서 힘껏 새겨넣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할머니 손을 거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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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아이한테 씨앗을 건네는 손길이 애틋해서 마음으로 이 모습을 담다가, 마음으로만 담을 수 없구나 싶어서 얼른 사진기를 들어서 한 장 남깁니다. ⓒ 최종규


할머니가 아이한테 씨앗을 건넵니다. 아이는 할머니한테서 받은 씨앗을 손바닥에 곱게 올려놓고 한 톨씩 살살 집어서 흙으로 옮깁니다. 밭에서 함께 일하니 밭순이가 된 시골순이는, 씨앗을 심는다기보다 아주 곱게 천천히 옮깁니다. 어느 모로 보면 느린 몸짓이지만, 땅에 심는 씨앗을 한 톨씩 낱낱이 살피면서 아끼는 숨결이라고 할 만합니다. 후딱 끝내야 하는 밭일이 아니라, 기쁜 넋으로 곱게 하는 씨앗심기가 될 때에, 나중에 이 씨앗이 자라서 맺는 열매를 고맙게 얻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흐르는 핏줄이, 먼먼 옛날부터 흐르는 핏줄이, 오늘 이곳에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사진노래 #삶노래 #사진읽기 #사진이야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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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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